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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식물 생태계 차이로 본 '고조선 면직물'

복식재료 가운데 천연섬유는 특히 생태계와 밀접한 관련

박선희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03/09 [09:20]
복식재료 가운데 천연섬유는 특히 생태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고대에는 천연섬유를 이용하여 실을 뽑고 옷을 짰기 때문에 동식물 생태계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동물섬유는 동물생태계와 관련이 깊은 것처럼, 식물섬유는 식물생태계에 따라 생산될 수밖에 없다. 식문화가 농작물의 생태계와 관련되어 형성되는 것과 같이, 천연섬유는 어느 것이나 자연생태계의 조건 또는 식생과 밀접한 관련성 속에서 형성된다. 복식문화와 생태계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 박선희  교수 ©브레이크뉴스
그런데 일부 복식의 경우에는 외래 품종이 들어와 경작됨으로써 비로소 관련 복식이 형성된 것처럼 알려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보기가 문익점의 목화씨 전래 이후에 비로소 한국에 면직물이 생산되기 시작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문익점이 중국에서 인도면의 목화씨를 새로 들여오기 훨씬 전인 고대부터 재래종 면이 자생하고 있었다. 이 재래종 면을 원나라의 목면과 달리 초면이라 한다. 따라서 고대 한국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초면으로 무명실을 뽑아 면직물을 생산했다. 
  
초면으로 고구려에서는 백첩포(白疊布)를 생산했고 신라에서는 백첩포와 면과 실크의 합사직물인 면주포(緜紬布)를 생산했다. 이어서 고려도 백첩포를 생산했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에서 꽃이 크고 생산량이 많은 인도면종인 목화를 들여오면서 초면은 급격히 사라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면방직이 문익점과 정천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던 것은 바로 인도면이 처음 길러졌다는 것일 뿐이다.
  
종래에는 첩포를 모직물로 해석했기 때문에 고대 한국에서 면직물이 생산되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 면주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해석된 적이 없다. 이로 인하여 한국에서 면직물이 생산되기 시작한 연대는 고려 공민왕 12년 문익점이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와 공민왕 14년(서기 1365년) 목화재배에 성공했던 시기로 인식되어져있다.
  
목화는 크게 아프리카면과 인도면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인도·동남아시아‧서아시아‧중앙아시아의 목화는 인도를 발원지로 하는 인도면화의 종자로 알려져 있고 고고학의 발굴자료에서도 이미 밝혀진 바 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면종자는 바로 이 인도면이었던 것이다. 백첩포는 동아시아에서 고대 한국과 지금의 신강지역에 위치한 고창에서만 생산되는 야생면인 초면을 가리킨다.
  
이처럼 지역마다 서로 다른 면종자를 재배한 것은 농업생산이 환경의 산물이라 할 만큼 종자는 환경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작물 생장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크게 외적으로 환경요인과 내적으로 유전자요인을 들 수 있다. 환경요인은 주로 기후와 토양, 생물학적 요소로서 종자가 생명체를 번식시키는 일차적인  배경이 된다. 종자는 결빙과 불, 홍수, 동물의 먹이, 온도차 등 외적인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도 생존력을 유지시켜 환경조건이 양호해지면 발아와 생장을 하기위해 기다리는 생태학적인 이치를 지니고 있다.
  
작물이 발육하고 열매를 맺는 기간은 유전과 환경 특히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중국과 한국에서 인도면이 개체발생을 하여 정착했던 것도 같은 요인에서 였다. 개체 변이는 환경의 영향에 의해 종류가 같은 생물에서 각 개체 사이에 나타나는 형질의 차이를 의미한다. 인도면이 중국에 들어와 토양이나 기후 등의 영향에 의해 변형된 인도면이 되고 그것이 다시 한국에서 한국적인 생태에 맞게 형질의 변화를 갖은 것이라 하겠다. 
 
