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포부르 생 앙투안’(Faubourg Saint-Antoine)에서 벽지공장을 운영하던 ‘장 밥티스트 레베용’(Jean-Baptiste Reveillon. 1725~1811)은 1776년 튈르리 궁전(Tuileries Palace)이 있는 센강 오른편 길에 고급 벽지가게를 열었다. 레베용은 당시 영국에서 고급 벽지를 수입하여 팔고 있었다. 어느 날 상점에 놀라운 손님이 찾아왔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가 상점에 온 것이다. 동행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폴리냑 공작부인’으로 알려진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Yolande Martine Gabrielle. 1749~1793)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는 아버지 ‘프란츠 1세 신성로마 황제’(Francis I, Holy Roman Emperor. 1708~1765)와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 1717~1780)의 막내딸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이름은 결혼 후 프랑스 이름이다. 이러한 왕비와 천재 음악가 (W.A. Mozart. 1756~1791)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모차르트’가 여섯 살이던 1762년 빈 궁전에 연주를 왔었다. 이때 장난을 치다 넘어진 ‘모차르트’를 일곱 살이던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가 얼른 일으켜 세웠다. 기록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연주에 감탄한 ‘마리아 테레사’ 왕비가 소원을 묻자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1770년 14살 나이에 프랑스 루이 16세 왕과 결혼하였다. 정략결혼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헤아리려면 살펴야 할 내용이 많다. (여기서 정리하는 시대적인 역사성은 필자가 쓰려 하는 내용에 맞게 간추린 내용이다)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하여 동로마 제국(비잔틴제국)이 멸망한 시기는 역사적으로 중세 시대의 마감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후 르네상스라는 인류 문화의 부흥 시대가 열리던 1477년 유럽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독립된 왕국(kingdom)을 세우려던 공작령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의 용감한 샤를 공작(Charles the Bold. 1433~1477)이 1477년 1월 낭시전투(Battle of Nancy)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파리에서 350여 km 떨어진 부르고뉴에서부터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거대한 공국의 유일한 상속자가 당시 20살 나이의 ‘마리 공주’(Mary of Burgundy. 1457~1482)였다.
![]() ▲ (좌로부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부르고뉴 ‘마리 공주’(Mary of Burgundy) / 펠리페 1세(Philip I of Castile)/ ‘후아나 1세 공주’(Joanna of Castile)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와 같은 거대한 공국을 상속받은 ‘마리 공주’를 두고 당시 프랑스 루이 11세 왕(Louis XI of France. 1423~1483)은 6살인 아들 샤를 8세(Charles VIII of France. 1470~1498)와 13살이 더 많은 ‘마리 공주’의 결혼식을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러한 ‘마리 공주’(Mary of Burgundy. 1457~1482)는 1477년 8월 신성로마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Haus)의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Holy Roman Emperor. 1459~1519)와 결혼하였다, 이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더욱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이와 같은 부르고뉴의 ‘마리’(Mary of Burgundy. 1457~1482) 공주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부인이 된 지 5년 만에 사냥길에서 낙마하여 1482년 3월 27일 25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들 펠리페 1세(Philip I of Castile. 1478~1506)가 4살이었으며 딸 마거릿 공주(Margaret. 1480~1530)는 두 살이었다.
