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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에서 살굿빛 미소를 머금은 여인"

수채화 가득한 <박종규의 글 세상> 눈으로 들리는 소리

박종규 에세이스트 | 기사입력 2009/06/30 [23:41]
산치르 라는 화가가 레닌그라드에서 명성이 높은 스승으로부터 사사(私事)를 받을 때였다. 스승은 흰 캔버스에다 흰 물감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다.
 
머리를 갸웃거리던 산치르는 흰 물감과 캔버스를 가지고 나가 굽이치는 능선 사이로 흐르는 물이며, 드문드문 물가에 서있는 미루나무를 바라보다가 스승의 말대로 흰 물감만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 나갔다.
 
흰 캔버스에 흰 물감으로 그린 풍경화는 자신이 보아도 붓 자국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캔버스를 받아 살피던 스승은 호통을 쳤다. 무슨 그림에 색깔이 없느냐고……. 산치르는 묵묵히 되돌아 가 다시 그렸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도 스승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삼세번이 그들에게도 통하는지, 세 번째 그림을 본 스승은 표정이 풀렸다.
 
    
   ▲ 화가 산치르 
 

“맞아! 이제 색깔이 보이는군. 이 냇물 흐르는 소리까지 들리지 않는가!” 그는 나의 초청에 응해 우리나라에 왔고, 내게도 흰 색깔만 사용한 그림을 한 점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어렵게 흰 그림을 받아냈다. 그림의 제목은‘여인’이었으나 불행히도 나는 그의 그림 속에서 어떤 여인의 모습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가 떠나고 몇 개월 뒤, 무심코 산치르(namkaistern sanchir)가 남긴 그림을 바라보던 나는 그림 속에서 살굿빛 미소를 머금은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색깔을 읽어냈던 것이다. 감각의 극에 다다르면 무채색에서 색깔이 드러나고 냇물 그림에서 물 흐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일까. 정말 예술의 세계는 오묘했다.   

“소리를 눈으로 들려주세요.”
   
내가 장애인 대학에서 강의할 때 들었던 여학생의 말이다.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장애가 있으면서도 이 학생은 항상 밝은 모습이었고, 비장애인들보다 오히려 학습능력이 뛰어났다. 소리를 눈으로 듣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나는 이 학생을 만나고 나서 베토벤을 떠올렸다. 베토벤도 혹 소리를 눈으로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화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다.
 
비장애인들에게는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수화야말로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오감이 들어 있는 감각언어였다. 그들의 수화에는 소리까지 담겨 있으니 말이다. 수화는 소리를 눈으로 들려주는 또 다른 청각보조기관이지만 수많은 소리를 담아내기에는 그 영역의 한계가 너무 좁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소리가 있을까. 모든 사물은 각기 나름대로의 소리를 갖고 있을뿐더러 보이지 않는 바람까지 별별 소리를 다 만들어 낸다. 그래서 소리는 세상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대자연의 호흡인 셈이다.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가지게 되면 사람들을 흥겹게 하고, 사람들의 감정에 불을 지펴 격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의 온갖 소리는 알게 모르게 삶에 깊이 간여하고 있다.
   
이따금 맞닥뜨리는 짧은 적막의 순간에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소리가 나고,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징표인 것 같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간단하게 귀를 막음으로써 체험할 수가 있지만, 귀를 막은 상태로 하루, 이틀을 지나 10년, 20년을 보낸다는 상상을 해 보면 비로소 청각장애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질지도 모르겠다.
 
청각 장애가 없는 대부분 사람들은 소리 속에 묻혀 살기 때문에 주변이 조용해질 때에야 비로소 소리들 속에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소음공해에 찌든 비장애인들이 이따금 소리가 없는 세상을 동경하면서도 소리를 모르고 태어난 사람들을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이냐고 안타까워한다. 그들은 세상의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사는 것일까 하고.
   
애초부터 소리의 세계를 모르고 태어난 청각장애인들에게 소리란 어떤 존재일까. 처음부터 몰랐던 것, 장애인들에게 소리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파도가 밀려와 바위섬에 부딪히면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만 있고, 그 부서지는 소리는 없는 것. 갈매기는 이따금 씩 부리를 벌리며 하릴없이 바다 위를 날고 있고, 갈매기가 울더라도 그것은 표정없는 갈매기 부리의 움직임일 따름이 아닐까.
   
청각장애인들에게 소리일 수 있는 감각은 오로지‘울림’일 것이다. 대지에 내리는 비는 지붕에도 내리고, 낙숫물이 되어 떨어지면서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지만, 그것도 형상만이 이미지로 전달될 뿐, 그래서 애초부터 없었던 것, 그것이 소리라는 명명으로 있건 간에 그 소리에 대한 그리움도, 아쉬움도,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까지도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우려를 도리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소리의 세계는 단지 모르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생활 방식이 대부분 비장애인 위주라는 점이 아닐까.
 
이런 양자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은 청각장애인들이 원하는 대로 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소리를 눈으로 들려주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비장애인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일까.
   
문제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참은 아니라는데 있다. 세상의 진리는 뜻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이 많아서 청각장애인들의 세상살이가 더욱 버거울지 모른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학생은 말했다. 소리를 눈으로 들려달라고.
 
소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말이다. 더구나 눈을 뜨고도 못 보는 것들이 많은 세상인데. 다만 비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이 다르다면, 저들은 눈이 안 보여서 볼 수 없고, 비장애인들은 눈이 보여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붓을 든 비장애인들은 흰 그림을 장애인들에게 줄 수 있으나, 그 그림에서는 색깔이 보이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박종규는 삶의 다원적 변수를 운치와 여운의 하모니 가득한 관용하에 삶의 동일체로 이끄는 심플리스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 그의 수필은 가히 생명의 빛이라 할 수 있다.   
삶의 무게 진솔하게 풀어내는 1949년 진도생의 박종규 작가는

 
14세에 이미 원고지 2,000매를 써 문학의 길을 예비했지만 서울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한 미술학도였다. 그 원고지가 ‘주앙마잘’ 이라는 소설로 태어난 것이 1995년, 글이 잉태된 지 32년만이었다.

2001년에는 의문사를 다룬 2부작 장편소설 ‘파란비’를 출간하여 추리적 기법과 반전의 묘로 화제를 모았다.

2007년 발간된 에세이집 ‘바다칸타타’는 독특한 편집과 이벤트성 퍼포먼스로 수필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표지가 없이 출간된 책, 들려주는 낭독수필집, ‘수필계의 게릴라’ 외에도 휴머니티를 실천하는 작가라는 평에 걸맞게 문화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벌리는 퍼포먼스는 한 작가의 역량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국립군산대학에서 광고디자인을 강의하는 그는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며, 에세이스트문학회장을 역임했고, 문학동인 글숲을 이끌고 있다. 

pparao1@hanmail.net,
blog.naver.com/badacant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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