초면인 백첩은 한국과 신강, 감숙성 하서주랑의 북위 35〜45도에 위치한 한랭한 대륙성 기후에서 자란다. 이는 한랭한 기후의 일장과 온도가 초면 종자의 개화와 결실에 알맞기 때문이다. 1920년대 식물 생산에 관한 일련의 연구에서는 개화에 관여하는 환경 요인으로 일장 효과의 중요성을 규명하였다. 이후의 연구에서는 식물반응에서 주간의 길이보다 야간의 길이가 실제로 조절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즉 일장의 길이와 온도는 위도와 연중기간으로 결정되는데, 계절과 위도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장의 길이는 적도의 경우 연중 거의 일정하지만, 극지방에서는 6월과 12월 사이에(여름과 겨울 극점) 24시간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한다. 위도 35̊〜45̊ 사이에 위치한 지역은 일반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기간이 130일 정도로 짧아 조숙성의 우점을 가지는 초면이 자라기에 적합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기후에는 초면이 자생하기에 충분하다. 풀로 알려진 백첩은 꽃이 작아 생산량이 적지만 희고 부드러우면서도 빛이 나므로, 이것으로 짠 백첩포는 최고로 여겼다. 문익점이 들여온 인도면은 열대성 작물로 나무처럼 크고 꽃이 커 생산량이 많은 것이다. 고려시대 몽골에서 초면의 씨와 백첩포를 요구했던 점 등을 볼 때,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서 초면이 재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부에서는 인도면 재배도 가능했다. 문익점이 개성에 심은 인도면이 모두 죽고 정천익이 진주에 심은 것 가운데 한 그루만 산 것도 바로 이런 풍토조건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초면을 재배해 실을 뽑고 이를 짜는 방직 기구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문익점이 들여온 인도면은 수년 만에 평민들이 입을 정도로 널리 재배·가공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한대에 서역 및 인도 등과 교역하면서 면직물을 알게 되었으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에 이르러서이다. 당대에도 풍토조건 때문에 목화재배는 일부 특정지역에 그쳤다가 남송 때에 와서야 남쪽에서 재배되던 인도면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원나라 초부터 면방직 기술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청나라 말에 육지면이 새로 들어오기 이전까지 고온 다습한 기후에서 재배되었던 인도면이 중면으로 토착화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목화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인도면으로 짠 것을 고패포 또는 길패포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최근까지 초면과 인도면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면이 우리나라에 자생하였던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삼국 이전부터 야생의 초면에서 면직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외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기술을 갖고 이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생태문화를 배경으로 이웃나라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고대 한민족이 생산한 면직물의 생산시기와 특성을 상세히 밝혀 그 고유성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면직물 생산시기가 고조선시대부터 였음도 밝히고자 한다.
 
 * 한국 풍토에서 생산된 백첩포와 고패포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고려 공민왕 12년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이 귀국할 때 목화씨를 가져왔고, 공민왕 14년 목화 재배에 성공하였다고 했다. 또한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이 호승 홍원으로부터 실을 뽑고 천을 짜는 기술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면직물은 고려 공민왕 15년 이후에 생산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에 교지(交趾)로 귀양 간 문익점이 유배생활에서 풀려 원의 수도인 북경으로 귀환하는 도중 밭에 핀 목면꽂을 보았다고 했다. 이후 문익점은 귀국하면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했으나 이를 재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거의 다 말라죽고 한 줄기만 살았다. 이는 재배 방법을 알지 못했다기보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면 종자가 중국에서 개체변이를 일으킨 인도면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기후조건에 다시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 한 줄기만이 자라면서 한반도 풍토에 적응력을 갖은 개체변이가 다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공민왕 14년 목화 재배에 성공한 후 호승 홍원에게 직조기술을 배워 여종에게 한 필의 면직물을 짜게 했고, 이러한 기술이 10년도 못되는 사이에 또 온 나라로 퍼지게 되었다. 이 같은 내용으로 부터 한반도에서 면종자를 재배하게 된 것은 元나라에서 들여온 목면 종자에 의해서라고 생각해왔다.
  
