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가의 잔인·폭력성 논란이 고개를 들었다. 배우 원빈의 주연으로 많은 여성관객을 동원한 ‘아저씨’는 장기매매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장기를 모두 꺼낸 시체가 등장하고 눈알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등 눈뜨고 보기 힘든 장면들이 이어졌다. 이보다 한층 더 자극적인 영화는 ‘악마를 보았다’다. ‘악마를 보았다’의 피칠갑 정도는 두 차례의 제한상영가 판정이라는 전적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어 개봉을 앞두고 있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미 ‘칸 영화제’에서 선공개돼 외국 관객들로부터 ‘지나친 폭력’, ‘한국 여자들은 모두 맞고 사느냐’ 등의 반응을 얻은 바 있다. ‘죽이고 싶은’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두 남자의 복수극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폭력성과 복수심 등을 다뤘다. 이들 영화는 하나같이 19세 미만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성인 관객들마저 영화의 폭력 정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영화를 보던 도중 관객들이 스크린에 낭자한 피 등 잔인한 장면들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경우가 빈번했다. 아울러 범죄 장면의 생생한 묘사로 모방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편집자주>
줄이은 고어무비 “그들만의 공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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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여름 극장가 “싸늘한 공포보단 아찔한 고어”
‘아저씨’ ‘악마를’ ‘김복남’ 등 스크린에 핏빛 낭자
눈 뜨고 보기 힘든 연쇄 살인, 사회적 문제 지적
관객 부담 고려, 아이러니한 웃음코드 곳곳 배치
매해 여름 극장가에는 무더위를 날린다는 명목하에 호러 영화들이 대거 등장해왔다. 올 여름 극장가는 기존 호러물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도 높은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해 관객의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이들 영화는 상영도중 관객이 자리를 뜨는 등 국산 상업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반응이 쏟아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금은 고어시대
최근 3주간 박스오피스에 희소식이 불어왔다. 선두는 물론 그에 바짝 따라붙은 2위까지 국산영화들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세계적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셉션’과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이 돋보이는 ‘솔트’,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토이스토리3’ 등을 제치고 얻은 쾌거다. 국산 영화의 선전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지만, 개봉과 동시에 선두로 올라선 영화를 향한 국내 영화 팬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최근 연달아 개봉한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이하 ‘악마를’)는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선두그룹에 속했다. 이들 영화의 놀라운 인기 비결은 정신이 아찔할 만큼 붉은 ‘피’다. 연쇄 살인이 스토리의 주축으로 등장하는 이들 영화는 2시간여 러닝타임 내내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살인 사건으로 관객의 혼을 빼놓고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이 개봉을 앞두고 있어 극장가의 피바람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아저씨’·‘악마를’·‘김복남’으로 이어지는 고어무비(gore movie·호러 영화의 일종으로 그 잔인함의 정도가 진함. 전기톱 등으로 사람을 절단하거나 피가 사방으로 튀는 장면들이 등장함)의 향연은 국내 극장가에서는 이례적이다. 그간 ‘살인의 추억’·‘추격자’·‘검은집’ 등 사이코패스가 소재로 등장한 영화는 있었지만 올 여름처럼 연달아 개봉을 한 것은 처음이다.
고어물의 시대를 새롭게 연 ‘아저씨’·‘악마를’ 그리고 개봉을 앞두고 있는 ‘김복남’ 등은 마치 사전 합의라도 거친 듯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각기 다른 색깔과 필모그래피를 가진 세 작품의 감독들은 하나같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기존작과 차별화를 위해 ‘좀더 끔찍하게, 좀더 잔인하게’를 영화 전반에 심었지만, 상업 영화라는 기본 틀은 잊지 않았다. 마니아층을 공략하기 위한 센 장면들 곳곳에 대다수 관객을 위한 숨구멍을 준비해 대중성의 가미를 꾀했다.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소재로 활용된 사이코패스는 더 이상 관객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요소로 활용되지 않는다. 최근 고어물에서 사이코패스는 단순 장치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의 무차별적인 살인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혹은 충격적으로 묘사했는가가 관건이다. 경쟁적으로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고어물들은 19세이상 관람가 등급으로 개봉했지만, 성인 관객들조차 러닝타임을 버티는 것이 고역인 수준에 달했다.
적자생존의 법칙
특히 ‘악마를’은 피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을 손에 꼽아야 할 정도로 선혈이 낭자하다. 영화의 피칠갑은 초반 5분이 채 되기도 전, 무자비한 폭행에서 시작해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고집스럽게 이어진다. 사이코패스인 연쇄 살인범 경철(최민식 분)은 젊은 여성뿐만 아니라 택시기사, 자신을 치료해 준 의사, 약사 등을 끊임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대로 그와 눈이 마주친 인물 대부분이 사냥감이 되는 식이다.
‘악마를’의 폭력성은 경철을 쫓는 수현(이병헌 분)의 복수극에서 한층 더 짙어진다. 총·칼·돌 등 일반적인(?) 도구는 물론이고, 낚싯대·드라이버 등 카메라 앵글 안에 놓인 모든 소품들이 고문 도구로 활용된다. ‘죽기 전까지만’이라는 공식에 따르는 수현의 복수극은 경철의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에서 시작해 아킬레스건 절단 등 그 잔인함이 기존 어떤 작품과도 비할 수 없는 수준이다.
