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먼 메일러(1923~2007)의 저서 (MOONFIRE) © 브레이크뉴스 |
먼 나라 영국에서 한 권의 책을 보내왔다. 칼럼 중에서 비행과 로켓 그리고 우주에 관한 글을 읽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내온 책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내용을 담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며 소설가인 노먼 메일러(1923~2007)의 저서 (MOONFIRE) 이었다. 이는 1957년 10월 4일 구소련에서 인류 최초로 발사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Спутник)호에 의하여 최강의 자존심을 양보하였던 역사를 되찾으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추진으로 250억 달러를 투자하여 40만 명이 넘는 과학자가 10년간의 연구를 통하여 달에 최초로 사람을 보낸 프로젝트였다.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1969년 7월 16일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선장 닐 암스트롱(1930~2012)과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1930~),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1930~)과 같은 3명의 우주 비행사를 태우고 지구를 떠났다. 이후 7월 20일 2시 56분 닐 암스트롱과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암스트롱 선장의 우주복 주머니에는 1903년 세계 최초로 유인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가 조종하였던 비행기 왼쪽 프로펠러 조각이 담겨 있었다. 이는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의 정신을 기린 것이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 비행한 비행기의 프로펠러는 나무로 제작)
노먼 메일러는 이와 같은 인류 최초의 달 착륙에 대한 이야기를 1969년 8월부터 1970년 1월까지 LIFE 지에 게재하였다. 이는 LIFE 역사상 가장 길었던 기획 다큐멘터리 연재였다. 이후 1970년 (Of a Fire on the Moon) 제목의 한정판으로 출판하여 즉시 품절되었다. 이후 노먼 메일러가 세상을 떠난뒤 2009년 에디션 출판된 책이 (MOONFIRE)이다. 이와 같은 노먼 메일러의 저서(MOONFIRE)는 미 항공우주국(NASA) 협조로 방대한 사진자료와 함께 심층적인 취재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노먼 메일러는 하버드에서 공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문학과 사학분야에 집중적인 선택과목을 통하여 뛰어난 재능을 일구어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징집되어 필리핀에서 참전하였다가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 도쿄에 점령군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1946년 장편소설 (나자(裸者)와 사자(死者)를 발표하였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기록 문학 방식으로 저술된 소설은 전쟁의 폐해를 일깨운 작품이다.
작가의 작품은 앞선 시대를 관통한 미국의 소설가 존 더스 패서스(1896-1970)의 영향이 크다. 존 더스 패서스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차 대전에 참전한 이후 소르본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1차 대전 참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 리얼리즘 소설 (한 남자의 성인식)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1차 대전 참전 중 참호에서 썼던 소설이다. 이후 1921년 (세 명의 군인)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리얼리즘의 교과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후 그는 이념의 대립이 낳은 전쟁의 본질을 헤아리려 1928년 구소련을 여행하였다. 이에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을 함께 가졌던 그는 많은 작품에서 이와 같은 비판의 칼날을 품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의 존 더스 패서스 대표 작품은 미국의 3부작으로 평가받는 1930년 발표작 (북위 42도 선-The 42nd Parallel)을 시작으로 1932년 작 (USA. 1919)과 1936년 발표된 (The Big Money)이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신문의 스크랩에서부터 대중가요의 가사와 주요한 영화 장면들이 어우러졌다. 유명 인물의 자서전과 전기에 담긴 사실적인 내용과 가상의 허구가 함께 녹아내린 실험적인 기법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는 20세기 초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른 거대한 파노라마와 같은 그림이 소설에 그려진 것이다. 작가는 거대한 미국을 부자와 빈자의 나라로 비판하며 특히 산업 부흥시대에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운 의식이 보석처럼 들어박혔다.
이와 같은 맥락의 3개의 작품이 구성된 시리즈를 트릴로지(Trilogy)라 한다. 이는 어원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3을 이르는 트리아(tria)와 연설을 뜻하는 로고스(logos)가 합하여 이루어진 비극의 3부작을 말하는 트리로기아(trilogia)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 최초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Orestie)는 (아가멤논) (죽은 자에게 바치는 공양) (복수의 여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 그리스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이후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를 데리고 귀환한 이후 벌어진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어 중세 시대를 관통한 작가 단테의 지옥, 연옥, 천국,으로 구성된 대표작 (신곡)이 이와 같은 3부작이다.