이 같은 급속한 발전의 요인에는 목면재배의 보급뿐만이 아니라 재배한 목면을 布로 만드는 우수한 생산기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민왕 14년 목화 재배에 성공한 후 호승 홍원이 천익에게 실을 뽑고 천을 짜는 방법을 가르치고 길쌈하는 도구까지 만들어주어 천익이 자기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무명 한 필을 짜게 했다고 하여 면직물 직조기술과 사용도구가 호승으로부터 배운 외래적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에 “그 취자거(取子車)와 소사거(繅絲車)는 다 천익이 창제했다”고 했다. 이 취자거는 목화씨를 빼는 기구이며 소사거는 실을 뽑는 기구이다. 그리고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우리나라 물레는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다.…… 회전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중국 물레와 비교하면 일을 갑절이나 할 수 있으니, 또한 묘하게 만들어졌다 하겠다”고 하여 위의『고려사』의 내용과 함께 정리하면 정천익이 호승 홍원에게 직조기술뿐만 아니라 생산도구인 취자거와 소사거 및 물레를 만든 것도 배웠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자료에 의하면 한민족은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물레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성호사설』의 내용은 이익이 고고학 발굴자료를 참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 고증하여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취자거와 소사거의 경우도 기존한 도구를 개량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元에서 들여온 중면의 보급과 면직물의 생산이 빠른 성장을 가져온 것은 한민족이 원래 갖고 있던 농업기술과 직물생산기술의 높은 수준의 바탕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문익점이 귀양을 갔던 교지는 지금의 베트남 북부 통킹·하노이를 포함한 손코이강 유역으로 당시 인도면이 널리 재배되었던 지역이다. 이때는 후위(서기 386년〜534년)의 고양 태수였던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책에서 가사협은 󰡔오록(吳錄)󰡕 「지리지」의 내용을 인용하여 교지의 목면나무에 대해 “교지현이나 정안현에는 길이 1길이나 되는 목면나무가 있다. 열매는 술잔만하고 벌어진 곳에 풀솜이 들어 있는데 마치 누에의 풀솜같다. 또 천을 짤 수 있어 ‘백설(白紲)’이라고 부르거나 일명 ‘모포’라고도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익점은 󰡔제민요술󰡕을 통해 이 지역 목화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문익점은 유배지에서 달성귀라는 사람과 교분을 갖고 운남지방의 풍물을 알게 되어 󰡔운남풍토집󰡕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따라서 문익점은 당시 운남지역 목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열대기후인 운남지역과 우리나라 기후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교지에서 인도면 종자를 가져오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나라 수도인 지금의 북경에 와서야 비로소 목화종자를 가져온 것은 이곳이 우리나라 북방지역과 같은 기후에 속했기 때문에 재배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편찬된 󰡔색경(穡經)󰡕과 󰡔해동농서(海東農書)󰡕 등에는 목면 재배에 관한 내용들이 상세히 기재되어있다. 이 책들은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면종자인 길패에 관한 재배방법과 알맞은 토양 등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에서 큰 차이가 없다. 󰡔해동농서󰡕 범례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풍토 위치를 위도로 표시했다. 또한 제주에서 갑산까지 거리가 3천리이므로 천리마다 영농시기가 10일정도 다름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백첩의 재배방법에 관해서는 기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에서 백첩을 생산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고려시대까지 줄곧 생산되었던 백첩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했다고도 생각된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상황과 달리 고대 한국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元나라에서 재배한 목면과 품종이 다른 북방지역에서 재배되던 면종자로 초면의 열매인 백첩으로 짠 우수한 품질의 면섬유인 백첩포를 생산했다. 󰡔한원(翰苑)󰡕의 「번이부」에서 인용한 고려기에서 고구려에서 백첩포를 생산했음을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경문왕 9년조에서는 서기 9세기에 신라에서 백첩포가 생산되어 중국에 예물로 보냈음이 확인된다. 또한 신라에서는 백첩포와 함께 면주포를 생산했다. 면주포는 초면의 면실과 사(絲)실을 섞어 짠 면과 사의 합사직물로 현대의 실크면과 같은 성격의 직물로서 신라의 특산물이었다.
 
이 같은 합사직물인 면주포의 생산과 함께 고구려와 신라, 고려의 백첩포 생산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문익점에 의해 중면이 보급되기 이전 까지 한국에서는 야생면인 초면이 줄곧 생산되었다. 그 예로 신라에서는 경문왕 9년에 왕자 김윤을 당에 사신으로 보낼 때 40승 백첩포 40필을 보냈다. 40승 백첩포는 최고급 사직물 보다 더 섬세한 것이라 하겠다. 고려태조 왕건이 백첩포를 중국에 공물로 보냈고, 뒤이어 즉위한 혜종이 즉위 2년에 백첩포를 진에 공물로 보냈다.
 
