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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의 역사적 의미(2)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5/04/29 [09:36]

제주도에 뜻밖에 표류하게 된 하멜 일행에 대하여 당시 조선 조정은 1천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감시하였다고 하니 그들의 출현에 대하여 조선조정이 얼마나 놀랐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한 제주도와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그것은 제주도는 바로 광해군이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승하한 곳이라는 점인데, 공교롭게도 그가 승하한지 12년 만에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멜표류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새로운 인물이 있으니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원진이다.

 

▲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이원진은 이익의 당숙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특히 깊은 감명을 받은 점은 그가 제주목사로서 하멜일행이 제주도에서 생활하는데 있어서 최대한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내용은 하멜표류기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한편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할 때 타고온 배에는 각종 무기를 비롯하여 은 수백냥과 서양과학 문물이 있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조선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가지고 온 서양과학 문물이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운 심정인데 이렇게 하멜 일행이 가져온 서양과학 문물도 조선의 발전을 위하여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에 아쉬운 심정 금할 수 없다.

 

물론 효종이 하멜일행들을 도성에 불러서 훈련도감에 국왕호위병으로 배속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는데 하멜일행은 조선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 줄 수 있는 고급인재들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멜일행들이 결정적으로 위기에 봉착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청나라 사신들이 돌아가는 길에 그들중의 2명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조정은 이러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에 난처한 입장이 되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2명은 체포되어 결국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하멜일행들은 엄격한 감시를 받다가 결국 전남 강진 병영으로 추방이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이 강진에서 생활한 기간이 7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여기에서 노역에 종사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조선에 서양과학을 전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하멜일행들에게 노역에 종사하게 한 것은 당시 국가적인 손실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강진 생활 7년만에 33명중에서 11명이 사망하여 결국 22명으로 줄어 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나라에 발생한 대기근의 영향으로 일행들에게 제대로 지원을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1663년 다시 이들을 여수 전라좌수영에 10명을 비롯하여 남원,순천에 각각 5명씩 분산수용하게 된다.

그러다가 조선에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낀 상황에서 마침내 생존자 16명중에서 8명이 중대결단을 내리게 되니 그것은 집단탈출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1666년 8월 전남 여수해안에서 배로 탈출을 감행하여 9월에 배가 난파되기 전의 본래 목적지인 나가사키로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본래 그들이 제주도에 표류할 당시 총 인원이 36명이었다는 것인데 이중에서 이미 20명이 죽었다는 것이니 이것을 통하여 볼 때 그들의 생활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수에서 일본으로 탈출할 당시 16명이 생존하였다는 것인데 이중에서 실제적으로 탈출한 선원들은 8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에서 탈출하지 못한 나머지 8명은 그로부터 2년후인 1668년 조정에서 협약에 따라 일본으로 송환하였는데 그중에서 1명만이 조선에 끝까지 남을 것을 고수하였는데 이 선원은 스페르베르호의 요리사인 얀 클라슨  이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안타깝게도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한편 탈출에 성공한 하멜을 포함한 8명의 선원들은 일본에 머문지 1년만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있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야(자카르타)에 도착하였는데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나가사키에서 체류하는 기간에 13년동안 밀린 임금을 지급받기 위하여 작성한 보고서안에 포함된 일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하멜을 제외한 7명이 1668년 하멜일지를 가지고 바타비야(자카르타)를 출발하여 네덜란드에 도착한 이후 서두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하멜표류기가 각각 출간되었으며, 그 이듬해 또다른 판이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이러한 하멜표류기가 출간된 이후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머물고 있던 하멜이 1668년 조선에서 일본으로 송환된 생존자 7명과 함께 네덜란드로 귀국한 해인 167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조선왕국기가 첨부된, 벨파트섬 해안에 난파한 화란 선박의 이야기”란 제목으로 미뉘톨리 신부가 불역판을 내놓았고, 그 이듬해 1671년에는 독역된 하멜일지가 뉘렌버그 총서에 실렸다.

 

아울러 영역판은 1704년 영국 런던에서 출간되었는데 존 처칠이 편찬한 하멜일지는 미뉘톨리의 불어판을 영어로 중역한 것이었으니,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하멜표류기가 당시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멜표류기의 출간은 네덜란드로 하여금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진 조선과의 무역을 추진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구체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69년 건조한 새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라 명명한 것을 보아도 그러한 분위기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조선으로 출발하는 배의 이름까지 명명하여 출항을 앞둔 시점에서 뜻밖의 변수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조선과 무역을 원하지 않는 일본측의 강경한 입장이었다는 것인데 일본은 동인도회사측에 만약에 조선과 직접 교역에 나선다면 나가사키 상관을 폐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일본과의 교역중단을 감수하고 조선에 새로운 모험을 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멜표류기의 역사적 의미는 네덜란드인 하멜이 13년동안의 조선에서의 억류생활을 기록한 것을 통하여 유럽에 최초로 조선을 소개한 책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이 유럽과 교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왕을 비롯한 조정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수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뼈아픈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pgu77@naver.com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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