이에 4살 아들 펠리페 1세는 어머니의 공국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게 된다, 이어 1496년 18살 되던 해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의 나라 카스티야 왕국(Kingdom of Castile)의 후아나 1세 공주(Joanna of Castile. 1479~1555)와 결혼하였다. 후아나 1세 공주는 아라곤의 왕이며 카스티야의 왕이었던 페르난도 2세(Ferdinand II of Aragon. 1452~1516)와 아라곤 왕비이며 카스티야의 여왕이었던 이사벨라 1세(Isabella I. 1451~1504)의 딸이다, 이사벨라 1세 여왕은 항해가 콜럼버스 후원자이었다. 여왕은 1469년 10월 아라곤의 왕이며 카스티야의 왕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면서 공동 국왕 지배체제의 왕국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공동 국왕체제에서 많은 업적이 이루어졌고 특히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 오늘날 스페인을 뜻하는 에스파냐(España)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 속에서 부르고뉴 공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카스티야를 통치하였던 펠리페 1세와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후아나 1세 여왕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이가 바로 카를 5세(Karl V. (HRR), 1500~1558)이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며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왕이었으며 부르고뉴 공작과 네덜란드의 왕이었다. 그는 포르투갈의 ‘동 마누엘 1세 왕’(Dom Manuel I. 1469~1521)과 둘째 부인 아라곤의 마리아(Maria of Aragon, Queen of Portugal. 1482~1517)사이에 태어난 포르투갈의 ‘이사벨라’(Isabella von Portugal. 1503~1539)공주와 1526년 3월 결혼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카를 5세(Karl V. (HRR), 1500~1558)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Holy Roman Emperor. 1503~1564)는 오스만제국과의 격렬한 전쟁을 불사하며 헝가리영토 일부를 차지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확장하여 훗날 세계사를 관통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의 바탕을 마련한 인물이다. 이후 형 카를 5세 신성로마 황제가 1558년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었다. 이후 형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에게 후계를 물려주었다.
이와 같은 카를 5세(Karl V. (HRR), 1500~1558) 황제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Isabella of Portugal. 1503~1539)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 에스파냐(스페인)의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이다, 그는 스페인 왕과 포르투갈 왕 그리고 영국과 아일랜드 왕으로 에스파냐(스페인)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역사만큼 추락의 역사도 함께 썼다.
이와 같은 에스파냐(스페인)의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는 4번의 결혼을 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만큼 매우 복잡하다. 이에 칼럼의 이해를 위하여 간략하게 정리한다, 펠리페 2세는 1543년 포르투갈의 공주 마리아 미뉴엘라(Maria Manuela, Princess of Portugal)와 첫 결혼을 하였다. 이와 같은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미뉴엘라는 포르투갈 주앙 3세 왕(John III of Portugal. 1502~1557)과 오스트리아의 캐서린(Catherine of Austria, Queen of Portugal. 1507~1578)의 딸이다. (이는 펠리페 2세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Isabella von Portugal. 1503~1539)와 첫째 부인 마리아 미뉴엘라의 아버지 포르투갈 주앙 3세 왕(John III of Portugal. 1502~1557)이 남매간으로 외사촌 관계이다. 이러한 외사촌 관계의 부인 마리아 미뉴엘라는 이들 카를로스(Carlos, Prince of Asturias. 1545~1568)를 출산한 지 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펠리페 2세의 두 번째 부인은 1554년 결혼한 영국의 메리 1세 여왕(Mary I of England. 1516~1558)이다. (메리 1세 여왕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은 펠리페 2세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Isabella of Portugal. 1503~1539)와 자매간으로 이종사촌이다.) 이와 같은 메리 1세 영국 여왕은 가톨릭 부흥에 주력하여 가혹한 신교탄압으로 ‘피의 메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와 같은 결혼으로 펠리페 2세는 부인 메리 1세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공동 국왕이 되어 잉글랜드의 주요한 국가기록에 문서가 라틴어와 스페인어로 작성되었던 이야기 또한 역사가 남긴 이야기다. 이와 같은 메리 1세 여왕이 1558년 세상을 떠나면서 펠리페 2세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통치도 막을 내렸다.
이와 같은 영국의 메리 1세 여왕은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한 남편 에스파냐(스페인)의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와 가톨릭 부흥에 진력하며 가혹한 신교도 탄압이 있었다. 이후 많은 사연을 가진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 영국 여왕에 즉위하면서 강력한 개신교 포용정책을 펴면서 어제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이었던 에스파냐(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에스파냐 해군이 역사적인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에스파냐(스페인)라는 태양이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후 펠리페 2세는 프랑스 헨리 2세 왕(Henry II of France. 1519~1559)과 이탈리아 메디치가 출신의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의 장녀인 발루아의 이사벨(Elisabeth of Valois. 1545~1568)과 1559년 세 번째 결혼하였다. 여기서 짚고 가는 내용은 이와 같은 발루아의 이사벨은 원래 펠리페 2세의 첫째 부인이었던 포르투갈의 공주 마리아 미뉴엘라(Maria Manuela, Princess of Portugal)사이에서 낳은 아들 합스부르크의 카를로스 왕자(Carlos, Prince of Asturias. 1545~1568)와 약혼 관계에 있었지만, 국가적 이해득실에 따라 그의 아버지 펠리페 2세와 결혼한 사실이다.