이후 고려에서 계속 면주포를 생산하여 몽골이 면주(緜紬)와 면자(緜子)를 예물로 요구했다. 이 󰡔고려사󰡕의 내용은 고려 고종 8년의 일로서 문익점에 의하여 중면이 들어온 공민왕 11년 보다 141년 앞선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 몽골이 요구한 면자는 초면의 목화송이였다고 생각된다. 중국은 元나라 초기에 와서야 중면이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기 1221년경에는 아직 목면이 생산되지 않았고 수입품에 의존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몽골이 면포가 아닌 면자를 요구한 것은 중면으로 짠 면포보다는 초면으로 짠 백첩포가 품질이 더 우수하기 때문에 이를 보급시켜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솜과 씨를 함께 얻을 수 있는 면자를 요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종 37년에 청주에서 백첩의 씨인 설면자(雪緜子)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을 면제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면이 생산되어 보급되기 이전 초면이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어 세금의 징수품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한민족의 면섬유 생산 시작 연대는 고구려에서 백첩포를 생산했기 때문에 삼국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생각되며, 잠정적으로 여러나라시대의 시작 연대인 서기전 1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러나라들은 고조선의 기술을 이어 받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면섬유 생산 시작 연대는 고조선시기로 소급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고조선에서 백첩포를 생산했을 가능성은 아래에서 보다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실제로 최근에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시대유적층에서 폭 2cm, 길이 약 12cm의 면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면직물은 같은 층위에서 서기 567년 백제 창왕시기에 만들어진 ‘창왕명 사리감’이 출토된 점으로부터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를 들여온 시기보다 약 800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 북방 풍토에서 생산된 초면과 백첩포 
   
고대 신강의 고창지역(지금의 투루번 분지)에서는 초면을 재배하여 백첩포를 생산하였다. 고창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을 󰡔일절경음의(一切經音義)󰡕의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는 첩포라 했고, 󰡔남사(南史)󰡕의 「이맥열전(夷貊列傳)」에서는 백첩자로 포를 짰다고 기재하고 있다.

또한 󰡔신당서󰡕의 「지리지」에서도 고창이 속한 西州에서 첩를 공물로 보냈다고 했다. 󰡔사기󰡕 「화식열전」의 탑포(榻布)에 대해 안사고는 탑포는 거칠고 두터운 포이며 백첩과는 다르다고 했고, 󰡔사기정의󰡕에서는 백첩은 목면으로 짠 것이며 중국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백첩포는 면직물임이 확인된다. 
   
그러면 이 첩포는 어떠한 면직물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이 백첩에 대하여 󰡔남사󰡕 「이맥열전」에, “고창국에 풀이 있는데, 열매가 누에고치 같고 고치 속의 실이 가는 실 같아 백첩자라고 불렀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가져다 포를 짜니 매우 부드럽고 희어 물물교환에 쓰였다”고 했다. 󰡔양서󰡕 「고창전」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고창에 풀과 나무가 많은데, 풀 열매가 누에고치 속의 실이 가는 베와 같아 백첩자라고 불렀다. 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그것을 가지고 천을 짰는데, 포는 매우 부드럽고 희어 물물교환에 사용되었다”고 했다.
 
