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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200) - 가왕 조용필과 타악의 신 김대환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8/04 [17:59]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흑우(黑雨) 김대환(金大煥, 1933~2004)은 가왕 조용필을 가장 먼저 헤아린 인물이다. 그는 1933년 충남 태안에서 출생하여 외가인 인천으로 이주하여 자랐다, 그는 이 시기에 11살 아래의 이종사촌 동생인 강태환의 어린 시절 음악적 멘토가 되어 그가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프리재즈 아티스트가 되었다, 이러한 강태환이 추구한 음악적 일깨움에 김대환의 음악 세계가 또 다른 변화의 과정을 가져온 사실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사례라 할 것이다.
 
김대환은 1950년 경찰학교에 입학하여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1951년 북파 공작부대인 8240 켈로(KLO)부대에 차출되었던 특이한 경력의 군 복무 중에 공군 군악대로 다시 차출되었다.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먼저 우리나라 공군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공군은 육군과 해군의 역사와 달리 1948년 5월 15일 미국 군정 시절에 군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던 통위부의 직할부대로 경기도 수색에 창설된 항공부대가 우리나라 공군의 실제적인 첫 역사이다.

 

이후 미국 군정 통위부가 정부 수립 이후 국방부로 바뀌면서 항공부대는 육군 항공군 사령부가 되었다. 이에 독립된 공군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1949년 10월 1일 대통령의 ‘공군본부 직제령’에 의하여 육군 항공 사령부를 육군에서 분리하여 국방부 별관에 공군본부가 설치되었다. 당시 공군은 장교와 사병을 포함한 2,000여 명이 채 되지 않은 병력과 20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열악한 규모로 전투기가 하나도 없는 공군이었던 사실도 역사가 남긴 이야기다.

 

▲ (좌) 김대환 (중) 조용필 (우) 강태환 출처: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상황에서 6, 25 한국전쟁이 일어나 미국의 참전으로 미 공군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공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에 1951년 6월 대구 공군 제106 기지에서 44명의 대원으로 공군 군악대가 창설되었다, 당시 육군과 해군을 망라한 모든 군에서 특기병들을 차출해오면서 1952년 김대환이 북파 공작부대에서 공군 군악대로 오게 되었다. 이때 ‘후라이보이’라는 예명으로 희극인의 삶을 남긴 ‘곽규석’(1928~1999)이 공군 군악대에 입대하여 ‘후라이보이 악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곽규석과 김대환은 공군 군악대의 선구적인 발전에 바탕을 놓은 인물이다.

 

이후 공군에서 전역한 김대환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대부로 평가받는 아티스트 신중현과 미군 부대에서 ‘에드훠’Add 4) 그룹 드럼 리스트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1970년 말 무렵 소공동 국제호텔 레인보우클럽에서 노래하던 조용필을 지켜보다가 그룹 활동을 제안하였다, 이렇게 결성된 그룹이 ‘김 트리오’이다. 

 

오늘날 국민가수이며 가왕으로 평가받는 조용필의 초기 음악 생활은 어려웠던 시대 상황을 대변하듯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먼저 조용필 가수가 공식적으로 음악에 입문한 시기는 1968년이다. 여기서 가수 자신이 고교 시절 가출하여 그룹 ‘앳킨스’(Atkins)를 결성하였다고 밝힌 기록을 중시하면서 많은 자료에서 가수의 록밴드 ‘앳킨스’(Atkins)의 결성과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앳킨스’(Atkins)의 결성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혼란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록(Rock)이란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 흑인의 리듬앤드블루스와 컨트리 음악이 함께 녹아내려 강렬한 비트를 바탕으로 열광적인 몸짓으로 나타난 ‘로큰롤’(rock'n'roll)에서 시작된 음악이다, 그중 일렉트릭기타를 중심으로 베이스와 드럼 그리고 보컬로 이루어진 밴드를 록그룹으로 정의한다. ‘비틀스’(Beatles)라는 일세를 풍미한 그룹의 등장과 함께 대표적으로 통기타로 노래하던 밥 딜런(Bob Dylan)이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일렉트릭기타를 들고 등장한 시점이다. 당시 ‘알 쿠퍼’(Al Kooper)가 전자 건반악기인 ‘해먼드 오르간’(Hammond organ)으로 지원하며 혁신적인 사운드를 선보였던 시기를 역사적인 록(Rock) 음악의 전환점으로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애니멀스’(Animals) 그리고 ‘더 후’(The Who)와 같은 록 그룹이 자신들의 개성 있는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한 사실과 맞닿은 이야기다.