26년의 나이차를 가진 ‘발루아의 이사벨’ 나이 당시 14살 이었다. 이러한 펠리페 2세의 세 번째 부인 발루아의 이사벨은 1568년 10월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어머니인 메디치가 출신의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가 사위인 펠리페 2세에게 죽은 ‘발루아의 이사벨’의 여동생인 발루아의 마거릿 공주(Margaret of Valois. 1553~1615)와의 결혼을 다시 권유하였다. 펠리페 2세가 이를 수락하지 않아 무산된 일이지만 권력의 블랙홀에 빠져버린 왕실 도덕성의 부재가 극명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약혼자를 아버지에게 앗긴 첫째 부인이 낳은 카를로스 왕자는 1562년 궁전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다가 1568년 7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두 달여 후인 1568년 10월 3일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난 ‘발루아의 이사벨’ 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작품으로 상상의 이야기를 펼쳤다.
이와 같은 에스파냐(스페인)의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의 4번째인 마지막 결혼은 오스트리아의 ‘안나 공주’(Anna of Austria, Queen of Spain. 1549~1580)와 1570년 이루어졌다. 이러한 안나 공주는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Maria of Austria, Holy Roman Empress. 1528~1603)의 딸이다. 즉 외삼촌과 조카의 사이다. 이러한 ‘안나 공주’는 앞에서 언급한 펠리페 2세의 아들 합스부르크의 카를로스 왕자(Carlos, Prince of Asturias. 1545~1568)의 약혼자였던 발루아의 이사벨(Elisabeth of Valois. 1545~1568)이 외삼촌 펠리페 2세와 결혼하면서 외사촌 사이인 카를로스 왕자와의 결혼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던 관계였다, 그러나 카를로스 왕자가 1568년 세상을 떠나면서 외삼촌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외삼촌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와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안나 공주’(Anna of Austria, Queen of Spain. 1549~1580)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에스파냐(스페인)의 펠리페 3세(Philip III of Spain. 1578~1621)이다.
이러한 펠리페 3세(Philip III of Spain. 1578~1621)는 아버지 펠리페 2세의 모든 왕권을 이어받았다, 이어 그는 1599년 4월 합스부르크의 마거릿 공주(Margaret of Austria, Queen of Spain. 1584~1611)와 결혼하였다. 합스부르크의 마거릿 공주는 합스부르크 대공 카를 2세(Charles II, Archduke of Austria. 1540~1590)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Maria Anna of Bavaria. 1551~1608)의 딸이다.
![]() ▲ (좌로부터) 카를 5세(Karl V. (HRR)/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펠리페 3세(Philip III of Spain)/ 마거릿 공주(Margaret of Austria, Queen of Spain)/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여기서 잠시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합스부르크의 마거릿 공주의 남편 펠리페 3세의 아버지는 펠리페 2세이고 펠리페 2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이다. 다음은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 의 셋째 아들이 합스부르크 대공 카를 2세로 그러니까 합스부르크의 마거릿 공주의 아버지 카를 2세는 시아버지 펠리페 2세와 사촌 간이다. 이에 남편 펠리페 3세(Philip III of Spain. 1578~1621)와 부인이 된 합스부르크의 마거릿 공주(Margaret of Austria, Queen of Spain. 1584~1611)는 6촌 형제이다.
