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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부터 풀, 꽃, 흙, 열매, 뿌리, 곤충, 돌 등의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하였다. 그 실제 예들이 암화와 벽화, 채회도, 채도, 칠기 등에서 보인다.
신석기시대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사실은 적봉시 오한기에 위치한 조보구유적(서기전 5000년〜서기전 4400년)에서 출토된 그림이 그려진 채색질그릇에서 처음 보인다.
황하유역의 앙소문화(서기전 4512〜서기전 2460년)에서 보이는 채색질그릇보다 이른 시기이다.
요령성 심양 부근의 신락유적(서기전 5000년경)에서는 채색질그릇과 함께 붉은색과 검은색 염료가 출토되었다. 붉은색 철광석과 석묵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연마기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이 연마기를 사용해 염색재료를 만들었음을 알게 한다.
흑룡강성 목단강 해림현에 있는 자하향암화에는 적색과 자색의 광물성 안료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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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조달맹의 석붕산유적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에서도 같은 문양이 나타난다. 이 문양은 질그 릇에 연결되어 문양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른 부호와 함께 연속하거나 단독으로 그려져 원시글자 혹은 도화자로 인식되며 ‘뢰’ 혹은 ‘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로 홍산문화의 제사유적들에서 이 부호가 나타나고 있어 제사와 관련된 의미를 내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들에서 나타나는 피리와 같은 관악기 등 어떠한 악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객좌 동산취유적과 우하량유적, 릉원 삼관전자유적, 부신 호두구유적에서는 모두 밑바닥이 없는 채색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처럼 밑바닥이 없는 직통형의 채색질그릇을 당시 사람들이 가죽을 씌워 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우하량유적 제16지점 하층
적석총에서 출토된 통형 채색질그릇의 입구 부분에 테둘레가 있어 북면의 가죽을 편리하게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채색질그릇은 주로 큰무덤과 주무덤의 외부를 둘러싸며 세워져 있어 특정한 제사형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아울러 제사의식과 채색은 연관성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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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유적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의 질그릇과 함께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붉은색 안료가 담긴 돌그릇과 채색질그릇 부분 붉은색 안료가 담긴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그릇이 출토되어 채색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게 한다. 그 외에 고형의 칠기도 출토되어 칠기의 역사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음과 다양한 채색기법이 발전해갔음을 알게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자연의 재료로부터 염료를 채취하여 질그릇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감을 들이는 등 채색과 염색을 생활화 한 모습은 고조선시기로 오면 보다 과학적인 발달을 이룬다. 고조선 사람들은 복식에서 장식기법과 직조기법 뿐만 아니라 염색기법에서도 독창성을 보인다.
삼국지의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전에서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옷은 무늬가 없는 것을 숭상했으며, 무늬 없는 포로 만든 큰 소매의 겉옷과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했다. 동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였으므로 그들의 복식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들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로 아래 폭이 넓게 퍼져 있거나, 긴 길이의 겉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부여에서 입었던 큰 소매 달린 겉옷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부여의 넓은 폭과 긴 길이의 겉옷을 입었던 모습은 길림시 모아산에서 출토된 도용에서 확인된다. 위의 삼국지 동부여에 관한 서술내용에서 ‘尙白’과 ‘白布’가 보인다. 白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번역하여, 부여사람들이 흰색 천을 숭상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 달리 실제로 고조선시대부터 줄곧 많은 생산량을 가지며 복식재료로 즐겨 쓰여 졌던 실크의 경우 색상과 문양이 화려한 상태로 출토되어진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고조선과 최리 낙랑국이 생산한 많은 량의 다양한 종류의 사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천들은 모두 염색한 것이었고, 바탕색과 다른 색으로 문양을 직조하여 넣은 것도 있으며, 일부러 색상을 내기위해 탈색 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이처럼 염색과 탈색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본다면 부여에서 겉옷을 만들었던 천들은 염색을 통해 문양이 두드러지지 않게 단아한 색감을 냈을 것이다.
실크는 정련공정에서 약간의 세리신을 남겨두는 것이 탄성을 부여하는데 더 좋으며, 세리신이 섬유표면에 0.5퍼센트 남아있는 경우에 완전히 정련된 경우에 비하여 염색이 최고 1.6배나 진하게 된다. 특기할 것은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천들이 성분분석 결과 이 같은 과학적인 염색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점이다.
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실크들은 모두 염색을 거친 직물로서 주로 밤색과 자주색을 띠며 문양이 없는 것과 문양이 있는 것, 또는 넝쿨문양을 수놓은 것, 붓으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 다양한 기법을 표현한 염색직물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발달되어진 천연염료의 생산과 발달은 고조선시대에 오면 복식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의복에 문양을 그려 넣거나 실이나 천을 염색하여 문양을 직조하여 그 위에 색실로 수를 더하는 등 고유한 기법으로 화려한 복식문화의 갖춤새를 정형화 시킨다.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 복식에도 고분벽화 등에는 흰색의 옷은 보이지 않고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문양이 있는 의복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는 금(錦)으로 상징될 만큼 금(錦)을 즐겨 입었다. 금(錦)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이고 이를 섞어 화려한 문양으로 짠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등에서 이야기하는 ‘白衣’는 흰옷을 의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의’는 단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늬가 같은 계통의 색상으로 표현되어 옷의 바탕색과 무늬가 서로 크게 이색지지 않고 단아한 조화를 이룬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의 복식은 고구려로 오면서 색실로 짜 넣는 직조기술과 염색기술에서 더욱 발전양상을 보이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식에는 특히 기하학문양이 많이 표현되었다. 문양은 주로 둥근 문양과 네모문양, 마름모문양 등으로 다양하며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문양도 있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이 복식에서 나타낸 문양들은 주로 염색기법과 직조기법, 자수기법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복식에 나타나는 색상은 고조선의 염색기술을 이어 색실로 직조한 것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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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한 직물을 침염법으로 염색한 것으로 기하학문양을 나타내는 염색법에는 홀치기염과 납힐기법, 채회기법, 협힐기법 등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염색기법과 자수기법을 혼용하면서도 그 위에 장식기법을 더하여, 우아하고 화려한 복식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
고구려의 장식기법은 기학학문양의 또 다른 표현 양식으로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것이 지속된 것이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같은 양식의 문양이라도 크기와 양식의 차이 및 기하학적인 선의 방향을 달리하여 개성 있는 복식문화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독창적인 색상과 문양을 나타내는 복식기법은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채색기법 위에 고조선의 전통기법을 발전적으로 지속해 나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shpark@smu.ac.kr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