미국의 소설가 존 더스 패서스의 현대적인 3부작 작품을 보면 그 구성과 문학적 서술의 기법이 미술과의 연관성이 매우 많다. 이를 전문적으로 비선형성(Non-linearity) 소설로 구분한다. 이와 같은 비 선형성이란 자연계의 불규칙한 운동으로 빚어진 복합성을 이르는 말로 혼돈으로 구체화되는 카오스 현상과 맞닿은 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자연계의 물리적이거나 수학적으로 그 원인과 결과의 비례적인 인과가 없는 특성으로 기상 현상에서 많이 발생한다.
존 더스 패서스의 작품 경향이 비선형적인 사실은 그가 추구한 미술적 감성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작가는 문학에 전념하기 전에 미술작가를 지망하였다. 그는 인상주의에서부터 표현주의와 입체파는 물론 추상미술을 융합한 자신만의 특성적인 그림을 추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문학작품이 출판될 때마다 표지 그림과 삽화를 자신의 작품으로 담았다.
그는 1922년 뉴욕 국립 ART CLUB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작품들은 유럽여행에서 그려진 수채화 작품들이었다. 당시 비평가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다음 해 뉴욕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에서 마티스와 피카소 같은 거장과 함께 초대 전시회가 열렸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2001년 뉴욕 킨즈 공립도서관에서 기획되어 전시 이후 미국 전역을 순회하였다. 영화와 연극의 극본에서부터 포스터와 무대 장치 그림까지 다양한 예술 영역을 확장하였던 그는 예리한 정치비평가로의 평가도 함께 품었던 작가이다.
시대는 이와 같은 작가 존 더스 패서스를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대표 작가로 평가하였다. (잃어버린 세대)란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는 전쟁의 폐허로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이다. 이는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1899-1961)가 1926년 발표한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서문에 담긴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입니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와 같은 서문은 미국의 여류작가이며 미술 애호가인 거투루드 스타인(1874~1946)이 썼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종군하였던 주인공 신문기자 제이크 반즈가 부상으로 치료 중 간호사로 지원한 영국 귀족 부인 브레트 애쉴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성불구라는 통증이 빚어낸 많은 이야기를 담은 1인칭 전개 기법의 소설이다. 파리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문화 투우를 삶의 그림자로 대비시켜 아픈 죽음을 맞는 소와 이를 관람하는 인간의 심리적 괴리를 드리웠다. 또한. 소설의 제목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는 구약성서 전도서 1장 5절의 (해는 뜨고 지며 그 떠오른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는 헤밍웨이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내린 소설이다. 헤밍웨이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8세 나이에 의용병으로 적십자 야전병원 구급차 운전병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밀라노 적십자병원에 이송되었다. 이때 헤밍웨이는 간호사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와 결혼할 것이라는 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1918년 전쟁이 휴전되면서 1919년 1월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그녀가 이탈리아 장교와 약혼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다. 이와 같은 충격 속에서 시카고로 이주하여 월간 저널 편집장으로 일하였던 그는 1921년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 스타)에 취업하였다. 이 무렵 헤밍웨이는 연상의 첫 부인과 결혼하여 1921년 9월 유럽 특파원으로 부인과 함께 파리로 갔다. 그의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는 헤밍웨이의 이와 같은 자전적 이야기가 흥건하게 녹아 있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헤밍웨이의 파리 생활에서 교유한 많은 문화예술인과의 인연은 (잃어버린 세대)라는 시대를 관통한 말을 낳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을 쓴 미국의 여류작가이며 미술 애호가인 거투루드 스타인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넌 인연이었다.
여류 소설가 (거투루드 스타인)은 대 부호인 독일계 유대인의 후손으로 존홉킨스 대학에서 타의로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1902년 대학 4학년 때 학업을 포기하였다. 이는 그녀가 가장 따랐던 작은 오빠 레오(1872~1947)를 따라 런던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빠 레오는 하버드 법대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에 오르면서 존홉킨스대학으로 옮겨 예술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5세기 중세 이탈리아의 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가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유럽을 여행하면서 유럽 미술에 대한 역사적인 소중함을 일깨웠다. 이후 유럽 이주를 택하였던 것이다. 남매는 다음 해 1903년 파리에 정착하였다. 파리 뤽상부르공원 근처 플뢰뤼거리 27번지에 마련된 2층짜리 주택은 그녀가 언급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예술을 품은 요람이었으며 시대를 관통한 예술가들을 꿰 뚫어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였다.
당시 이들 남매가 수집한 첫 작품을 보면 어둠의 시대에 빛을 보지 못하였던 폴 세잔(1839~1936)의 풍경화와 시대의 그릇됨을 풍자한 사실주의 판화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뜨겁게 다가온다. 이후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과 (세잔 부인의 초상)에서부터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작품과 폴 고갱(1848~1903)의 (세 명의 타히티인 또는 대화),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처녀)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소장되었다.
