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램프는 빨리 탄다.’ 독일의 시인이며 철학자로 칸트의 비판적 계승자인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의 말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서 한국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허문 선구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였던 그러나 안타깝게 55세의 나이로 타계한 황창배(黃昌培. 1947~2001) 화가를 기억하는 사람이면 쉽게 공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서울 연희동에 소재한 황창배 미술관에서 10월 2일부터 11월 30일까지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을 그려온 화가 ‘황창배의 북한기행전’이 전시된다. 이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면 지난 1997년 중앙일보사의 통일문화연구소가 남북문화교류 사업으로 추진한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이 방북하였다. 1997년 9월 23일부터 10월 4일까지 통일문화연구소 실무진과 당시 영남대 교수로 재임 중이던 유홍준 교수가 예비답사를 다녀온 이후 최초로 남북한이 승인한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이 구성되었다.
당시 언론인 권영빈 단장과 최창조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그리고 황창배 화가와 통일문화연구소 유영구 연구팀장과 김형수 차장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제15대 대선 이틀 전인 12월 16일 북경을 거쳐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도착하였다.
![]() ▲ 성불사 129x259cm. 한지위에 아크릴. 1998 자료제공: 황창배 미술관 © 브레이크뉴스 |
조사단은 유서 깊은 대동강 변에 서 있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6호 련광정(練光亭)과 모란봉으로 잘 알려진 금수산의 고구려 축성 기조가 남아있는 을밀대(乙密臺)와 평양 왕릉동에 있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東明王陵)과 같은 유적에서부터 금수산태양궁전의 김일성 주석 시신 안치소와 평양 시내 주요한 시설들을 두루 답사하였다.
이어 황해도에 소재한 구월산(九月山)과 정방산(正方山)을 거쳐 신라 시대에 창건된 성불사(成佛寺)와 북한 국보 문화 유물 제67호인 민족의 얼이 깃든 고구려 고분 안악3호분(安岳三號墳)을 답사하였다. 또한, 개성 일대의 박연폭포와 선죽교에 이르는 역사적인 유적을 답사한 후 15여 일간의 조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북한문화유산조사단’으로 방북하여 그려진 작품은 1998년 9월 24일부터 10월 10일까지 인사동 소재 선화랑에서 초대 개인전으로 전시되었다. 당시 분단의 산하에 말로만 들어온 역사적 유적과 함께 북한의 실상을 그려낸 평양 거리는 물론 김일성 주석 시신안치소와 같은 생생한 그림은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작품은 올해 3월 9일부터 5월 20일까지 올림픽공원에 있는 소마미술관의 재조명 작가 특별기획으로 열린 ‘황창배 유쾌한 창작의 장막전’에서도 소개되었다.
지난 2016년 ‘스페이스 창배’로 개관되어 황창배 미술관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열리게 되는 ‘황창배의 북한기행전’은 작가의 작품과 함께 많은 자료가 함께 전시된다. 지난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평화와 번영을 향한 겨레의 염원이 펼쳐진 시기에 열리는 황창배 작가의 북한 그림 전시에 담긴 의미는 각별하다.
작가가 그려낸 북한 그림을 보면 이와 같은 의미를 더욱 크게 살피게 된다. 작가는 북한에서 스케치하여온 작품을 바탕으로 200호 이상 대작 10여 점과 크고 작은 30 여점이 넘는 수채화와 드로잉을 남겼다. 민족의 역사를 품은 명승고적 성불사와 련광정 그리고 개성 주변도와 같은 작품은 사실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깊은 울림을 담은 빛깔로 현장에서 헤아린 작가의 역사적인 감성을 고졸하게 표현하였다.