피칠갑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아저씨’와 ‘김복남’도 ‘악마를’ 못지않다. ‘아저씨’의 피칠갑은 굵고 짧다. 세상과 등지고 살던 전직 요원 태식(원빈 분)은 하나뿐인 친구 소미(김새론 분)의 구출을 위해 벌이는 추격전의 막바지에 정점을 찍는 ‘아저씨’는 최후의 총격전에서 스크린이 붉은 빛으로 물든다. 누구의 피인지도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흩어진 피는 총격전이 벌어진 공간의 흰 벽과 대비돼 어지럼증을 선사한다.
‘김복남’은 남성성이 짙은 고어물에 여성을 전면에 내세워 충격을 더했다. 소처럼 일하던 섬아낙 복남(서영희 분)이 딸의 죽음을 계기로 실성해 휘두르는 것은 우리네 시골집 벽에 흔히 걸려 있는 낫이다. 그녀의 광기어린 낫질은 쇠망치와 부엌칼 등으로 옮겨가 온 섬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입봉감독의 패기답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난도질을 하는 복남의 앞으로 다가가 사방으로 튀는 선혈을 그대로 맞는 과감한 시도도 불사했다.
그들의 티켓파워
최근 고어무비의 또 다른 공식은 극장가의 절대불변의 흥행비결인 배우의 티켓파워다. 2번에 걸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던 ‘악마를 보았다’의 주연은 최민식과 이병헌이다. 제한상영가 판정은 분명 개봉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들 만큼 위협적인 고비지만, 대다수 영화팬은 ‘악마를’의 개봉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최민식과 이병헌이 출연한 영화니까.
개봉 전날, 언론 시사 후 ‘악마를’의 수위에 관한 솔직한 평들이 온·오프라인에 쏟아졌다. 국내 정서에 맞지 않는 무리한 시도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음에도 ‘악마를’은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2위로 화려하게 출발했다. 입소문이 무엇보다 큰 홍보 전략인 극장가에 ‘영화 중간에 속이 안 좋아 뛰쳐나왔다’, ‘여자친구와 같이 본 후 크게 싸웠다’,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봤다’ 등 충격적인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티켓은 매진 행렬 중이다.
티켓파워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것은 단연 ‘아저씨’다. ‘꽃미남 배우 원빈의 재발견’이라는 노골적인 홍보문구를 내세운 ‘아저씨’는 그들의 바람대로 원빈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원빈과 상반된 이미지인 아저씨를 연결시켜 그의 후광을 한층 강조했고, 여성의 로망 블랙수트에 이어 매끈한 액션까지 관객몰이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관객들은 상반신을 노출하고 직접 삭발하는 원빈의 눈빛을 만나기 위해, 영화 곳곳의 소름 끼치는 잔인함을 견뎌낸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김복남’은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 부천국제영화제 3관왕 등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상이력은 관객몰이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관객들이 ‘김복남’에 시선을 보내는 이유는 그 중심에 있는 배우 서영희다. 영화 ‘추격자’, 드라마 ‘선덕여왕’ 등을 통해 연기 잘하는 배우로 눈길을 끈 서영희의 핏빛 복수극은 그 이름 석 자만으로 관객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작지만 큰 배려
상업 영화의 딜레마이자 그들의 생명줄인 관객은 괴팍하면서도 섬세한 존재다. 폭력성으로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적당한 폭력 묘사는 ‘어설프다’고 지적하고, 신랄한 묘사는 ‘불편하다’고 울상을 짓는다. 피칠갑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악마를’, ‘아저씨’, ‘김복남’ 등은 고어물 특유의 요소들을 살려 마니아층의 입맛을 맞추되 대다수 관객을 위한 휴식 코너를 곳곳에 배치했다.
이 같은 배려가 인상적인 것은 ‘악마를’이다. 연출을 맡은 김지운 감독은 스릴러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지만, 기존의 장점은 유지시키고자 노력했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서 감독 특유의 매력적인 요소로 인정받은 김지운식 유머는 코믹을 전면에 드러낸 ‘반칙왕’, 숨은 그림 찾기처럼 배치한 ‘놈놈놈’으로 조율 과정을 거쳐 ‘악마를’에서 완성됐다. 끔찍한 연쇄 살인마 경철의 대사에서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오는 웃음은 관객의 불편한 속을 다독인다.
연일 호평과 매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아저씨’는 후반부 고어적인 총격신은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장기매매·마약·개미굴·인신매매 등 자극적이고 폭력성 짙은 장치들을 ‘감성 액션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로 포장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상대와의 만남에서 자신을 ‘옆집 아저씨’라고 소개하는 태식의 어이없는 대답은 예기치 못한 웃음을 유발한다. 태식과 소미의 우정은 영화 ‘레옹’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순수함으로 관객의 감성을 뒤흔들었다.
이에 반해 ‘김복남’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웃음 포인트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입봉감독의 미숙함 혹은 노련함으로 웃음을 의도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웃음 포인트가 김복남이 핏빛 복수를 시작하면서 줄기차게 등장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하세요”를 연상시키는 김복남의 촌철살인과 같은 대사들, 복수에 눈이 먼 복남의 반복되는 살인은 가슴이 아프지만 툭하고 웃음이 튀어나오는 아이러니한 부분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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