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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거지가 되지 말고, 사랑의 황제가 되어라

라즈니쉬와 송현 시인의 가상대화(20)

송현(시인. 본지 주필) | 기사입력 2009/03/25 [12:30]
▲송현(시인. 본지 주필)   © 브레이크뉴스
송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라즈니쉬: 그래. 반갑다.
송현: 선생님, 오늘은 고독함과 홀로있음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라즈니쉬: 고독은 슬픔이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고독이란 하나의 불완전한 감각에 불과하다. 그대는 누구인가를 필요로 하고 있지만 그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고독은 암흑이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빛을 비춰주지 않는 캄캄한 집과 같다.

송현: 그래서 혼자라는 것은 고독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까?
라즈니쉬: 다르고 말고! 혼자라는 것은 그대의 감각이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도 필요하지 하지 않고 혼자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만족스럽다. 이 만족감은 사랑 속에서 일어난다. 사랑 속에서 연인들은 혼자가 된다. 사랑을 통하여 그대는 자신 속의 완전함을 더듬어 본다. 사랑은 그대를 완전하게 한다, 연연들은 서로를 함께 나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넘쳐흐르는 그들의 에너지 때문이다.

송현: 선생님, 고독을 느끼고 있던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는 없다는 뜻입니까?
라즈니쉬: 그래. 가까워질 수 없다. 함께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연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들은 고독한 상태 그대로이다. 지금 다른 한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그들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바로 그것뿐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자신을 속이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이란 “나는 외롭지 않아. 여기 다른 누가 있잖아”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두 명의 고독한 인간이 만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독감은 근본적으로는 두 배 이상 늘어나 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이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대는 홀로 있으면 고독하고 관계를 맺게 되면 불행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겪는 일이다. 사람들은 고독할 때에는 누군가 관계를 맺을 사람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맨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그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차라리 고독했을 때가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송현: 선생님, 좀 너무한 것 같습니다.
라즈니쉬: 너무하긴! 고독한 사람들끼리 만난다는 것은 우울하고 슬프고 불행한 사람들끼리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 불행은 더욱 불어나게 된다. 어떻게 두 개의 추한 것이 모여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두 개의 도둑이 함께 하여 완전한 전체성을 이룰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용할 분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속임수는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람들의 결혼 생할이란 신혼 여행이 끝날 무렵 사실상 끝나버리는 것이다. 

송현: 선생님,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일 뿐이라는 것입니까?
라즈니쉬: 그래. 일시적인 환상일 뿐이다. 참사랑이란 고독을 면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참 사랑이란 고독을 혼자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가 혼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대는 상대방을 채워 줄 수 없다. 그대는 현존으로 상대방을 채우려고 애쓰지 말라. 그렇다. 그대는 그대의 상대가 혼자가 되도록 그녀 혹은 그로 하여금 그대가 필요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의 존재로 넘쳐흐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대의 상대가 전면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그 자유로움을 그대와 함께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때에 그는 많은 것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는 많은 것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흥정물로서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줄 것이다. 왜냐면 주면 줄수록 더 많은 것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송현: 선생님, 그가 주는 것은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지요.
라즈니쉬: 그래. 연인들은 혼자 있다. 그리고 참다운 연인은 그대의 혼자 있음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의 혼자 있음에 대하여 전면적인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공간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연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자립심이나 혼자 있음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것은 만약 상대방의 자립심이 감해지면 그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다. 그때는 버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언제나 귀중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발버둥친다. 그리고 남편 또한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그녀가 언제나 남편을 필요로 하여 그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송현: 선생님.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흥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라즈니쉬: 그래 흥정이다. 이 흥정 속에는 끊임없는 충돌과 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투쟁은 모두가 그 자신만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이란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유가 힘차게 뻗어나가게 한다. 따라서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그 무엇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랑과 자유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나아간다. 그 둘은 같은 새의 두 날개와 갈다. 그대는 사랑이 그대의 자유에 역행하고 있다면, 그때 그대는 사랑이란 미명하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송현: 자유를 그대 사랑의 기준으로 하라는 것입니까, 선생님.
라즈니쉬: 그래. 사랑은 그대를 자유롭게 해준다. 사랑은 그대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전적으로 그대 스스로 서게 된다면 그대를 도와주었던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감사는 거의 종교적인 것이다. 그대는 상대로부터 어떤 신성함마저 느낄 것이다. 그가 그대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녀가 그대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리고 사랑은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이 타락할 때에는 그것은 소유와 질투가 되며 또한 권력 정치 지배 인심조작 등 온갖 추한 것을 위한 투쟁이 될 것이다. 사랑이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로 치솟을 때 그것을 자유라 부르리라.