이어 고구려의 안학궁(安鶴宮) 터가 있는 평양의 주산 대성산(大城山)을 그린 작품은 예로부터 청정한 샘물이 많았던 산의 특성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그려냈다. 이어 고구려 고분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작품은 웅대한 역사의 현장을 직접 살핀 작가의 감성이 낳은 걸작이다. 방형(方形)의 고분(古墳)을 이등분하여 상층부의 봉분과 하층 고분 내실의 회랑을 그려낸 작품은 민족의 얼이 담긴 고분 벽화의 장대한 행렬을 고분 밖으로 끌어낸 의식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유일하게 원형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피어난 풀과 흐르는 물이 다르지 않은 단일민족의 분단된 산하에 담긴 작가의 깊은 의식이 녹아있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려진 200호 대작 ‘북한 판타지아’다. 이는 작품 제목 판타지아(fantasia)에서 의미하듯이 어떤 형식의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의식으로 그려낸 작품을 말한다. 즉 음악에서의 환상곡(fantasy)과 같은 맥락이다. 많은 곳을 답사한 기억의 흔적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하여 가슴에 품었던 감성을 고스란히 쏟아놓고 있다. 외면할 수 없는 주체사상의 획일적인 집단의 몸짓이 신성화된 숭배와 연결되면서 빈부와 귀천이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눈빛이 번뜩인다. 마침내 작가는 살아 흐르는 강물을 그려 아득한 저편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넌다.
소정(素丁) 황창배(黃昌培) 작가는 1947년 한의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공부한 그는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나 2학년 때에 동양화과로 바꾸었다. 당시 작가는 학교 수업 이외에도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가에게 사사하여 작품 뒷면에 반복된 붓질을 통하여 깊은 빛깔과 은은한 형상이 배어 나오게 하는 우리나라 전통 초상화의 배면 기법을 공부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73년 문자예술의 승화된 예술혼을 담은 전각의 대가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1921~1993)에게 서예와 전각을 공부하였다. 이는 황창배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스승의 고명딸 이재온과 결혼하게 된 내용도 작가의 예술적 삶에 많은 영향이 있었다. 나아가 스승이며 장인인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선생과의 깊은 예술적 교감과 사사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는 황창배 화가의 예술세계에 대한 진정한 접근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많은 이야기를 살펴본다.
![]() ▲ 북한 판타지아 194x259cm. 캔버스위에 아크릴. 1998 자료제공: 황창배 미술관 © 브레이크뉴스 |
전각가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는 근대 서화가인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0)과 서예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으로부터 서예와 전각을 공부하여 우리나라 전각예술의 현대적 발전을 일군 선구자이다.
여기서 잠시 전각예술의 선구적인 지평을 열어간 철농 이기우의 스승이었던 이한복과 오세창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대 서화가 무호 이한복은 청나라의 시·서·화와 전각에 정통한 화가 오창석(吳昌碩. 1844~1927)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화가 오창석은 10대부터 40대까지 각법(刻法)에 심취하여 젊음을 보냈을 만큼 전각에 대한 오랜 연구에 천착하였다. 그는 돌에 새겨 전해온 가장 오랜 실증적 유산인 석고문(石鼓文)을 베껴 쓰면서 서법을 연구하여 독자적인 전서(篆書)를 창안하였다. 이후 독창적인 전서(篆書)의 필법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다. 이와 같은 오창석의 서법과 화법에서부터 전각을 연구한 무호 이한복은 오창석 전서체에 뛰어났다. 또한 글씨와 그림과 전각에까지 정통한 그의 감식안은 멀리 일본에까지 알려졌던 화가이다.
또한, 오세창은 조선 말기의 역관이며 서화 수집가로 금석학에도 정통하여 우리나라 주요한 금석문(金石文)을 고증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펴낸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장남이다. 그는 부친 오경석과 깊은 인연을 가졌던 우리나라 개화기의 전설적인 개화파 한의학자 유대치(劉大致. 1831~?)또는 유홍기(劉鴻基)로 알려진 인물에게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1879년 통역관 시험인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역관으로 근무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가 되었다. 이후 1897년 동경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일본에서 근무하다 귀국하여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 중 투옥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은 나라를 짓밟힌 일제 강점기 시대에 8대에 이르는 역관 집안의 대대로 물려온 서화와 특히 부친 오경석이 수집한 수많은 예술작품을 연구하고 정리하여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주요한 서화가의 인명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출판하였다.