당시 이들 남매는 파리 예술가와 문학인의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진정한 미술 애호가였다. 당시 (거투루드 스타인)이 거주하였던 파리의 집은 미술가 앙리 마티스(1869~1954)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미국의 소설가 셔우드 앤더슨(1876~1941) 그리고 미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1885~1951) 그리고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1885~1972)와 (위대한 개츠비)의 미국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 등이 모이는 파리 살롱이 열리고 있었다. 또한, 집에 만들어진 작은 스튜디오는 유명 화가들의 전시회장으로 활용되었다.
이어 1904년 큰 오빠 마이클 부부가 파리로 이주하여 남매의 미술품 수집에 동참하면서 파리 미술계에는 큰 활력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예술을 품은 공간에서 몽마르트 술집 풍경에 부자유한 신체의 통증을 맡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1864~1901)에서부터 프랑스 나비파의 중심인물로 앵티미슴 회화와 함께 최후의 인상파 화가로 평가받았던 피에르 보나르(1867~1947)와 색채의 순수를 품은 야수파의 문 앙리 마티스(1869~1954) 그리고 강렬한 채색의 조화가 눈부신 프랑스 포비슴 화가 앙리 망갱(1874~1949)에서부터 입체파의 승화된 예술을 빛낸 스페인 태생의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같은 시대를 관통한 미술가들을 탄생시켰다.
물론 이와 같은 활동과 컬렉션에는 오빠 레오(1872~1947)의 영향과 오빠의 친구인 미술 감정가 버나드 버렌슨(1865~1959)의 영향도 있었지만, 세세하게 살펴보면 (거투루드 스타인)의 문학적 감성에서 발아된 예술적 감각이 살펴지는 내용이 많다.
이와 같은 작은 오빠 레오와의 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한 배경이 있었다. 폴란드계 유대인 여성 엘리스 바베트 토클라스(1877~1967)의 등장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녀는 워싱턴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후 1907년 파리로 건너와 거투루드 스타인을 만나게 되면서 두 여성은 마침내 동성애의 사랑에 빠져 바늘과 실과 같은 존재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우려하였던 오빠 레오는 더는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미술품 컬렉션 문제에서 당시 현대미술을 지향한 여동생 거투루드 스타인과 마찰까지 겹치면서 남매는 서로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들 남매가 1913년 결별하면서 그동안 컬렉션한 미술작품을 분배할 때에 오빠 레오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여동생 거투루드 스타인은 피카소 작품을 택하였던 내용은 이들 남매가 지향한 예술적 감성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후 오빠 레오는 1921년 화가의 모델로 활동하던 니나 아우지아스(?~1949)와 결혼하여 이탈리아 피렌체 교외의 세나나뇨 이주하였다. 이후 1946년 여동생 거투루드 스타인이 위암 수술 중 사망 한지 1년 후 1747년 오빠 레오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2년 후 1947년 레오의 부인 니나 아우지아스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와 같은 니나 아우지아스는 흑백의 과학에서 예술을 건져 올린 천재적인 여류 사진작가 사베레니스 애보트(1898~1991)의 작품으로 스미스소니언 초상화 갤러리에 영원한 모습을 남겼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정리되는 내용은 시대의 혜안 거투루드 스타인에 의하여 세기의 작가 헤밍웨이가 시대의 예술가들과 교유하게 되면서 다양한 감성의 축적과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는 헤밍웨이가 자신의 작품에서 풍경이 그려지는 것은 세잔의 풍경화에서 일깨운 것임을 밝히며 그림과 글에 대하여 숲과 바위와 같은 형태의 미학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는 음악가였던 어머니의 유전자로 어려서부터 첼로를 배우며 음악가의 꿈을 가졌던 헤밍웨이가 자신의 작품에 담긴 음악과 미술의 영향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던 점에서 그가 주장한 빙산론을 새기게 된다. 이는 8분의 1만이 물 위에 떠있는 빙산에 빗대어 작가 스스로 충분하게 인식하는 내용은 절제되고 생략되어도 더욱 깊은 감성을 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쿠바 한 어촌의 일상과 어부 노인의 삶을 회화의 조형 어법과 같은 함축된 언어로 그려내어 노벨 문학상을 받고 세상을 떠나간 작가의 굳어버린 여백을 매만지게 한다. artwww@naver.com
PS: 멀리 영국에서 따뜻하게 격려하여 준 과학자 선생님에게 옷깃을 여미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부족한 글을 바칩니다.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