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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명당 나주금성산 금성대왕(錦城大王)

노병한의 ′풍수르포 시리즈′ 명당산책-24

노병한 풍수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1/11/23 [21:10]
◆ 민족의 성산(聖山)이자 민간신앙의 중심지였던 나주의 금성산(錦城山)

고려시대에 전국의 7대 명산 또는 11대 명산 중의 하나가 금성산(錦城山)이다. 금성산은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나주의 진산(鎭山)이다. 금성산의 높이는 451m이며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면의 봉우리는 노적봉(露積峰), 서쪽면의 봉우리는 오도봉(悟道峰), 남쪽면의 봉우리는 다복봉(多福峰), 북쪽면의 봉우리는 정녕봉(定寧峰)이다. 나주시의 서북쪽 능선을 구성하고 있는 금성산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최고 명당이 숨겨있다고 소문난 산이다. 아울러 금성산은 역사적으로 대형 사건들과 관계가 있었던 명산이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산이다.

동학농민전쟁 때에 동학군은 호남의 53개 고을을 점령해 집강소를 설치하고 나주를 접수하려고 금성산의 기슭에 진을 치고 나주성(城)을 공격했으나 금성산성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관민에게 실패했다. 전봉준은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고, 동학군들은 나주초등학교에서 처형되었다. 이와 같이 금성산은 나주를 지키는 진산이었기에, 역사적으로 나주를 공략하여 접수하지 못하면 언제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했던 요충지였다.

한편 금성산은 나주를 빛낸 큰 인물들의 탯 자리였다. 금성산이 낳은 역사의 인물로는 고려 태조왕건의 둘째 부인인 장화왕후를 낳았다. 장화왕후의 소생으로 흥룡동에서 고려2대 혜종을 낳았다. 또 조선 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신숙주는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태생이고, 임란 의병장 김천일 선생은 흥룡동 태생으로 이들은 금성산의 정기와 지기를 받고 태어나 금성산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키웠음이다.

전라남도 담양군의 추월산에서 빗재로 내려오다가 장성군의 삼계면 고성산, 깃재, 태청산을 거쳐서 함평군 월야면 월악산으로 내려와 광주광역시의 광산구 대산동의 대봉, 망산, 옥산을 거쳐 온 힘을 다해 금성산으로 다시 머리를 쳐든 산의 용(龍)맥이 남쪽으로 다시 내려와 영산강의 대강수(大江水)인 물을 마시기 위해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음이다.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주는 금성산(錦城山)을 등지고 영산강을 두르고 있어 도읍의 지세가 한양(서울)과 비슷하기 때문에 옛 부터 이름난 인물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나주를 ‘작은 한양(서울)’이라는 의미에서 소경(小京)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금성산은 옛 부터 영산강과 함께 나주의 상징이었다.

◆ 영험한 금성산신(錦城山神)인 금성대왕께 올렸던 금성당제(錦城堂祭)

역사적으로 금성산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태조 왕건은 고려건국의 확실한 토대가 되었던 나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금성산신(山神)을 호국백(護國白)으로 봉했다.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이 몽진(1011년)하여 금성산신(山神)에 의지하였고, 삼별초까지 물리치게 되자 고려 왕실은 금성산신(山神)을 더욱 신뢰했다. 이와 관련해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충렬왕 3년(1277년)에 금성산의 산신(山神)이 무녀(巫女)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진도와 탐라에 있던 삼별초군을 토벌할 때 신통력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는데 장병들만 상을 주고 자신(금성산신)을 빼놓은 것은 잘못된 것이니 나에게도 정녕공(定寧公)이라는 봉작을 주어야 한다고 했단다. 만일 내 말을 거역하면 큰 재앙(災殃)을 내릴 것이다."라고 주장을 했단다.