또한 조선조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예술가와 문인 그리고 학자가 사용한 낙관 기록과 인장 자료를 망라한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펴내는 등 많은 저술을 남겨 우리나라 서화 예술의 역사적 실체를 정리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난 서예가이었던 오세창(吳世昌)은 특히 기와를 사용한 우리나라 고대 건축물의 ‘암막새기와’ ‘수막새기와’로 표현하는 ‘와당’(瓦當) 에 대한 역사적인 문양과 문자 형태의 연구에 선구적인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이와 같은 오세창은 부친 오경석으로부터 10대 때부터 전각(篆刻)을 배웠다. 자신을 조각하는 벌레인 조충(彫蟲)으로 표현하였던 그는 중국 고대 전각의 역사에 해박하였으며 기능적인 장인의 작업으로 오랜 역사를 이어온 우리나라 전각을 예술로 승화시킨 주역이다.
이와 같은 스승으로부터 공부한 철농 이기우는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오랜 역사를 이어온 대가들의 다양한 전법(篆法)과 도법(刀法)을 연구하였다. 철농의 전각예술에 대한 가장 큰 의미는 옛 바탕을 토대로 현대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한 법고창신(法古創新)에 있다. 이는 전각예술에서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중국이라는 거대한 중화(中華)의 바람에 눕지 않고 우리의 것으로 아름다운 전각 문자예술을 탄생시킨 민족적인 의미를 품고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와 예술에 맞는 서체와 서법이 현대적으로 발전되었음은 작가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한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와 같은 전각(篆刻)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주요한 기록을 남기려는 지혜의 노력이 있었다. 이는 인류의 4대 문명인 BC 6000년경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부터 BC 5000년경에 시작된 중국의 황허 문명과 BC 3000년경에 이루어진 이집트 문명과 인더스 문명에 이르기까지 인장(印章-seal)의 역사는 인류의 문명과 동행하여 왔다.
그 최초의 유물기록은 BC. 6000년경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인 이라크 남동부 지역인 ‘우루크’(Uruk)에서 발굴된 수메르 문명 시대의 원통형 인장인 ‘실린더 실’(cylinder seal)이다. 이는 쉽게 오늘날의 도장과 같은 형태의 큰 원통형 몸체에 기록할 내용을 조각하여 점토판에 이를 굴려 그 내용을 보존하였다. 일부에서는 막대로 누르거나 두들겨서 무늬를 새긴 중국의 선사 시대 토기인 인문 토기(印紋土器)이거나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인장(印章-seal)의 역사로 연관 짓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의 실체적인 용도와 형태에서 인장으로 헤아리는 것은 비약이다.
![]() ▲ 련광정 60x140cm. 종이위에 수채, 아크릴. 1998. 자료제공: 황창배 미술관 © 브레이크뉴스 |
이후 BC. 3000 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상형 문자로 이루어진 인장이 사용되었다. 이후 1922년 파키스탄 남부 신드 주 중북부에 있는 인더스강 하류의 인더스 문명 유적지 모헨조-다로(Mohenjo-daro)에서 소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고대의 통치자가 사용하였던 파슈파티 인장’(pashu pati seal)이 발굴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도장과 같은 인장이었다.
이는 1928년 중국이 출토하여 가장 오랜 유물로 주장하는 BC. 1600년에서 BC. 1046까지 존재한 상나라의 옥판(玉板)에 새긴 석재인장 은새(殷璽)가 인도 문명에서 유래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갑골문(甲骨文)이 출토되었던 허난성(河南省)에 소재한 안양(安陽)의 소둔마을(小屯村)의 은허 유적은 상나라 후기 도성인 북몽(北蒙)지역으로 사기(史記)에 기록된 곳이다. 이와 같은 인장(印章-seal)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는 물론 동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왔다.