이처럼 백첩포가 요역의 품목으로 사용된 사실이 고창시기의 계약문서에서 확인된다. 즉 아사탑나의 고창시기무덤에서 서기 551년에 첩을 빌리는 계약문서가 발굴되었다. 이 계약으로부터 6세기 중엽 고창지역은 보편적으로 면직물을 생산했음과 백첩이 당대 군수품으로 보내지는 주요한 공물의 하나였음을 알게 한다. 또한 고창지역은 6세기에 면직물 생산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생산 시작연대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아사탑나의 명칭에 유의해 보기로 한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에서는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고 기록하고있다. 아사달의 ‘아사(阿斯)’는 바로 ‘조(朝)’이고 ‘달’은 땅∙나라의 뜻으로 ‘아사달’은 ‘조선’으로 번역한다. 따라서 고조선 국가 당시 고조선어 명칭은 ‘아사달’(및 아사나)이었고, 한자 의역 명칭이 ‘조선’이었다. ‘달’에는 ‘산∙땅∙나라’의 듯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사달은 중국문헌에 나오는 ‘아사나(阿斯那)’ ‘아사나(阿史那)’ ‘아사양(阿史壤)’과 같은 뜻이다. 또한 ‘아사탑납(阿斯塔納)’은 ‘아사달나(아사달 나라)’의 한자표기이다. 고조선계통의 사람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아사나’ ‘아사양’‘ ’아사덕(阿斯德)‘ ’아사탑나‘의 성씨를 사용한 경우가 있었는데, 모두 ’아사나‘’아사달‘의 한자표기라고 본다. 이러한 내용으로 본다면 고창에 위치했던 아사탑나는 고조선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현재의 토루번에 위치한 晉대에 속하는 아사탑나무덤의 ‘묘주인 생활도’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묘주인 생활도’의 묘주는 다른 북방민족들과 달리 상투를 틀고 책을 썼는데 이와 유사한 책이 덕흥리고분벽화에 보인다. 또한 벽면에는 태양과 삼족오, 2개의 북두칠성이 보이고 있어, 고조선 문화와의 관련성을 지나칠 수 없다.
 
그러면 󰡔남사󰡕의 「고창국전」에서 서술한 풀열매가 목화송이를 가리키는 것인지 좀 더 확인해 보기로 한다. 󰡔일절경음의󰡕 「대반야경」 음의에서는, “백첩 ; 서국(西國)의  풀이름이다. 그 풀꽃의 솜은 포를 만들 수 있다” 고하여 그 꽃이 풀에서 피고 솜과 같다고 설명했다. 또한 같은 책 「대반야경」 <전여신경(轉女身經)> 음의에서는 “꽃은 버들개지 솜과 같고, 토속에 모두 비틀어 당기는 그들의 물레가 실을 만들고, 이를 짜서 포를 만드니, 이를 이름 하여 첩이라고 했다”고 하여 첩을 짜는 실을 뽑아내는 꽃이 버들개지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어 면화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으로부터 고구려와 신라 및 고려가 생산한 백첩포는 면섬유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백첩과 문익점이 원에서 들여온 목면 종자가 서로 다른 종류의 면종자임은 백첩이 신강지역으로 유입된 경로연구에서도 밝혀진다. 중국학자들은 고고학의 자료를 통해 초면이 서기 2세기경 아프리카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유입되었고, 이후 다시 중국 신강의 객십(喀什), 아사탑나, 합랍화탁(哈拉和卓), 화전(和田), 우전(于田) 등지로 확산되어 토로번 분지(옛 고창)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감숙성 하서주랑으로도 유입되어 섬서성 북부 일대에 까지 확산되었다고 했다. 연구자들은 이 초면의 품종이 1년생 비주면(非洲棉)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백첩이 유입된 지역이 신강과 감숙성지역에 국한되어 복건성의 민광과 광동성의 교지 등에서는 인도면 만이 생산되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면종자에 따라 지역성을 달리 한 것은 기후조건 때문이다. 초면의 특징은 면방울이 아주 작고 생산량도 적다. 면방울이 성숙했을 때 방울의 껍질이 열리는데 그 크기가 작아 채취하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성숙되는 기간은 중면 보다 짧다. 신강지역 기후의 특징은 일반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기간이 130일 정도로 짧아서 초면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신강지역과 감숙성 하서주랑 지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위도 35̊〜45̊ 사이에 위치하여 비슷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 조숙성의 백첩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59년 신강 민풍현에서 발견된 동한시대(서기 25〜서기 219년) 합장무덤에서는 대량의 직물과 함께 흰색과 남색의 꽂 문양이 있는 면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면직물은 철제 칼과 함께 양 뼈가 가득히 담겨있는 나무그릇을 덮은 상태로 출토되어 발굴자들은 ‘찬포(餐布)’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발굴자들은 매장된 남자가 입은 흰색의 바지와 여자의 손을 싼 직물도 면직물이라 했다. 이러한 발굴자료로부터 신강지역에서는 동한시대에 이미 면직물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예로 1964년 발굴된에서 토로번 아사탑나에 위치한 진묘에서도 면직물 옷이 출토되었다. 또 다른 무덤에서는 서기 551년에 쓰여진 계약문서를 발견하였는데, 빌린 물건에 관한 내용 가운데 60필의 첩포가 포함되어있다. 우전현 옥우래극유적의 북조무덤에서는 흰색과 남색의 꽃문양이 있는 면직물이 출토되었다. 서기 6세기에 해당하는 아사탑나 309호 고창시기의 무덤에서도 기하문양으로 직조한 합사직물이 흰색의 면직물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실크와 면을 합사한 것이었다.
   
