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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니쉬: 그래, 나도 반갑다.
송현: 선생님, 섹스를 하고 나면 나른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라즈니쉬: 그대가 흘러넘칠 때마다, 그대가 나누어 줄 때마다 그대는 결코 피로라는 후유증을 모르게 된다. 사실 그대는 더욱더 싱싱하게 힘이 뻗어 나감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이 안정되고 편히 쉬게 된다. 그대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수도 있다. 그대는 그렇게 가벼워진다. 중력 같은 것은 사라진다. 그 기분은 그대가 새어 나가고 분산되고 에너지를 낭비할 때의 기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두 기분을 혼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일이다.
송현: 혼동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다릅니까?
라즈니쉬: 어떻게 그대가 기분을 혼동할 수 있겠는가. 그 기분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마음의 모든 기능은 혼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의심을 만들어 낸다. 의심이 존재할 수 있는 곳에 마음은 의심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유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수수깨끼를 만든다. 그때 그대는 물론 마음 그 자체에게 이렇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혼란을 풀어나갈 수 있을까?
송현: 선생님, 기분이 다르다는 것은 오르가슴으로 예를 들 수 있습니까?
라즈니쉬: 있고 말고! 만약 그대가 기계적으로 육체만 취하여 사랑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함께 나눔도 사랑도 없고 그저 기계적인 습관만이 일을 뿐이다. 어리석은 이유 때문에 성교를 한다면 그때 그대는 낭비만 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에너지만 그대에게 새어 나갈 뿐일 것이다.
송현: 그때 남는 것은 피로 밖에 없겠지요.
라즈니쉬: 거기다가 넘치는 충만감이 아니라 욕구 불만이 있을 뿐이다. 섹스 물결이 지나가면 그대는 힘이 용솟음치는 것이 아니라 나약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섹스한 후에 욕구 불만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섹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송현: 왜 그런지요? 선생님.
라즈니쉬: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상대를 사랑하고 게다가 그대가 흘러 넘쳐 그대의 에너지를 그 사람과 나누려 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전혀 성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대는 성에 대하여 어떤 관념도 갖지 않았다. 거기엔 그대의 마음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머리 속에서 계획하지 않는다. 예행연습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그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의 전달매체일 뿐이다. 그대는 무엇인가. 그대보다 위대하고 그대보다 높고 그대보다 큰 것에 의해서 지배받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새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대는 평화와 평정의 고요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 그대는 충만감을 얻게 된다. 바로 그것이 오르가슴이라는 것이다.
송현: 선생님께서는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은 오르가슴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지요?
라즈니쉬: 그래. 많은 사람들이 오르가슴 구경도 못하고 죽었다. 오르가슴에 이르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러한 오르가슴은 성교가 끝난 뒤에도 그대를 약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더 강하게 만들어 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교에 눈을 뜨면 그대는 성에 반대한다든지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옳고 진실하다든지 그래서 그대는 성자들이 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든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송현: 소위 성직자 내지 성자들은 성을 왜곡하고 은폐한 것이란 말씀이지요?
라즈니쉬: 그래. 그것은 내가 그 동안 수 없이 강조해 왔었다. 만약 그대가 오르가슴의 흐름으로 넘쳐 흘러 그 에너지를 그저 나기만 했다면 그대는 신에게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하나의 기도가 그대 안에서 솟아오르게 될 것이다. 그대는 더할 나위 없는 충만감으로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그대는 더할 나위 없는 충만감으로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나무나 기쁘고 줄거워서 그 순간 전 세계를 찬미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얼굴 그대의 몸 그대의 마음 모든 것이 고요함 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실존의 충만으로 하늘의 축복이 그대를 둘러싸게 될 것이다.
송현: 선생님, 이런 순간에 기도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라즈니쉬: 그래. 기도는 이와 갈은 순간에 솟아오른다. 감사도 이와 같은 순간에 솟아오른다. 사람은 이와 같은 순간에 종교적이 된다. 나에게 깊은 사랑의 오르가슴 속에서 종교가 솟아올랐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 있어서는 탄트라가 궁극의 종교요 마지막 언어로 남아 있다. 왜냐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지금껏 도달한 것 중에서 가장 놋은 일체성의 결정이며 거기에서 에고가 흩어져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하지만 그에겐 한계가 있다. 어떤 것에도 가로막히지 않고 흐름이 될 때 에너지가 굽이쳐 흘러서 그대 바로 수많 에너지 교차로의 중심이 될 때, 바로 그 에너지의 통로가 될 때 에고는 사라진다. 에고는 돌과 같이 매우 단단하다. 그러나 사랑 속에서는 에고의 돌맹이는 모두 녹아내린다.
송현: 선생님, 경전을 읽는 다는 것은 어떤 예술을 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라즈니쉬: 그럴 수 있다. 그것은 깊은 공감대 속에 낳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 손으로 신선한 미풍이 불어오는 것처럼 그대가 느낀다면 그대에게는 더 이상 먼지가 쌓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소설처럼 읽는다면 그대는 그것을 놓칠 것이다. 거기에는 중층의 깊이가 있다. 그래서 매일 반복해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다. 그대가 어떻게 반복하는가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반복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모를 때야 그것이 반복인 것이다.
송현: 선생님. 조금 연습을 해보면요?