이와 같은 연속적인 근친 관계로 이어진 펠리페 3세(Philip III of Spain. 1578~1621)와 합스부르크의 마거릿 공주(Margaret of Austria, Queen of Spain. 1584~1611)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에스파나(스페인)의 펠리페 4세 왕(Philip IV of Spain. 1605~1665)은 아버지의 후계를 이어 1612년 7살 나이에 10살 나이인 프랑스의 이사벨(Elisabeth of France. 1602~1644)과 결혼하였다. 이들은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유일한 아들인 발타자르 카를로스 왕자(Balthasar Charles. 1629~1646)가 17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사벨이 1644년 죽음을 맞은 후 펠리페 4세 왕은 1646년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Mariana of Austria. 1634~1696)와 재혼하였다.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는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Holy Roman Emperor. 1608~1657)와 에스파냐(스페인)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of Spain. 1606~1646)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이는 남편의 아버지 펠리페 3세와 어머니 에스파냐(스페인)의 마리아 안나가 남매간으로 외종사촌 간의 결혼이었다. 이와 같은 에스파나(스페인)의 펠리페 4세 왕(Philip IV of Spain. 1605~1665)과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Mariana of Austria. 1634~1696)의 외종사촌 관계의 재혼에서 태어난 아들인 에스파나(스페인)의 카를 2세(Charles II of Spain. 1661~1700)가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스페인 통치를 하게 된 왕이었다.
여기서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Holy Roman Emperor. 1608~1657)와 에스파냐(스페인)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of Spain. 1606~1646)사이에서 태어난 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Maria
na of Austria. 1634~1696)가 펠리페 4세 왕(Philip IV of Spain. 1605~1665)과 재혼한 시점에서 짚고 가야할 내용이 있다, 바로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의 남동생인 레오폴트(Leopold I, Holy Roman Emperor. 1640~1705)에 대해서이다,
여기서부터 이번 칼럼의 서두에 언급된 프랑스 루이 16세 왕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의 가계도 내용이 살펴지기 때문이다. 이에 워낙 복잡한 유럽 왕가 계보에서 더구나 무려 5~6개 나라가 연관된 계보를 살펴가는 점에서 복잡하게 얽혀들어 혼란스러워지는 부분에 대하여 양해를 구한다.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에스파냐(스페인)의 ‘마리아 아나’의 막내아들 레오폴트(Leopold I, Holy Roman Emperor. 1640~1705)는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et Theresa of Spain. 1651~1673)와 1663년 4월 약혼에 이어 1666년 결혼하였다, 이와 같은 ‘레오폴트’의 부인 에스파냐(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레오폴트’의 누나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Mariana of Austria. 1634~1696)의 딸이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펠리페 4세 왕이 첫 부인 프랑스의 이사벨이 세상을 떠나자 1646년 ‘레오폴트’의 누나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Mariana of Austria. 1634~1696)와 재혼하여 낳은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외삼촌인 ‘레오폴트’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펠리페 4세 왕과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의 외종사촌 관계의 결혼에 이어 그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로 이어진 연속된 근친결혼이다)
이후 에스파나(스페인)의 펠리페 4세 왕(Philip IV of Spain. 1605~1665)이 세상을 떠났을 때 펠리페 4세 왕과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 사이에 태어난 후계자 에스파나(스페인)의 카를 2세는 4살이었다, 이에 어머니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Mariana of Austria. 1634~1696)에게 섭정의 지위가 주어졌다. 에스파나(스페인)의 카를 2세는 1679년 프랑스 루이 13세 왕(Louis XIII of France. 1601~1643)의 손녀인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Marie Louise d'Orléans. 1662~1689)와 결혼하였다, 물론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다. 자녀를 갖지 못하였던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는 1689년 훗날 맹장염으로 추정하는 심한 복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에스파나(스페인)의 카를 2세는 어머니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의 주선으로 오늘날 독일 남부의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아나(Maria Anna of Neuburg. 1667~1740)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후계자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바로 오랜 근친결혼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와 같은 카를 2세(Charles II of Spain. 1661~1700)가 후계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를 이어받은 인물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의 프랑스의 루이(Louis of France. 1661~1711)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Maria Anna Victoria of Bavaria. 1660~1690)의 아들 펠리페 5세(Philip V of Spain. 1683~1746)였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프랑스 루이 14세 왕(Louis XIV of France. 1638~1715)이며 할머니가 에스파나(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 of Spain. 