이후 당대에 오면 신강지역의 면재배와 면직물 생산은 토루번 분지에서 뿐만이 아니라 객십지역에서도 발달했다. 1959년 신강지역 파초현에 위치한 9세기경에 해당하는 탈고자사래유적의 당 후기 지층에서 흰색과 푸른색 꽃문양이 짜여진 면직물과 약간의 綿籽가 발견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면자를 중국농업과학원면화연구소에 감정한 결과 초면, 즉 비주면(非洲棉, Gossypium herbaceum Linnaes)의 종자로 밝혔다.
   
초면의 품질에 대하여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는, “위문제가 ‘무릇 진귀한 물건이 나는 것은 모두 중국과 서역으로 다른 지방의 토산물은 이보다 못하다. 대군의 황포가 곱고, 낙랑의 연이 정교하고, 강동의 태말포가 희지만 모두 백첩의 깨끗함만 못하다 고 했다. 이 내용으로부터 백첩포의 우수성과 당시 중국인들의 백첩포에 대한 선호도를 짐작할 수 있다. 두보가 <대운사찬공방(大雲寺贊公房)>이라는 시에서 “광명백첩건(光明白疊巾)”이라 표현한 것에서도 백첩의 밝게 빛나는 우수한 품질을 짐작 할 수 있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재배면들이 갖는 공통점은 면섬유를 수확할 때 면섬유에 부착되어 있는 면실의 껍질 또는 나무잎 등의 불순물이 유지질과 탄닌질 기타 갈색색소 등을 함유하고 있어 표백제에도 상당히 강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백첩포가 곱고 깨끗하며 밝게 빛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같은 재배면의 성격과 달리 불순물을 내포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남방과 달리 고창 등 북방지역에서는 기후조건 때문에 기존의 초면을 인도면으로 교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신강지역에서 아직도 초면을 재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고, 중국에서 생산되는 면섬유 가운데 신강에서 생산되는 면은 섬유가 길고 품질이 우량하여 고가로 거래되는 것은 품질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 중국 풍토에서 생산된 인도면과 고패포
   
지금 현재 중국에서 재배되는 면종류는 육지면(陸地棉, Gossypium hirsutum  L.)과 해도면(海度棉, Gossypium barbadense L.)으로 모두 청나라 말기에 들어온 것이다. 이보다 앞서 들어온 면화는 아주면(亞洲棉, Gossypium arboreum Linnaes)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중국에서 언제부터 아주면을 기르고 반포(斑布)를 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후한서󰡕 「서남이전」에서 지금의 운남성에서 나는 길패를 오동목화 또는 동화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동한시대 중국 남부에서 이미 인도면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 확인될 뿐이다.  
  