라즈니쉬: 좋지. 그것을 3개월 동안 실험해 보라.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작은 책이라도 매일 읽어라. 그리그 그 책을 읽을 때 그대의 어제를 오늘에 개입시키지 말라. 아침 해가 떠 오르듯이 신선하게 다시 읽어 보라. 오늘 아침에 핀 꽃처럼 신선하게 읽어보라. 그대가 다만 흥분과 두근거림으로 경전을 펴고 다시 읽고 다시 노래하며 읽는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새로운 의미를 밝혀줄 것이다.
송현: 선생님. 그것은 어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까?
라즈니쉬: 없다. 그것은 오늘, 이 순간에 어떤 의미를 그대에게 부여해 준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어제를 개입시켜 읽는다면 그때에는 새로운 의미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이미 어떤 의미로 차 있다. 이 그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대는 자신이 이 책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게 되면 그대는 기계적으로 계속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다른 사념들로 계속 들끓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쓸모가 없다. 그런 것은 지루할 뿐이다. 그러나면 경전으로부터 신선한 기를 흡수할 수가 없다.
송현: 그럴 경우는 우둔하게 될 것 같은데요?
라즈니쉬: 그래. 우둔하게 될 것이다. 백 명의 종교인들 가운데 아흔 아홉이 우둔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지성은 예민하지 않고 멍청하다. 종교인들에게서 어리석지 않은 점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면 그들은 매일매일 의식적인 행사를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은 의식적인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같은 일의 반복 속에서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 들 수 있다.
송현: 사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라즈니쉬: 그래. 그대가 여인을 사랑을 하면 그 여인은 매일 매일 새롭게 보일 것이다. 경전을 읽는 것도 사랑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다른 의미로 들릴 때가 있다. 어떤 순간에 있어서는 같은 말인데도 다른 어떤 문맥에서는 그렇지 않은 의미가 나타난다. 의미란 그대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읽는 말의 뜻이 아닌 것이다. 그대가 경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 그것들이 그대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송현: 아하. 그렇고 보니 역시 읽는 사람의 태도가 아주 중요하군요. 선생님.
라즈니쉬: 물론 24시간 후에 그대는 보다 많은 경험을 쌓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루 전보다는 24시간 더 살았다. 사실 그대는 조금 전의 그대가 아니다. 경전 역시 마찬가지다. 24시간 후에 얼마나 많은 물이 갠지즈강으로 흘러 들어 갔겠는가?
송현: 맞습니다. 선생님.
라즈니쉬: 어느 날에는 그대 사랑은 기쁜 분위기 속에 있다. 다른 어느 날에는 슬픈 분위기 속에 있다. 어느 날의 그대는 넘쳐흐르고 다른 날에는 구두쇠 노릇을 한다. 다른 색깔과 다른 명암의 분위기 그 각각 다른 명암과 색깔의 변화 속에서 그대는 같은 책을 읽게 될 것이다. 되풀이 하고 또 되풀이 하면 경전은 수 백만 개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대는 수많은 길을 통해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수많은 문들 통해 그대는 의미를 가져 올 수 있다. 그 의미는 바로 그대의 것이다.
송현: 경전을 읽는 사람의 마음, 읽는 자세가 그토록 중요한 것을 알겠습니다. 선생님.
라즈니쉬: 어느 날 그대의 마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하였을 때 그대는 그냥 흐름을 따르게 된다. 내가 마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대의 과거를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뜻이다. 마음이 곧 과거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과거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읽고 들을 수 있다면 그때는 이미 그대의 독서는 하나의 명상일 것이다.
송현: 독서가 명상이 된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라즈니쉬: 그렇다. 독서는 보람찬 것이다. 그러나 대개 독서는 오히려 해가 되고 있다. 왜냐면 책을 대하는 그대의 태도가 그대에게 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순히 긁어모으려고만 한다. 죽어 있는 사실들을 계속 긁어모은다. 그대는 쓰레기통이 되어 버린다. 좋게 말하면 백과사전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대는 내적인 일관성과 내적인 음율 그리고 내적인 조화를 잃어버린다. 그대는 많은 소리가 있으나 어떤 일치감도 찾아볼 수 없다. 군중이 된다. 통합이 아니라 분해된 인간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송현: 선생님, 그러고 보니 제일 먼저 제가 이해할 것은 올바른 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군요.
라즈니쉬: 그렇다. 삶은 모험이다. 대단한 용기와 배짱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은 근본적으로 시행착오인 것이다. 올바른 길을 찾을 때까지 사람은 몇 번이고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집을 짓다가 다른 무엇인가에 이끌려 도중에서 그것을 그만두고 또 다른 집을 짓고 있는 것과 갈다. 그러면 그대는 또 다른 무엇인가에 한눈을 팔고 있다. 그러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처럼 될 것이다. 집은 결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어디엔가 정주하지 않으면 안 다. 숙명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에게 용기만 있다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송현: 선생님, 많은 가르침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라즈니쉬: 그래야 한다. 여행은 계속된다. 그 여행은 그대가 "그래 나는 도착했다. 이제 더 이상 어느 곳에도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서야 그대는 휴식을 취할 수 있다.그리고 거기에서 참된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해 왔건 그것은 단순히 이곳저곳으로 떠돌아 다녔던 것에 불과하다. 여행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그 여행의 목표는 아닌 것이다. 그대는 여행에 의해서 풍부해졌다. 그대는 수많은 가르침 앞에 존재를 열어 놓음으로 해서 풍부하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대는 수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행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수많은 가르침을 찾고 또 찾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그대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송현: 감사합니다. 선생님(www.songhy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