송현: 선생님, 모든 성장은 사랑을 필요로 하겠군요.
라즈니쉬: 반드시 그러하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만약에 사랑에 조건이 있다면 그 성장은 전체적으로 뻗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 조건이 상장 속에 끼어들어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사랑하라. 어떤 것도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마라. 많은 것들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사랑에는 그 자신만이 찾아가는 길이 있다. 거지가 되지 말라. 사랑의 황제가 되어라. 단순히 주기만 하라.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는 가를 지켜보라. 그것은 천배로 불어나 다시 돌아올 것이다. 사람은 바로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욕심쟁이가 될 것이다. 주기는 눈꼽 만큼 주고서 산같이 많이 바랄 것이다. 그 바람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모두 부숴버릴 것이다. 그대가 기대하거나 바랄 때 상대는 그대가 잔재주를 부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상대가 그것을 말하든 안하든 그는 그대 처세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잔재주를 부릴 때마다 상대는 그것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송현: 선생님, 그 까닭은 영혼의 내적 요구에 거슬리기 때문입니까?
라즈니쉬: 당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대를 분리시킨다. 왜냐면 그대의 자유는 이미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요구하는 것은 어떤 것일지라도 그대를 죄악으로 몰아넣는다. 그때의 그대는 이미 신성함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도덕한 행위는 누군가를 수단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각각의 존재는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사랑은 그대로 하여금 그대 자신을 하나의 목적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대는 어떤 것에 기대를 걸고 마음을 설레며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송현: 그런 의미에서 탄트라는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라고 할 수 있겠군요.
라즈니쉬: 엇쭈. 내 앞에서 아는 척 하지 마라. 
송현: 죄송합니다. 선생님. 주의하겠습니다.
라즈니쉬: 탄트라는 사랑의 과학이다. 사랑의 요가이다. 사랑하라. 그러나 요구하기보다는 나누어 주라. 사랑하라. 그러나 그대의 사랑 속에 상대를 가두지는 말라. 사랑하라. 그러나 조심스레 성스러운 땅위를 걸어가라. 그대는 가장 높고 가장 순수하고 성스러운 사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으라. 불결한 것은 모두 사원 밖으로 내던져버려라. 한 사람을 사랑할 때 마치 그 사람을 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라. 그 이하가 되어서는 안된다. 결코 여자를 여자로만 여기면서 사랑하지 말라. 결코 남자를 남자로만 여기면서 사랑하지 말라. 왜냐면 만약 그대가 한 남자를 남자로만 여기며 사랑할 때, 그대의 사랑은 육욕의 배설 이외에는 그 무엇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여자를 여자로만 여기면서 사랑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하늘 높이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한 여자를 여신을 사랑 모시고 사랑하라.

송현: 선생님 말씀처럼 사랑하면 사랑이 예배가 될 것 같습니다.
라즈니쉬. 그렇다. 사랑이 예배가 된다. 탄트라에서는 여자를 사랑하려는 남자는 몇 달 동안 그 여자를 여신으로서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 여자 안에서 어머니로서의 여신을 눈앞에 뚜렷이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여신의 모습이 눈앞에 환히 나타나도 어떤 육욕도 솟아오르지 않으며 그 여자가 발가벗고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도 다만 성스러운 에너지로 고동칠 때, 여자라는 바로 그 형상은 신성한 것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념이 정지되며 오직 경의만을 느끼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사랑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그 여자가 여신이 될 때에야 사랑할 수 있다. 