아주면은 인도의 아살모지역 일대가 발원지였다. 이 아주면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거쳐 운남성 서부지역인 등충, 보산, 수평지역에 들어왔다. 이후 동남쪽 연신을 향해 계와 월을 지나, 광동성과 복건성에 이르렀다. 운남성에서 들어오는 경로와 달리 한대 초기 중국에서 인도로 통하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사천에서 전서를 지나 면전의 북단을 거쳐 인도의 아살모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인도면은 이러한 사람들의 이동로를 따라 중국에 들어왔다고 생각된다. 가장 먼저 도달한 지역은 운남성 면전 변경의 애우현이다. 중국은 동한 명제 영평 12년에 동화포가 생산되는 영창지역에 애뢰현을 설치했다. 애뢰현은 지금의 운남성 보산현과 영평현 지역이다. 이처럼 인도 목화는 위도가 높고 기온이 낮은 지역에 정착하게 되면서 차츰 관목에서 키가 작은 저왜작물인 일년생 식물로 변화되어갔다. 면종자의 이동과 정착에는 토양과 기후, 교통 등이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운남성 영창군은 지금의 보산현 위치하고 있어 사천지역 등의 상인이 인도로 갈 때 반드시 거쳐가는 교통로였다. 그러므로 중국은 고대에 면직물의 생산지인 영창지역과 서기 2세기경부터 한에 내속한 주강과 민강유역 그리고 서역을 거쳐 인도면을 수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당대에 이르러 백첩포와 인도면인 목면을 공납 받으면서 면직물이 널리 알려졌다. 또한 상나라와 주나라 모두 고조선과 교류했던 사실이 문헌자료와 고고학의 출토자료로부터 밝혀지고 있으므로, 고대 한민족이 면직물을 생산했던 시기가 고조선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고대 한민족의 지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실제로 고조선에 속해 있던 숙신은 제순(帝舜) 25년(서기전 2209년)에 이미 중국과 접촉하였고, 상나라와 주나라 모두 고조선과 교류했던 사실이 문헌자료와 고고학의 출토자료로 부터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서주 무왕이 상을 멸망시키자 숙신이 호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을 보내 왔고, 무왕은 그의 딸이 결혼할 때 그 화살에 ‘숙신이 보낸 화살’이라고 글을 새겨 사위인 진후에게 배반하지 말라는 뜻으로 주었던 것이 좋은 예이다. 
  
또한 실제 고고학 출토자료의 예로는 복건성 무이산의 무덤유적에서 매장된 남성의 시신과 함께 중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면직물 옷이 출토된 것이다.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결과 지금부터 약 3300년에서 3600년 정도 된 것이었다. 이 연대가 정확하다면 중국에 면직물이 유입된 것은 상(商)대 후기가 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상나라가 당시 면직물을 생산했던 이웃나라들과 교류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가죽과 모직물의 품질이 매우 우수하여 중국과의 교역품이었던 사실도 이를 뒷받침 한다.
  
중국의 경우 위의 󰡔일절경음의(一切經音義)󰡕의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서 첩은 계빈 이북에서만 생산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에서는 첩포를 생산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대에 와서도 첩포를 생산하지 못했고 당시 중국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서부 변경지역인 고창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첩포가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에서 첩포를 중국에 예물로 보냈던 것이다.
   
한대의 면생산과 달리 당대에 이르면 백첩포와 중면으로 만들어진 면직물이 모두 널리 유행했다. 백첩을 생산하였던 토로번의 아사탑나 230호 무덤에서는 중서문하에서 여러 주에 보낸 문서가 출토되었다. 이 문서 내용에 당대 고창뿐만 아니라 길패가 생산되던 교주 등의 토산물을 공납 받은 것으로 보아 당대에 인도면으로 만든 면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남송에 와서는 남방에서 길패의 재배를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북송시기에 오면 민광의 면재배가 무척 번성했다. 섬서성에서 하남성 등지로 퍼지기 시작한 면재배는 원대에 오면 남방 각지에 면을 재배하는 관리가 사서에 처음으로 보일 정도로 면방직 기술이 보편화되었다. 이처럼 확산되어간 인도면의 재배는 현재 중국 면방직 산업의 3대 중심지역을 양자강 삼각주 면방직지구 화북평원 및 황하 중하류 면방직지구와 무한 중심의 강한평원 및 부근지구로 형성시켰다.
  
인도면이 중국과 한국에 전파되어 기후변화에 따라 개체발생을 해 정착한 것이 최근까지 재배되었던 목면 품종이다. 개체 변이는 환경에 의해 종류가 같은 생물에서 각 개체 사이에 나타나는 형질의 차이를 말한다. 인도면이 중국에 들어와 토양이나 기후 등의 영향에 의해 변형된 중국종 인도면이 나타나고, 그 인도면이 다시 한국의 생태에 맞게 형질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 한국종 인도면이다. 이처럼, 같은 품종의 목면이라도 생태학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품종변이를 일으키게 되어 서로 다른 면직물 문화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계와 섬유 종류 및 품질 등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생태계의 차이로부터 우리나라 면직물이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이웃나라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밝혀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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