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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신(자는 文京, 호는 陌波)은 1883년 10월27일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3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10대 선조는 호조판서를 지냈고 19대조는 문충공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제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혜가 총명했으며 기골이 장대했다.
그래서 당시 湖南七將之一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천성이 강직했고 의에는 항상 앞장을 선 위인이었다.
이른바 한일합방으로 국운이 다하자 고제신은 망국의 통한을 품고 구국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국의 장래만을 생각하며 가사와 신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그의 자손들은 말했다.
고제신이 독립운동에 착수한 것은 국치 3년째인 1912년 뜻을 같이 한 한우석, 유장열, 남광원 등 동지와 규합한 때부터였다.
이들은 의병을 모아 전남‧북 지방을 일원으로 일병과 맞서 싸웠다.
죽창으로 항쟁을 시작한 이들은 일경주재소 등을 닥치는 대로 쳐부수고 불을 놓아 그들에게 많은 살상의 피해를 입혔다.
일경으로부터 노획한 권총과 칼로 의병대의 장비를 보강하면서 항쟁은 더욱 치열했고 싸운 횟수도 많아졌다.
77년 말 건국포장을 추서 받은 고제신은 의병활동과 상해임정에 군자금을 염출해오다가 12년의 옥고를 치른 의혈쾌남아로 알려졌다.
동지들과 광복군을 조직, 왜적을 살해하고 반민족적인 요인을 암살했다. 10여 차례에 걸쳐 군자금 수만 원을 모아 임정에 조달하기도 했다.
부안군번영회가 발행한 “부안대관”과 부안군교육청이 발간한 “변산의 향기”는 고문경의 약력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고씨 명문의 태생으로 기질이 강직하고 신체가 장대해 장사로서 불의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일병이 이 고을에 들어와 향사를 괴롭히는 정상을 참을 길이 없어 분연히 동지를 모아 일군에 항거했다.
고창, 부안, 김제, 태인, 정읍, 고부 등지에서 일군과 싸운 횟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일군의 살상은 많은 수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제신은 광복단을 조직 친일단를 암살했다.
고제신의 독립투쟁은 상해임정과 광복군의 군자금 조달에서 빛나는 투혼을 보였다.
동지 한우석, 유장열과 암살단을 조직한 그는 곧바로 군자금 조달에 착수했다.
그때가 대정 5년 5월께였다.
고제신은 동지들과 함께 전남 보성군 벌교면 벌교리의 부호 서도현의 당질 서인선을 납치, 인질로 삼아 군자금 1만4천원이란 거액을 뜯어냈다.
그는 그 뒤 이 사건과는 다른 죄목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이 벌교사건의 용의자로 4년 징역을 추가 당했다.
1922년 11월 12일자의 동아일보는 벌교부대를 ‘멸살하야’란 제하의 기사로 이 사건을 상보했다.
상보한 내용을 살펴보면 “서도현이가 대정 5월 29일 일밤 엇더한 강도에게 총살을 당한 후...... 이듬해 1월 1일반에 서도현의 당질 서인선이가 엇더한 자의 손에 잡혀가서 75일 동안 감금을 당한 곳에 결국 돈일만원을 가저다 주고 간신히 노히여온 후로 계속하야 협박을 번번히 당하는 일은 일시 세간의 이목을 놀리이며... 재작년 여름 알삼단을 조직하야 활동하는 중 8월에 경성을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일행을 환영하려 팀장하는 총독이하 대관을 암살하려다가 미리 발각 배포되야 작년 11월 15일에 경성디방법원의 이동재 판량의 손에 팔년 징역의 처분을 밧고 경성감옥에 복역 중인 암살단의 거두 한우석과 모사건으로 십년징역의 선고를 밧고 전주감옥에서 복역 중인 유장열과 고제신등 세사람인데... 이렇게 보도한 동아일보는 고등이 대정 6년 1월1일 밤 서인선을 불러내 정읍군 칠보면 소적리 김태술의 집에 감금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서로 하여금 그의 친척 김영보에게 “군산 남일여관으로 돈 10만원을 가지고 와사 나를 구하라”는 편지를 쓰도록 했다.
서의 친척으로부터 회신이 없자 이들은 만날 장소를 경성 남대문통과 평양 연광향 등으로 몇 번이나 옮겼다.
그러다가 한우석이 대전에서 서의 친척인 서정인, 서정우를 우연히 만나 서로 알게 돼 이들을 이리역으로 데려왔다.
한의 전보 연락을 받은 고제신 등은 황등역 부근의 산속에서 이들로부터 1만원을 인수한 뒤 서인선을 돌려줬다.
또, 4만원을 뒤에 받기로 2만원짜리 계약서 두 장도 받아냈다.
고등은 대정 8년 10월~11월게 수차의 위협 끝에 서정인의 손을 통해 4천원을 더 받아냈다.
이 벌교 사건으로 고제신은 징역 4년을 추가 받은 것이다.
고문경이 벌교사건의 진범으로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기 이전 8년 징역을 받은 것은 대정 9년 4월부터 12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친 군자금 조달이란 사실 때문이다.
대정 13년에 실시된 고제신에 대한 공판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본적 불명 주거 전주형무소재감, 고제신 당시 42세 주문 피고인 고제신 동 임성태에 각 8년의 징역에 처함”.
이 공판기록에 따르면 “고제신은 대정 9년 4월 16일 김제군 만경면 송상리 박병유 집에 들어가 박과 박 좌상에게 상해 가정부원으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왔다고 출금을 백하여 응하지 않으니 갖고 있던 권총으로 살해하겠다고 협박, 병유으로부터 1백96원 ‧ 좌상으로부터 40원을 각각 강취함”이라고 돼있다.
이 같은 방법으로 고제신은 완주군 상연면 대성리 강경호로부터 4백원 ‧ 부안군 산내면 박종한으로부터 58원 ‧ 박좌상으로부터 다시 4백원의 군자금을 모았다
그는 이어, 송주상으로부터 24원과 회중시계를 ‧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 송주확으로부터 거금 1천 2백원 ‧ 정읍군 고부면 백대리 김기원으로부터 20원, 다시 송주확으로부터 1백원을 모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많은 군자금을 조달, 임정에 부친 고문경은 12년의 옥고를 마치고 1933년 12월 만기 출옥했다.
그는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건강을 크게 해쳐 1942년 9월 5일 광복의 기쁨도 맛보지 못한 채 지고 말았으니 향년 59세였다.
한편,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전북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