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70세 생일 파티상
그녀는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상을 받는 특별한 생일파티를 연다. 70평생 열심히 산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돋보이게 기획했다. ‘떡 장사에서 미국 회계사로’의 머리말에는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굴절되거나 좌절하기에. 그러나 의지만 있으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꿈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어느 덧 꿈은 이루어진다.’ 그녀는 해방되기 전, 1939년에 태어났다. 6.25전쟁을 몸으로 때웠다. 폐허 속의 굶주림과 절망이 그대로 그녀의 몸에 남아있었다. 그녀는 나이 60살을 넘기면서 문득 ‘나라도 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꿈을 70세 생일날에 펼쳤다.
그녀의 독특한 첫인상에 놀랐다. ‘70세 생일이라니요? 정말 70살이 맞나요?’라는 눈에 비쳐지는 그녀의 젊은 모습은 황당했다. 재차 확인했다. ‘아니? 그렇다면 한국나이로는 71세인 나이. 정말이세요? 무슨 비결?’ 진심으로 캐보았다. ‘비결이라 할 것까지는 없지만, 지금까지 전문직업인으로 사회생활을 했다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젊은이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저절로 생각과 취향이 젊어져요.’
식모살이땐 생쌀 훔쳐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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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내용을 책에 가장 많이 담았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부모 밑에서, 천덕꾸러기 딸로 자랐어요. 어중간히 끼인 서열이라서 형제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했지요. 8살에는 광주의 한 가정집으로 식모살이로 보내졌어요. 너무 배가 고파 생쌀을 훔쳐 먹다가 들켜서 혼난 적도 많아요. 하루는 마늘밭을 매다가 마늘 대를 부러뜨렸는데, 주인아주머니에게 종아리에 피가 흐를 정도로 맞았어요. 이 광경을 지켜 본 옆집 아주머니가 ‘너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어서 도망가!’라는 말에 정신없이 도망간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엄마의 쌀쌀함에 애어른으로
어린 그녀는 8살부터 10살까지 세 집을 전전하면서 남의 집 식모살이를 이어갔다. 식모살이하던 중에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어 주인집의 쌀을 훔쳐서 고향 기차 값을 마련했다. 그리운 고향집에 달려오면 “왜 왔니? 네가 집에 오면 다들 어려워져. 너는 어찌 그리 네 생각만 하니?” 어머니의 쌀쌀한 목소리를 그녀는 기억했다. 어린 소녀는 그 충격으로 갑자기 어른으로 변해 버렸다. 철이 너무 일찍 든 애 어른이 되어 철없는 유년시절을 잊어버렸다. 이런 어찌하지 못하는 생활에서 어린 소녀는 자연스레 생존의 법칙을 일찍 터득해 버렸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눈에 익힌 것은 배고픔을 극복하는 인내심이었다. 너무나 배가고파도 쌀을 얻어서 모았다. 그 쌀을 집으로 가져가봤자 곧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자신만의 법칙을 적용했다. 그래서 모여진 쌀을 몇 개 안되는 껌과 사탕으로 바꿨다. 이 물건을 여러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에게 팔았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은 쌀을 집에서 가지고 나와서 껌과 사탕으로 바꾸었다. 예상대로 쌀값보다 많은 돈이 모여졌다. 그 당시에 시골에서는 껌과 사탕은 좀처럼 보지 못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시나리오가 연출된다. 영화에서나 그려질 수 있는 민망한 장면이다. 그 옛날에는 껌을 혼자서만 씹지 않았다. 한 아이가 껌을 씹다가 다른 아이가 씹었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껌을 씹었다. 그러다가 저녁에는 벽에다 시꺼먼 껌을 붙여 놓았다가, 다음 날 아침 다시 씹곤 하였다. 더러는 잠자리에서 머리맡에 잘못 붙여놓았다가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머리를 잘라내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장사의 재미를 알게 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어린 그녀는 그때부터 집안의 가장노릇을 했다. 장사에 재미를 쏠쏠 붙일 무렵 6.25 전쟁이 터졌다. 껌을 사기위해 아이들이 가지고 나온 찹쌀만을 따로 모았다. 그녀의 껌과 사탕 바구니 장사에서 몇 개월 뒤에는 떡 장사로 바뀌었다. 모여진 찹쌀로 떡을 만들어서 팔았다. 장성역 열차 승객들 다리사이로 어린 그녀는 빠져다니면서 떡을 팔았다. 그러면서 서울로의 상경을 꿈꾸었다. 드디어 의정부에 사는 사촌오빠의 세탁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세탁소에는 인근 미군부대의 군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그러는 도중 한 미군의 프러포즈를 받아 결혼을 결심했다. 그 시절만 해도 미군과의 결혼이란 집안의 커다란 수치로 여겼다. 그녀는 셋째 오빠의 따귀까지 맞으면서 1960년 결혼식을 올렸다. 2년 뒤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혼자라는 불안은 잠시일 뿐 공부에 한이 맺힌 그녀에게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신천지였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던 그녀에게는 공부는 꿀맛이었다.
공부 꿀맛에 파묻힌 미국생활
공부에 파묻혀 있다가도 그리운 가족생각에 눈물로 지새웠다. 그러나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다. 한글의 읽기만을 간신히 익혔던 그녀에게는 편지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각박한 미국생활이 그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직업군인으로 한국에 다시 들어갔지만 그녀는 미국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현실에 너무나 기뻐서 유년시절에 누리지 못한 한을 풀고 또 풀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미국생활 동안, 시댁 어른들과 잘 지냈다. 공부에 전념하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전혀 인종차별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동양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아 그녀를 친절하게 대했다. 그녀의 마음에는 늘 공부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귀국한 그녀의 남편은 꿈과 야망이 없었다. 그녀와는 현저하게 달랐다. 그녀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그녀 스스로가 남의 나라에서 홀로서는 생활을 자청했다. 더욱이 가족들에게 편지 한장 전하지 못하는 삭막한 미국생활을 그녀는 스스로 지탱해야 했다. 삶이 고달파도 누구에게 하소연 할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에 온몸을 떨었다. 고국이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그녀는 책을 끼고 살았다. 그러다가 멀리 떨어진 마을에 처음으로 한국인을 만났다. 한글을 배웠다. 그러다가 지금의 미국인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메릴랜드 주립대 칼리지파크 캠퍼스로 편입해 회계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는 날 그녀는 학교 앞 호숫가에서 기쁨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드디어 전문직업인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잘 살면 살수록 고향생각에 흘린 눈물로 그녀는 더욱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녀의 화려한 변신에 그녀는 스스로 칭찬했다.
sungae.kim@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