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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요하문명이 고조선 문명인 까닭<1>

홍산문화 유물에 보이는 인장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박선희 교수 | 기사입력 2012/10/03 [09:49]
이 글은 홍산문화유적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도장이 중국학자들의 견해처럼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고조선문화와 관련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옥도장이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임을 다음의 내용들을 통해 명확히 밝히게 될 것이다. 글 차례는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2장. 홍산문화 출토 옥인장의 주체 검토  3장. 홍산문화가 지속된 고조선문화(1절. 옥으로 만든 복식유물과 고조선  2절. 채색기법의 성격과 고조선문화  3절. 석경의 기원과 고조선문화)  4장. 옥인장은 환웅의 ‘신시’문화 유산으로 한다.
 
최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옥도장의 주체해명을 통해 그 까닭을 밝히게 될 것이다. 홍산 옥인장의 주체가 ‘중화민족제일인’이 아니라 환웅천왕 ‘신시’문화의 상징물로 올바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필자 주>  
                                               
1장. 홍산문화의 성격과 옥인장 출현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나만기유적에서 두 개의 옥인장이 출토되었다. 중국학자들은 이 옥인장에 모두 구멍이 뚫려있어 끈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양식에 따라 동물형 옥인장(그림 1)과 쌍두조형 옥인장(그림 2)으로 분류하였다. 이 옥인장에 끈을 꿰어 의복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옥인장이 홍산문화의 특징인 옥으로 만든 용과 새 등의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어 만들어진 시기를 홍산문화시기(서기전 4500〜서기전 3000)로 추정하며 ‘(中華民族第一印)’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홍산문화유적에서 패대에 사용되었을 다양한 복식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달리 고조선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나타내고 있어 중국학자들이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성격을 근거로 옥인장의 주체를 올바르게 해명하는 목적을 가진다.
    
홍산문화는 내몽고 동남부와 요령성의 서부 적봉, 조양, 능원, 건평 등을 중심으로 하며, 하북성 북부, 노합하상류, 대릉하 상류와 중류로 유적지가 넓게 분포되어있는데 고조선 질그릇의 특징인 새김무늬 질그릇들이 출토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홍산문화는 주로 복식품으로 사용되었을 옥기뿐만이 아니라 적석총, 제단, 성곽과 취락유적들이 함께 두드러진 문화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용되었을 악기와 도구 등의 유물에서 보여지는 문화적인 의미와 상징적 가치 역시 뛰어나다. 특히 홍산문화 후기(서기전 3500〜서기전 3000년)의 우하량유적은 제단과 여신묘, 적석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유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사회발전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 옥인장의 인면     ©브레이크뉴스

 홍산문화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문화현상들은 중국문화와 확연히 구별되고, 고조선문화와 이후의 여러 나라 시대 문화 특징에 지속적인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을 ‘중화민족제일인’으로 해석하는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중화주의에 따른 헛된 집착일 뿐이다.
     
중국학자들은 어떠한 유물을 분석할 때, 대상유물과 동반유물의 기원과 양식 및 문화적 상징성 등에 관한 변천사적인 연구가 선행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유물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내려져야하는 마땅한 수순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아주 단순히 오늘날 만주가 그들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의도적인 경향이 많다. 홍산 옥인장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유적은 홍산문화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의 요소로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의 사용 등을 든다. 신석기시대에서 동석병용시대 속하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서기전 3,000년)는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옥인장을 비롯하여 복식유물로 보이는 곡옥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옥기가 많은 량 출토되었다.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곡옥을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옥기의 사용은 중국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훨씬 이르며 곡옥의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거주지인 흥륭와유적(서기전 6,200년∼서기전 5,200년)에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옥귀걸이(그림 3)와 함께 옥도끼 등 지금까지 약 100여점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중국의 옥전문가들은 흥륭와유적에서 출토된 옥귀걸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옥기의 재료는 분석결과 요령성 수암현에서 생산되는 옥으로 밝혀졌다. 흥륭와유적에서는 옥기와 함께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새김무늬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 흥륭와유적출토 옥 귀걸이     ©브레이크뉴스
 
한반도에서는 흉륭와유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속하거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에서 수암옥으로 만든 것과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그림 4) 출토되었다. 또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패총유적(서기전 4,000∼서기전 3,000년경)에서도 문암리와 거의 같은 유형의 귀걸이가 발굴되었다. 이후 한반도지역의 여러 유적에서는 옥기가 계속 출토되어지는데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발달 양상을 보여준다.
   
흥륭와문화는 이후 요하지역의 주요 신석기문화인 부하문화(서기전 5,200년∼서기전 5,000년)로 이어지고 대체로 같은 분포지역에 있는 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와 병존하면서 발전해 나아가 동석병용시대인 홍산문화로 이어진다. 흥륭와문화는 홍산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라고 하겠다.
 
두 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내는 유물은 옥기뿐만 아니라 질그릇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주의 흥륭와유적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옥기가 출토된 문암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는 한민족 특징의 새김무늬 질그릇이 함께 출토되어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 아울러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수공업 생산기술의 교류와 상품 교역이 활발했음도 알 수 있다. 나만기유적에서 출토된 옥인장은 이러한 교역에서 필요한 정치적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장의 출현은 사회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마련이다. 농업과 함께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단취락지가 형성된다. 집단취락지의 형성은 정치적 지도자를  출현시키며 통치체계를 갖추게 된다. 아울러 그와 관련된 구조물과 상징물들이 마련된다. 그 예로 신석기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에서 보이는 돌무지무덤과 규모가 큰 건축물 및 정교한 옥기의 생산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하량유적은 여러 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정치적 지도자가 출현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고 전문 수공업자가 출현했으며 전쟁의 발생과 함께 종교의 권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다량의 방직도구와 재봉도구가 출토되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사회변화의 요소로 돌무지무덤, 성터의 출현, 옥기 사용 등을 들었으나, 복식자료로부터 본다면 방직도구와 재봉도구의 급격한 증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옥인장이 출토된 나만기의 유적들에서도 흙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발견되었다. 성벽 안에서는 많은 량의 채색 질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질그릇과 옥기, 뼈와 뿔 및 돌로 만든 생산도구와 방직도구, 재봉도구 등이 출토되었다. 성곽유적은 정치적 지도자가 무리를 통치하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자취를 보여주는 정치적 구조물이다. 이들은 공동체에서 생산한 옥기를 비롯한 수공업품과 농업품 등으로 큰 규모의 교역을 진행하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인장이 쓰여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장은 정치지도자가 직권을 행사하는 상징물이며 공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만기의 여러 유적들에서는 한민족 문화의 특징인 새김무늬와 기하학문양의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고고학의 발굴보고서 등을 중심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우리 옥기문화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인장의 주체가 고조선 이전 환웅의 ‘신시’문화였음을 밝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홍산 옥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고조선 문화가 이후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보여주는 지속성의 실체와 정체도 함께 해석하고자 한다. <계속>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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