1638~1683)이다, 이러한 펠리페 5세의 할머니가 에스파나(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로 후계 없이 세상을 떠난 에스파냐(스페인)의 카를 2세(Charles II of Spain. 1661~1700)의 누나인 것이다. 이에 할머니의 남동생 후계를 손자인 펠리페 5세로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에스파나(스페인)의 후계자 문제는 프랑스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호박이었으며 주변국 영국과 에스파냐(스페인) 통치가 단절된 합스부르크 왕가와 네덜란드의 입장에서는 공룡으로 변모할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이 패배하였다.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가 연합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과 맞붙은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이 1701년 일어나고 말았다. 1713년 펠리페 5세(Philip V of Spain. 1683~1746)의 프랑스 왕권 포기를 조건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으로 합의되면서 1713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전쟁 초기인 1701년 펠리페 5세는 사부아 왕가의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of Savoy, 1688~1714)와 결혼하였다. 이러한 ‘마리아 루이사’가 1714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3명은 단명하였다,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 에스파냐(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 왕(Ferdinand VI of Spain. 1713~1759)이다. 그는 1713년 9월 23일 태어나 4개월 후에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를 잃었다. 펠리페 5세는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직후 1714년 12월 포르투갈의 ‘바르바라’(Barbara of Portugal. 1711~1758)와 재혼하였다. 이러한 ‘바르바라’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낳은 펠리페 5세(Philip V of Spain. 1683~1746)는 첫째 부인 ‘마리아 루이사’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페르난도 6세(Ferdinand VI of Spain. 1713~1759)에게 후계를 물려주고 1746년 7월 9일 세상을 떠났다.
펠리페 5세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페르난도 6세는 새어머니 포르투갈의 ‘바르바라’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페르난도 6세 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미루고 다시 짚고 가야 할 부분을 살펴본다.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트(Leopold I, Holy Roman Emperor. 1640~1705)는 누나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Mariana of Austria. 1634~1696)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et Theresa of Spain. 1651~1673)와 결혼하여 큰아들 요제프 1세 신성로마 황제(Joseph I, Holy Roman Emperor. 1678~1711)에게 후계를 물려주었다.
이후 아들이 일찍 죽었던 요제프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레오폴트(Leopold I, Holy Roman Emperor. 1640~1705)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후 그 또한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어 장녀인 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리지아(Maria Theresa. 1717~1780)에게 (Francis I, Holy Roman Emperor. 1708~1765) 후계를 물려주려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에 1713년 합스부르크 왕가 영토에서 남자 상속인이 없으면 여자도 상속권을 가질 수 있는 국사 조칙(pragmatic sanction)을 강제로 만들었다. 이에 ‘레오폴트’의 사후에 그의 장녀 마리아 테리지아가 후계를 잇게 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마리아 테리지아’(Maria Theresa. 1717~1780)는 1736년 2월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에 거점을 가진 로렌 공국(Duchy of Lorraine)의 ‘프란츠 1세’(Francis I. 1708~1765)와 결혼하였다. 이에 남편은 ‘프란츠 1세 신성로마 황제’(Francis I, Holy Roman Emperor. 1708~1765)가 되었다, ‘‘마리아 테리지아’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이며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으로 실질적인 통치를 하였다, 이러한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이 바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이다.
칼럼에서 이야기 하려 하는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삶을 통한 역사적인 맥락이었다. 그러나 이번 칼럼은 주요한 연대기의 나열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리된 연대표가 없게 되면 시대의 역사적 행간을 깊게 이해할 수 없음에서 정리한 내용임을 양해 바란다.
연대기로 끝나게 되는 오늘 칼럼의 마지막 이야기는 칼럼 중간에서 미뤄두었던 에스파냐(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 왕(Ferdinand VI of Spain. 1713~1759)에 대한 내용이다. 페르난도 6세는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Philip V of Spain. 1683~1746)와 사부아 왕가의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of Savoy, 1688~1714) 사이에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에스파냐(스페인)의 왕이 된 인물이다. 그는 태어나 4개월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새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는 1729년 포르투갈의 ‘바르바라’(Barbara of Portugal. 1711~1758)와 결혼한 후 아버지 펠리페 5세가 1746년 세상을 떠나면서 에스파냐(스페인)의 왕이 되어 1759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이었다.