이후 중국 주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룬 진나라(BC 221∼BC 206) 때에 황제의 인장을 옥새(璽)라 하였으며 신하의 인장을 인(印)이라 하였다. 이후 채륜’(蔡倫, 50?~121?)이 종이를 발명하였던 후한 시대에 군주를 보필하던 최고의 문관인 승상(丞相)과 무관 대장군(大将軍)이 사용하던 도장을 장(章)이라 규정하면서 인장(印章)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여기서 잠시 중국의 고서와 문헌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시대 이전의 인장을 술(鉥)이라고 하였던 많은 기록을 만났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설명하면 크고 굵은 쇠바늘로 찌른다는 의미에서 새김(印)을 나타내는 인장을 술(鉥)로 표현하였다. 당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0) 시대에는 황제의 봉인(封印)을 옥새(玺)라 하고 황제 개인의 인장을 짐(朕)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고녑(古鈢) 또는 고새(古鈢)로 기록되는 내용은 옥새(玺)와 같은 뜻이며 고니(古鉨)로 기록되는 내용은 인(印)과 같은 뜻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살펴 갈 것은 당나라 고종 황제의 황후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 690~705)가 황태자를 폐위하고 주나라를 세웠을 때 옥새(璽)의 발음이 ‘사(死)’와 같으니 보(寶)로 바꾸어야 한다는 간신배의 아첨으로 이후 보(寶)가 되었던 내용이다. 또한 이즈음부터 인장문화가 발달하면서 그동안은 대체로 밀봉하여 붙인 자리에 인장(印章)을 찍었던 방식에서 문서에 곧바로 날인(捺印)한 형태로 바뀌면서 도장(圖章)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사실도 역사가 품은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양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쳐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반지 형태의 인장에서부터 다양한 인장들이 밀봉된 서신이나 문서를 봉하는 인장으로 사용하였던 점은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동양의 인장 문화를 종합적으로 아우른 용어가 전각(篆刻)이다. 동양 삼국에서 전각(篆刻)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언급한 인물은 중국 전한(前漢) 말기의 서한(西汉) 시대 사상가이며 언어학자인 양웅(扬雄. BC. 53~AD. 18)이다. 당시 왕실 도서관 천록각(天祿閣)에서 고대 언어 연구에 몰두하였던 그는 고대 경서인 주역(周易)에 상응하는 태현경(太玄經)과 공자의 논어(論語)를 모방한 법언(法言)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은 법언(法言)에서 어려서부터 새기는 작업에 천착하여 마치 새기는 벌레와 같은 고행적인 작업이 전각이라는 뜻을 담은 (童子彫蟲篆刻是也)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동자란 10대를 이르는 말로 바로 청나라의 화가 오창석이 10대에 전각에 정진한 내용과 철농 이기우의 스승이었던 오세창이 10대 때부터 전각을 배워 자신을 조각하는 벌레인 조충(彫蟲)으로 표현한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 배경이다.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인장문화에서 전각예술로 발전한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 원대의 화가 왕면(王冕. 1287~1359)이 저장성(浙江省) 칭톈(青田)에서 나는 청전석(靑田石)에 스스로 각인하여 이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명나라의 화가이며 서법가인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장남 문팽(文彭. 1498~1573)에 의하여 전각예술의 전환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글과 그림에 능하였던 그는 서화 작품에서 이름과 재호(齋號)와 당호(堂號) 위주였던 낙관(落款)과 인문(印文)을 낙성관지(落成款識)의 공간예술로 확장하여 이에 적합한 시문을 전각하여 사용하였다. 