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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죽(墨竹)의 전아(典雅) 質朴한 예술세계

이일구 대나무 그림展 ‘댓잎에 바람일어’...전통 동양화에 현대적 기법 가미

김대열(동국대교수) | 기사입력 2009/09/25 [19:00]
동양회화에서 '文人畵' 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이 적극 제기된 것은 明代의 일이다. 회화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그려지는 대상으로부터 그리는 자, 즉 화가의 문제에서 회화의 본질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인화는 특정한 형태 혹은 화가의 신분에서 그 본질이 이해되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즉 '水墨'이나 '文人'으로 그 본질을 제한해갈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재 문인화에 대한 이해는 화가의 회화에 대한 자각보다는 특정한 형태 등에 제한하여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인화에 대한 이론적 실제적 정의는 명확하지 않지만 원래 의미의 ‘문인화’는 문인 ? 사대부 등의 지식계층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 즉, 그림을 직업으로 하는 화가가 아닌 업여화가(業餘畵家)의 그림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覃雲 李一九는 문인화 작가라 지칭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방송미술전문가로서 자기의 본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밖의 활동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업여(業餘) 활동의 결과로 축적된 서예 ·문인화 양식을 오히려 자기 전문 직종에 접맥시켜 방송미술 분야의 새로운 변화와 문화적 정체성 확보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옛 것을 빌어 오늘을 펼친다( 借古以開今).”라고 말한 중국 명말 청초의 화가 석도(石濤)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하겠다.

覃雲은 죽(竹; 대나무)을 주 소재로 하여 스스로의 예술의지를 펼치고 있다.
이 대나무는 과거의 문인 사대부들이 매(梅)?난(蘭)?국(菊) 등과 함께 자신의 품격을 의지하여 표현하던 화목(畵目)으로 그 중에서 특히 죽과 난은 표현의 방법상 서법과 관련이 많은 것이었다. 따라서 사군자(四君子)는 뜻과 운필을 강조한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
 
覃雲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 문인들의 ‘청풍고절(淸風孤節)’, ‘백절불요(百折不撓)’의 대나무가 아니다. 공허하고 쓸쓸하게 몇 번의 붓질로 그려지는 죽림(竹林), 갈필(渴筆)을 통해 형성되는 고담(枯淡)함, 용필에 있어서 얻어지는 고고(枯槁)하면서도 습윤(濕潤) 임리(淋?)함, 황량 고적한 풍경 등은 과거에도 보여 지던 형식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표출은 그가 옛 것에 대한 각고의 노력과 잠심탐구(潛心探究)의 결과로 얻어낸 그만의 것이며, 작가는 여기서 그의 예술의지, 오늘의 시대정신을 서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대나무와 함께 불쑥 던져지는 돌덩이는 과거의 기기(奇奇) 절묘(絶妙)한 기
암괴석이 아니라 세월과 풍파에 아무렇게나 마모되어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런 돌들이다. 그 돌과 함께 척박한 땅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는 대나무, 이는 고절한 선비의 기개(氣槪)가 아니라 이 시대 소시민의 삶의 표현이며 황량한 강가 혹은 급박한 경사면 언덕에 드리워진 대나무는 과거 선비들의 불굴의지의 상징이 아니라 각박하고 황폐한 현대사회 환경을 얘기하고 있다.
 
문인화는 사제전승(師弟傳承)을 전통의 특징으로 여겨 왔으며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 유습이 남아 있다.

그러나 覃雲의 작품에서는 그 표현방법이 누구의 기법을 받아드려 이를 자기화 하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역대의 화보나 작가의 기법을 대조해 보아도 쉽게 살펴지지 않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는 전통을 거부하고 고법(古法)을 따르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전통기법에 대한 오랜 탐구와 연마로 얻어진 대담하고 거침없이 구사하는 화면 구성이다. 그가 숙련된 운필을 통해서 나타내는 때로는 농(濃)하고 때로는 담(淡)하기도 한 표현은 단순히 물상에 대한 외형의 표현이 아니라 거기에는 생명력이 부여되어, 살아있는 생명의 리듬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회화 기법의 창신성(創新性)은 고법(古法)을 통해 신의(新意)를 표출하면서 신법(新法)을 통해 고의(古意)뿐만 아니라 그 밖의 것을 드러내고 있다.

覃雲은 수묵과 아울러 색채의 활용을 통해서 정서 표출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 또한 전통 문인화의 용색(用色)정신을 깊이 있게 탐구한 결과이다.

覃雲의 용색은 색채를 칠〈塗抹〉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쓰듯 색채로 쓰〈寫色 〉는 것이 특징이다. 이 사색에 의해 드러나는 전아(典雅)한 담채는 ‘이색파묵(以色破墨)’, 때로는 ‘이묵파색(以墨破色)’ 함으로써 수묵과 색채가 상호 혼염(渾染)되어 풍부하고 미묘한 시각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그가 구사하는 필묵과 색채의 ‘수의성(隨意性)’은 그가 추구하는 천연스럽고 청신한 문인화 전통 미감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이와 같은 무의식적 혹은 수의성에 의하여 나타나는 화면의 자연스럽고 질박한 풍격은 작가의 세련된 필묵운용과 상호조화를 이루어 예술의 격조를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覃雲이 대나무를 즐겨 그리며, 오랫동안 거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가 대나무라는 단일 소재만으로도 그의 정서를 다 표출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대나무를 그리는 예술행위는 대나무 자체를 잘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예술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내용이 깊어지다 보면 자칫 형식의 결핍을 가져오게 되고, 형식에 치중하다 내용의 소홀과 함께 형식주의 경향으로 흐를 수 있음이다.

그 실례를 원대(元代)의 문인화가 예찬(倪瓚)의 견해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찬은 자신의 묵죽은 이미 흉중(胸中)의 일기(逸氣)를 나타낸 것에 불과하며 형사(形似)는 그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즉 잎의 많고 적음, 가지의 휘고 곧음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다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른바 그림이라는 것은 일필로 대략 그려 형사를 구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즐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僕之所謂畵者, 不過逸筆草草, 不求形似, 聊以自娛耳.”(倪瓚,淸悶閣遺稿)
이와 같은 예찬의 견해는 회화의 형식주의를 보이는 하나의 예이며. 이후 이에 대한 잘 못된 이해로 과거의 ‘문인화’가 형식주의 기교주의로 흘러 아주 헤어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이는 예찬이 상당기간 동안 자연에 파묻혀 자연의 요체를 터득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새로운 표현 방법으로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여 이루어낸 결과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앞사람들의 외형만을 추종하고 그들의 자연에 대한 심오한 경지를 인식하지 못한 나머지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감을 상실한 것이다.

覃雲은 이를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그는 여기에 생명감을 불어넣고 이 시대의 문인화를 창출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고단한 예술여정을 외롭게 항해하고 있다.
覃雲의 항해가 석도도 예찬도 아닌 覃雲 스스로의 예술경계, 이 시대의 ‘문인화’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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