이와 같은 페르난도 6세 왕과 그의 부인 포르투갈의 ‘바르바라’ 대한 일부 평가에서 정신질환을 가진 왕과 부인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편협 된 생각이 빚어낸 결과이다, 페르난도 6세 왕은 정통한 상속자라는 운명으로 유년기에서부터 소년기에 이르기까지 핍박에 가까운 고독한 성장 과정 속에서 극히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감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프시코드(Harpsichord) 연주에 능숙하였으며 작곡을 남길 만큼 정통한 음악적 지식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페르난도 6세 왕의 음악적 소양이 깊어진 계기는 부인 ‘바르바라’의 영향이 크다.
당시 이탈리아의 음악가 ‘도메니코 스칼르라티’(Domenico Scarlatti. 1685~757)가 있었다. 독창적인 2악장 방식의 대위법적인 하프시코드 소나타 작품으로 근대 피아노 주법의 바탕을 일군 그는 나폴리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 중에 로마로 건너가 당시 망명 중이던 폴란드의 여왕 ‘마리 카지미르’(Marie Casimire. 16411716)의 음악 선생이 되었다, 이후 1720년경 리스본으로 건너가 포르투갈 왕실 예배당의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1728년 포르투갈의 ‘바르바라’(Barbara of Portugal. 1711~1758)공주의 음악선생이 되었다, 이후 1729년 ‘바르바라’가 에스파냐(스페인)의 페르난도 6세 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을 때 그를 따라 에스파냐(스페인)로 건너가 궁정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 ▲ (좌로부터) 펠리페 5세(Philip V of Spain)/ 페르난도 6세 왕(Ferdinand VI of Spain)/ 포르투갈의 ‘바르바라’(Barbara of Portugal)/ ‘파리넬리’(Farinelli)/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와 같은 페르난도 6세 왕과 그의 부인 포르투갈의 ‘바르바라’의 음악적 소양은 매우 깊이가 있었으며 실제로 많은 음악가를 후원하였다, 이들 부부는 특히 천상의 소리를 전하는 남성성을 제거한 가수들 카스트라토(castrato)들의 후원이 두드러졌다, 그중 전설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Farinelli. 1705~1782)의 후원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파리넬리는 이탈리아 남부 안드리아(Andria) 출신으로 본명은 ‘카를로 마리아 미켈란젤로 니콜라 브로스키’(Carlo Maria Michelangelo Nicola Broschi)이다. 그는 로마 교황청에서부터 유럽 주요나라의 왕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였다, 1738년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단과 함께 에스파냐(스페인)로 향하였다.
이는 페르난도 6세의 아버지 펠리페 5세가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을 때 치유를 목적으로 ‘파리넬리’를 초청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펠리페 5세 왕은 ‘파리넬리’의 노래를 듣고 매우 안정적인 상태를 가졌다. 이에 궁정 음악가로 지명되어 펠리페 5세가 17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이후 왕위에 오른 페르난도 6세는 부엔 리티로 궁전(Buen Retiro)의 콜리세오(Coliseo)를 오페라 하우스로 만들어 ‘파리넬리’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750년 귀족 작위를 받았던 그는 ‘바르바라’(Barbara of Portugal. 1711~1758)왕비가 1758년 세상을 떠나고 이어 페르난도 6세 왕(Ferdinand VI of Spain. 1713~1759)이 다음 해 175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에스파냐(스페인)에서 활동하였다.
여기서 일부 기록에 페르난도 6세 왕의 폭력적이며 광적인 정신질환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면 당시 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바르바라’ 왕비가 1758년 8월 27일 마드리드 교외의 아랑훼즈 궁전(Royal Palace of Aranjuez)에서 세상을 떠난 이후 페르난도 6세 왕 자신이 1759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몸을 전혀 씻지 않고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밤마다 궁전을 배회하였다고 한다.
당시 ‘파리넬리’는 이러한 페르난도 6세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가 죽는 날까지 그를 위한 노래를 불렀다. 다음 왕이 되었던 페르디난도 6세 왕의 이복 동생인 에스파냐(스페인)의 카를 3세 왕(Charles III of Spain. 1716~1788)은 음악과 거리가 멀어 ‘파리넬리’는 주군을 위한 천상의 노래를 마드리드의 하늘에 남기며 에스파냐(스페인)를 떠났다. 다음 칼럼은 (214) 추락하는 역사의 눈물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