그래서 나주사람 보문각 대제인 정가신이 "충렬왕에게 건의하여 정녕공의 작호를 내리고 나주 녹미(祿米)중에서 5석을 사당에 주었고 또 봄과 가을에 왕이 향과 축문, 돈, 비단을 내려서 제사를 지내게 했음이다. 조선왕조에서도 전례에 따라 봄과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금성산산신은 왕건이 견훤과 나주에서 격전하다가 한때 패하여 영산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강에 물이 가득 차서 건널 수가 없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데 금성산산신이 현몽하여 "무엇하고 있느냐? 물이 빠졌으니 빨리 강을 건너라"하여 잠에서 깨어나 강을 바라보니 강물이 빠져있었으므로 진군을 수습하여 강을 건너니 견훤의 부대가 공격했으나 강물이 다시 가득하여 견훤부대는 바라만 볼뿐 공격하지 못했다 한다. 그래서 이곳을 후세의 사람들은 몽탄(夢灘)강(江)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금성산은 고려시대 충렬왕이후 조선시대까지 왕실에서 제수용품을 직접 내려 국가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며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던 명산이다. 이렇게 금성산은 국가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영산(靈山)으로서 매년 봄과 가을이면 나주뿐만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1년의 풍년과 태평함을 기원하였던 명산 중의 명산이다. 이 금성산에 신(神)이 내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 금성당제다. 그래서였을까? 금성산에는 민간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산신을 모시는 5개의 금성당(錦城堂)을 두었고, 이곳에서 국가가 제사를 지냈음이기에 금성당제(錦城堂祭)라 불렀다. 현재는 비록 소실되어 없어졌지만 산의 정상에는 상실사(上室祠), 산의 중턱에는 중실사(中室祠), 산의 기슭에는 하실사(下室祠)와 국제사(國際祠)가 있었고, 성(城)안에 산신을 모시는 이조당(爾朝堂)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금성산신(山神)이 당시에 얼마나 영험하고 신령스러웠던가를 가늠케 해주는 좋은 증거다. 5곳의 사당인 금성당제(錦城堂祭)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곳이 이조당(爾朝堂)이었다. 이조당(爾朝堂)이 있던 곳은 지금도 ‘명당(明堂)거리’라 불리고 있다. 그곳을 기억하는 나이 많은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조당(爾朝堂)은 1평 남짓한 건물로 하얗고 반질반질한 돌(石)이 신체(神體)로 놓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곳 금성산의 산신명호(名號)는 금성대왕(錦城大王)이다.

그래서 금성산의 주변은 요즘도 기도발이 좋기로 유명해 전국 각처에서 치성(致誠)을 드리기 위해 도학자나 무속인 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도명당이자 예언명당 중의 한 곳이다. 그래서 일까? ‘나주(羅州)의 율리아’, 일명 ‘나주(羅州)의 줄리아’라고 불리는 성모(聖母)가 응신(應神)한 인물이 척척 예언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정호선 전(前) 국회의원이 어느 날 점심자리에서 필자에게 들려준 기억이 난다. 호남의 민심(民心)을 얻으려는 자나, 또는 예언력과 예지력을 높이려는 자는 금성산에 가서 산의 지기(地氣)도 받고 소원성취를 한번쯤 빌어 봄은 어떨까? 덧붙여 필자가 2011년11월25일 오후6시에 청평호반을 품고있는 호명산 자락에서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갖는다는 초청을 받았다. 한번 가서 산수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하고 , 미래현상에 한번 취해본 후에 기회가 있으면 정리해서 '브레이크뉴스' 독자분들에게도 전할 기회가 있기를 소망해 본다.    
nbh1010@naver.com

□글 : 노병한 〈자연사상칼럼니스트, 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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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경희대에서 행정학석사학위, 단국대에서 행정학박사학위, 러시아극동연구소에서 명예정치학박사학위 수위함. 서울시공무원교육원, 서일대, 명지대, 경기대, 대불대, 단국대, 전남대 등에서 초빙교수역임, 동방대학원대학교의 석사&박사과정 주임교수역임, 건설기계안전기술원장, 경주관광개발공사와 고속도로관리공단 상임감사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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