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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을 추모하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0/07/10 [17:52]

▲ 박원순 시장     © 브레이크뉴스


(그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1971년 4월 2일 서울대학교 관악산 종합캠퍼스 기공식이 열리던 날 당시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이었던 정희성 시인이 학생대표로 썼던 찬시의 첫 구절이다.

 

이후 1975년 1월 2일 서울대 관악 캠퍼스 이전이 시작되어 3월 5일 관악캠퍼스에서 처음 열린 입학식에 사회계열 입학생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있었다. 이후 4월 11일 농대 수원 캠퍼스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희 퇴진을 외치며 경찰에 연행되었던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교내성토대회가 열렸다. 당시 농대 축산학과 4학년 김상진은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외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할복하였다. 그는 병원으로 옮기는 중에 애국가를 불러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다음 날 병원에서 스물다섯의 삶을 마감하였다.

 

당시 독재정권이 결빙시킨 세상의 얼음판을 맨주먹으로 깨트리던 1974년 4월 유신정권의 사법살인 사건 인혁당(2차) 사건과 민주화의 불꽃을 피운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다. 당시 두 사건에 묶음으로 구속된 김지하 시인이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는 풀려나자마자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 언론투쟁에 동행하여 1975년 2월 17일 동아일보에 인혁당 사건의 조작과 고문을 폭로하는 (고행-1974)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에 반공법위반으로 형집행 정지가 취소되면서 다시 구속되어 재수감 중이던 시인은 서울대생 김상진의 할복자살 소식을 들었다. 당시 옥중에서 몰래 써 보냈던 (기인 겨울 얼음 뚫고 흐르는 맑은 한 줄기)로 시작되어 의지할 곳 없는 우리들 가슴에 함성으로 님아 돌아오라는 추모 시는 1975년 4월 24일 서울 명동성당 기도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하여 낭독되었다.

 

이후 1960년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월남이 패망하였다. 유신 독재정권은 이를 빌미로 5월 13일 집회와 시위는 물론 국민의 입과 귀를 가린 긴급조치의 묶음 판 9호를 발동하였으며 5월 15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개관되었다. 이어 5월 22일 서울대에서는 김상진 1주년 추도식을 겸한 긴급조치 9호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영문학과 4학년이었던 김정환 시인의 추모 시 (너는 순진한 피 한 방울로 오려마/ 서러운 이야기를 뒤에다 두고/ 그때는 너의 알몸으로 오려마)로 마무리된 (사월 진혼가)가 발표되었다. 이어 1974년 시집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받았던 민중의 귀를 울린 신경림 시인의 (친구여 잘 가거라/ 너는 외롭지 않다/ 네 뒤를 따르는 피의 노랫소리가 들리리라)는 추모 시가 전해졌다.

 

당시 이와 같은 교내시위를 잔인한 폭력으로 진압한 현장을 도서관에서 목격하였던 박원순 학생은 달려가 시위에 가담하자마자 체포되어 4개월간 수감되었다. 이후 복학하지 못하고 1976년 단국대 사학과에 다시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재학 중이던 1978년 법원사무관시험에 합격하여 1979년 춘천지원 정선등기소장으로 근무하였다. 다음 해 1980년 6월 제22회 사법시험 2차에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합격하여 1982년 사법연수원(12기)을 수료하고 8월 대구지방 검찰청 검사가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인 1983년 8월 13일 검사직을 사직하고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1986년 서울대 재학생 권인숙의 노동운동 위장 취업과 관련된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의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1993년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을 맡아 승소하면서 최초 제기된 성 문제의 사회적 인식에 대한 변화를 선도하였다. 이와 같은 업적이 평가되어 1998년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고 박 시장은 1985년 뒤늦게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1986년 2월 역사 학술단체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바른 역사 인식과 역사의 대중화에 지평을 열었다. 이후 1991년 영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사저를 팔아 자신이 설립한 역사문제연구소에 기부한 이후 런던 정경대(LSE)에서 국제법을 1년간 공부하고 1992년 돌아왔다. 이어 9월 미국으로 건너가 아시아 문화권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 연구 교류단체인 하버드대학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와 교류한 이후 하버드대학 로스쿨 휴먼 라이츠 프로그램에 방문연구원(Visiting Fellow)으로 공부하였다.

 

이와 같은 영국과 미국의 선진 사회 상황을 체험하였던 고 박원순 시장은 귀국한 이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걸음을 재촉하였다. 참여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사회 건설을 지향하여 1994년 9월 창립된 시민 운동단체 참여연대 창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시민운동의 소중한 의식을 세상에 알렸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빛이 들지 않는 그늘진 세상의 아픔을 걸머진 소외계층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지향한 (아름다운 재단)을 2000년 설립하여 9월 동숭아트센터에 나눔의 가게 1호점을 열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사고, 파는 (아름다운 가게)를 세상에 알렸다. 

 

고 박 시장은 사학을 전공한 전문성으로 역사의 진실을 가린 그릇된 사관을 바로잡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대표적으로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피해자(위안부) 강제연행과 범죄를 다룬 민간법정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공동검사로 활동하면서 역사의 불법에 대한 논리적인 추궁으로 모든 사람을 숙연케 하였다. 이는 1993년 발표한 (일본 전쟁 범죄 처벌, 지금도 가능한가)와 1994년 (동경전범재판, 그 능욕과 망각의 역사) 1995년 (세계 각국은 과거사를 어떻게 처벌했는가)와 같은 논문에 담긴 심층적인 연구가 바탕이었다. 또한, 1995년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 저서 (일본의 전쟁범죄연구-아직도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와 1996년 출판한 (한국의 과거청산연구-역사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에 담긴 전문적인 내용이 바탕이었다. 

 

지난 2011년 재 보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후 최초로 3선 시장에 오른 박 시장은 해야 할 일이 많은 삶을 살았으며 기대할 것이 많은 소중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누구나 생은 가고 이별은 다가오는 것이기에 박 시장을 세상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무게를 짊어지고 홀연히 떠나간 고인의 삶에 담긴 소중한 이야기는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에 비바람을 맞지 않고 살아가는 생명은 없다. 작은 인연으로 쓸쓸하게 남아있는 고인의 전화번호와 간혹 보내준 문자를 들여다보며 (바람에 잠이 깨이면 돌아오라고/ 비 맞아 꿈이 깨이면 돌아오라고) 깊은 슬픔을 삼키며 삼가 옷깃을 여미어 부디 영면을 기원 드린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 칼럼니스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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