이 무렵 낙관과 인장의 미적 형태를 고려한 다양한 재질이 개발되면서 인장 옆면에 전각 자체의 동기와 사유를 새겨놓은 측관(側款)이 시작되어 전각이 독립된 예술 영역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각예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문팽(文彭)의 제자 하진(何震. 1530~1604)은 가장 전문적인 전각가였다. 그는 스승인 문팽(文彭)과 함께 청전석(靑田石)을 주요한 재질로 하여 뛰어난 각도법을 연마하여 전각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용하였던 청전석(靑田石)은 오늘날 체계적인 광물학적으로 엽납석(葉蠟石)과의 석재이다. 이는 잎 모양의 투명한 푸른빛을 품은 돌로 암석의 방향성이나 구조의 배열상태가 보이지 않는 균질한 사방정계(斜方晶系)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높은 온도와 기압이 동시에 발현되는 시기에 생성된 암석으로 쉽게 말하면 미세한 광물 입자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전각의 섬세한 맛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지혜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 ▲ (좌) 안악3호 고분 38x38cm. 캔버스위에 아크릴. 1998 (우) 풍부한 물을 품고 있는 대성산 35x49.5cm. 화선지위에 먹, 아크릴. 1998 자료제공: 황창배 미술관 © 브레이크뉴스 |
이와 같은 문팽(文彭)의 제자 하진(何震. 1530~1604)을 당대 제일의 전각가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의 천재적인 도법(刀法)에 있다. 그는 굵은 선을 전각하는 집도법인 손을 통째로 쥐어 전각도를 잡는 악관법(握管法)에서부터 섬세한 작업의 도법인 두 손가락으로 전각도를 잡는 쌍구법(雙拘法) 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도법은 전설로 전해져왔다. 또한 고대의 금속유물에 새겨진 다양한 문자를 연구하여 음각(陰刻)의 관(款)과 양각(陽刻)의 지(識)를 전각예술로 승화시킨 업적을 남겼다.
황창배 화가의 스승이며 장인이었던 철농은 화가 이한복과 서예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오세창으로부터 중국 역대의 주요한 전각가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였다. 이는 추사 김정희 이후 중국 예술에 가장 정통한 스승에게서 공부한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전서와 예서는 물론 한글의 옛 서체에까지 정통한 서법을 공부한 이후 독창적인 전각예술을 꽃피웠다. 그는 1955년 6월 12일부터 18일까지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철농전각소품전(鐵農篆刻小品展)’을 개최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예술사에서 전각작품 개인전이 최초로 열린 것으로 전각이 독립된 예술로 탄생한 의미이기도 하다.
황창배 화가의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던 ‘스페이스 창배’에서 2017년 10월 ‘파격의 뿌리 鐵農 이기우와 素丁 황창배 서예 전각전’ 이 3개월 동안 열렸다. 황창배 화가는 197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석사 논문으로 ‘篆刻의 發展을 위한 序章-技法上 分類를 中心으로’를 발표하였다. 이어 그는 다음 해 1975년 독보적인 한학자이며 금석학자인 임창순에게 달려가 한학과 금석학에서부터 우리나라 서예 미술사를 공부하였다.
![]() ▲ 1997년 황창배 화가의 북한 스케치 장면 자료제공: 황창배 미술관 © 브레이크뉴스 |
화가 황창배! 지금은 우리의 곁에 없는, 그러나 영원한 작품으로 남은 화가에 대하여 많은 사람은 그의 작품을 일러 무법(無法)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작가로 이야기한다. 이는 화가가 헤아리고 공부한 동양문화와 예술에서부터 우리의 것에 대한 뿌리 깊은 사유의 정신을 추구한 의미를 바탕으로 해석하고 평가한 말일 것이다.
며칠 전 메일로 날아든 작가의 북한 그림 특별전에 대한 보도자료를 받아들고 화가에 대한 바른 평가를 위하여 그 바탕의 흔적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화가의 깊은 화혼(畵魂)에 담긴 울림이 온전한 공간에 영원히 존재하는 날을 기대한다. 다음 칼럼은 (218) ‘우주의 꿈을 키운 스미스소니언과 구겐하임’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