송현: 선생님, 그 까닭은 그때에야 말로 사랑은 하늘 높이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인가요?
라즈니쉬: 그래. 그리고 그때에야 말로 사랑은 절정을 향해 점점 강하게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랑은 땅 위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속적인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의 육체가 부딪치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두 실존의 만남이다. 두 영혼이 만나 서로의 속으로 녹아 들어가 절대적인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혼자란 순수함을 뜻한다. 혼자란 그대는 단순히 그대일 뿐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뜻이다. 혼자란 그대가 백퍼센트 순금이라는 뜻이다. 사랑은 그대를 홀로 있게 한다. 고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대신 수수한 그대(aloneness)가 솟아오를 것이다. 고독이란 그대 자신이 따분하며 지치고 병든 상태를 말한다. 그대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가 그대 자신을 잊고 싶어 하는 상태를 뜻한다. 혼자란 그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기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상태를 뜻한다. 

송현: 선생님,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입니까?
라즈니쉬“ 그래. 그대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도 된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대는 그대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하여 바로 지금 그대 자신의 존재로부터 새로운 것이 솟아 넘쳐흐르게 된다. 그대는 그것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그대의 선물을 받아주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대는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송현: 선생님 대부분의 연인들은 사랑을 받아주면 고마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라즈니쉬: 당근. 그들은 에너지가 넘쳐 흘려 그 에너지를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꽂이 피어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갈 때 꽃은 바라에게 감사를 느낀다. 향기가 꽃 위에 점점 많이 쌓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향기는 오히려 무거운 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여인이 임신을 하고 열 달이 자났는데도 아직 아이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세상과 함께 그 아이를 나누어가지고 싶어진다.

송현: 선생님, 바로 이것이 탄생의 의미입니까?
라즈니쉬: 그래.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서 아기를 키워왔다. 아기는 다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아기를 담고 있기는 너무 힘이 달린다. 이제 사상과 아기를 나누어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는 이제 욕심을 더 부릴 수가 없다. 일단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게 되면 그 아기는 더 이상 어머니만의 아기가 아닌 것이다. 곧 아기는 멀리멀리 떠나버릴 것이다. 아기는 이 커다란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은 구름이 비가 되어 쏟아지려고 할 때에도 일어난다. 그리고 비가 쏟아질 때 구름은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행복해 하며 그것을 받아준 목마른 땅에게 감사를 느끼게 되는 젓이다.

송현: 선생님, 사랑의 형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라즈니쉬: 사랑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첫 번째 경우 그대는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는 욕구에서 상대방을 찾아간다. 두 번째 경우 그대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에는 그대는 무엇인가를 주려고 찾아 가는 것이다. 주는 사람은 한 사람의 제왕이다. 기억하라. 탄트라는 우리가 흔히 겪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육욕과 아무 관계가 없다. 탄트라는 육욕에서 사랑으로 굽이치는 가장 위대한 변형이다. 궁극의 탐구는 개인적인 것이다. 사랑은 그대를 개인으로 만든다. 만약 그것이 그대를 개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그것이 그대를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시킨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미움이 사랑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인체 하고 있지만 그 뒤에는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송현: 선생님, 이런 형태의 사랑은 개성을 파괴하겠는데요?
라즈니쉬: 파괴하고 말고! 그것은 그대를 땅으로 끌어내린다. 그대의 우아함을 더럽힌다. 그대를 진흙탕 속으로 쳐넣는다. 그리고 누구나 그가 어떤 더러운 오물을 끼얹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자유를 주어야야만 한다. 사랑은 그대를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푸른 자유의 하늘에서 멋대로 떠도는 구름이 되게 해야 한다. 사랑은 애착이 아니다. 그러나 육욕은 애착에서 비롯된다. 
송현: 그것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라즈니쉬: 명상과 사랑은 내가 말하고 있는 그 개성에 도달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이다. 그러나 그 둘은 매우 깊고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랑과 명상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만약 그대가 명상을 한다면 조만간에 사랑에 이를 것이다. 만약그대가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예전에 알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사랑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의 실존에 새로운 질이 나타나며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음을 느끼게 딜 것이다. 이제 그대는 새로운 불꽃이 되어 그것을 나누어 주고 싶어질 것이다. 만약 그대가 깊이 사랑한다면 곧 그대는 그대의 사랑이 더욱 더 명상적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미묘한 침묵이 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념들이 사라져 간다. 틈이 나타난다. 침묵. 그대는 그대 자신의 심연에 닿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송현: 선생님, 감사합니다. (www.songhy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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