 

또한, ‘컨트리 앤드 웨스턴’(Country & Western)이란 미국 서부의 전통적인 카우보이 송이나 중부 산악지대의 민요에 이르는 노래와 연주를 포함한 컨트리뮤직을 함께 아우른 명칭이다. 여기서 당시 가수 조용필이 결성한 ‘앳킨스’(Atkins)라는 그룹 이름에 대한 설명이 그동안 정리되지 않았던 사실을 중시하여 이를 살펴본다. 필자는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미스터 기타’로 통하는 기타리스트 ‘챗 앳킨스’(Chet Atkins. 1924~2001)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정리한다. ‘챗 앳킨스’는 컨트리뮤직의 발상지인 미국 테네시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컨트리 뮤직의 다양한 요소가 녹아내린 ‘웨스턴 스윙’(western swing)에서 미국 식민지 시대가 낳은 다양한 이국인들의 음악적 양식이 혼합되어 즉흥적인 리듬이 중시된 ‘홍키통크’(honky-tonk)음악이 점령하던 시대를 ‘내슈빌 사운드’(Nashville sound)라는 새로운 음악으로 전환한 주역이다, 
 
이와 같은 ‘챗 앳킨스’의 ‘내슈빌 사운드’가 탄생한 바탕에는 켄터키주 출신으로 광부의 애환을 선율에 담아낸 기타리스트 ‘메를 트래비스’(Merle Travis, 1917~1983)의 ‘트래비스 피킹’(Travis picking) 주법이 존재한다. 이는 엄지손가락으로 베이스음을 튕기면서 멜로디를 전개해 가는 ‘메를 트래비스’가 구사한 핑거스타일이다, 이는 음악적으로 민속 음악의 특징에서 나타나는 선율의 높이가 같은 음의 강약에서 그 위치가 바뀌는 당김음으로 표기되는 ‘싱커페이션’(syncopation)에서 유래된 재즈 피아노 연주기법인 ‘래그타임’(ragtime)에서 얻어진 주법이다,

 

▲ (좌) 조용필 (중) ‘챗 앳킨스’(Chet Atkins. 1924~2001) (우)‘메를 트래비스’(Merle Travis, 1917~1983)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역사를 가진 ‘챗 앳킨스’에서 유래된 그룹 ‘앳킨스’(Atkins)는 엄밀하게 컨트리 웨스턴 그룹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조용필은‘ 첵돌스’ 와 ‘화이브 핑거스’ 그룹을 거쳐 1970년 후반 김대환이 결성한 ‘김트리오’ 멤버가 되었다. 흑인의 블르스적 감성의 펑키 음악을 우리의 것으로 삼켜버린 기타의 신 최이철과 함께 활동하였던 ‘김 트리오’는 기타리스트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희가 베이스로 합류하여 4인조 그룹으로 활동하다가 최이철이 하차하였다. 

 

이 무렵 조용필은 같은 업소에서 활동하던 1968년 결성된 재즈밴드 강태환 악단을 만나게 된다. 천재 아티스트 강태환을 만나면서 재즈라는 음악의 깊은 울림을 접하면서 음악을 듣고 악보로 옮겨 적는 ‘채보’(transcription)와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리듬과 멜로디와 하모니를 기보하는 전문적인 청음(music dictation)을 익히게 된다. 이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부르면서 공식적인 방송 활동의 첫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후 1971년 5월 30일 선데이 서울이 주최 제1회 보컬 그룹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가수왕 상을 받았다, 그해 6월 TBC-TV의 쇼 프로에 출연하여 자작곡 ‘옛일’을 불렀던 것이 가수의 TV 방송 첫 출연 기록이다. 이어 7월에 보컬 그룹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가수왕 상을 받은 계기로 오스카레코드사에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앨범이 제작 발매되었다, 앨범 B면에 조용필이 부른 '사랑의 자장가' '님이여' '캐사라' '하얀 모래의 꿈'과 같은 4곡이 실렸다.        

 

다음 해 1972년 2월 아세아레코드사에서 조용필 스테레오 히트 앨범 제1집이라는 음반이 제작되면서 2대의 통기타로 연주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실렸다. 연이어 다음 달 3월 아세아 레코드사에서 (드럼, 드럼, 드럼, 앰프기타 고, 고, 고, 고)라는 김 트리오 그룹의 연주 앨범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앨범이 발매된 3개월 후인 6월 멤버 간의 음악적 견해가 엇갈리면서 김 트리오 그룹이 해체되었다, 이후 1973년 그룹 '25시'에 멤버가 되어 활동 중 군 복무 소집 영장을 받고 방위병 복무 중 그룹 '25시'가 1973년 해체되었다, 이에 1974년 군 복무 중에 7인조 록 밴드 '조용필과 그림자'를 결성하였다, 
 
가수 조용필은 훗날 이렇게 말하였다, 김대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음악 세계는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김 트리오’ 시절은 나의 실력을 높게 연마한 그룹이었다. 또한, 강태환의 만남은 내 음악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이다.   

 

당시 집념의 드럼 리스트 김대환을 리더로 기타의 신 최이철과 베이스 기타를 함께 메고 번갈아 가며 연주하며 노래하였던 조용필은 연습이 무엇인지를 일깨웠으며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렇듯 김대환의 집념으로 가득한 오직 연습으로 일관한 음악 세계와 특히 김대환의 이종사촌인 강태환의 프리재즈 음악이 가지는 여백으로 울려 퍼진 자유로운 음악의 일깨움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오늘날 가왕 조용필이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숨결일 것이다. 다음 칼럼은 (201) ‘전설의 음악가 김대환 이야기’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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