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회화의 선구자 <힐마 아프 클린트 Hilma af Klint> 전시회
" 힐마 아프 클린트는 100년전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미래는 지금이다. "
“it could be said that over a hundred years ago,Hilma af Klint painted for the future. And the future is now”. - 전시회의 큐레이터, 아이리스 뮐러 - 베스터
(Iris Müller-Westermann)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
아직은 낯설고 생소하기만 한 어느 여류 작가의 이름이다. 이 작가를 말할 때는 꼭 클림트가 아니라고 전언을 해야만 할 정도로 무명의 작가이다. 아니 지금 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보고 소름이 돋을정도의 충격과 전율을 맛본 지금은 차라리 ‘클린트’를 ‘클림트’와 비교하는 것 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다.
바르셀로나에서 말라가로 향했다.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는 작년 2013년 4월에 이은 두 번째 방문으로이제 제법 익숙하기 까지 하다. 사실 반나절 이상 달려야 하는 해외의 어는 곳을 일년에 두 번 정도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꽃보다 중년’의 두 중년은 작년에 왔던 그 공항과 그 길을 따라 숙소로 향하며 익숙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바르셀로나나 암스테르담에 내릴 때와는 사뭇 다른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말라가에서의 일정도 그리 녹록하지가 않았다.
피카소 생가박물관과 피카소 뮤지엄, 티센뮤지엄과 MIM이라는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전시를 위한 전시장 방문 등 단 이틀 만에 만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에는 그 중에서도 말라가 피카소뮤지엄에서 전시를 하고 있던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라는 여류 작가의 전시를 본 감회와 그녀의 작품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사실 말라가 피카소뮤지엄을 방문하게 된 계기는 그곳에서 지난 가을에 전시를 했던 ‘피카소 가족앨범(Picasso Family Album)’이라는 전시의 여러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미 2013년 가을예술의 전당에서 ‘피카소, 고향으로부터의 방문’ 전 당시 말라가 피카소박물관 관장을 초청하여 앞으로의 여러 가지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 일련의 진행 절차 중 하나였던 것이다.
| ▲ 말라가피카소뮤지엄의 힐마 아프 클린트 전시 © 강욱 기자 | |
우리 ‘꽃중년’은 좋은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기왕에 다시 한번 피카소의 작품들을 관람하기를 원했으나 관장은 그 보다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획전을 볼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힐마아프 클린트’라는 전시가 이번 주에 끝나게 되니 한번 보라는 것이다.
전시장을 들어 섰을 때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리 꽃중년은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 없이 작품을 훓고 지나갔다. 때로는 세밀화를 통해 꽃술 하나 하나 풀잎 하나 하나를 그려 나간 작품과 책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다양한 소품과 200호 이상 되는 매우 큰 작품에서 나오는 화려한 광채를 보며, 현대 작가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그림이구나 하면서 절반쯤을 보았을 때 어느 순간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 ▲ Hilma af Klint.The Swan, no 17. 1914-1915. © 강욱 기자 | |
무심코 지나가며 보지 않았던 작품의 캡션에 나와 있는 제작 연도가 보통 1910년 전후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고 주변의 작품을 다시 살펴보고 같이 간 일행들에게 확인까지 한 후에 이 모든 작품들이 현대 작가가 아닌 이미 100년전에 그려졌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 경험하지 않았던 것, 경험하지 않았던 곳에서의 떨림과 설레임과 경악은 물론 자이로드롭을 타야만 느낄 수 있는 무중력의 아스라함이 함께 밀려오며 멍하니 주변을 응시해야만 했다.
나는 작품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작품들은 보란 듯이 활개를 치며 갤러리를 휘젖고 다니고 있었고, 그 작품들 속에서 튀어 나온 하나 하나의 색깔과 선들은 자유 자재로 모든 관람객들을 읊조리고 비웃고 야유 하였으나 어느 하나 맞서고 싶지 않고 그저 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다 받아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1862년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난 다음해 그리고 낙선전이 열리기 직전 해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그녀는 왕립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몇 안되는 여류화가 였다. 세기말 그러니까 19세기 후반에는 우리가 밀레니엄을 앞두고 겪었던 혼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혼란과 변화와 발견이 있을 때였다. X선이 발견되고 전파가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극도로 치닫게 되었고,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분석은 여기에 가속도를 붙이게 되었다.
| ▲ Hilma af Klint.Group IV, No. 3. The Ten Largest, Youth, 1907. © 강욱 기자 | |
인상파의 탄생은 회화에도 격변을 가져오기 시작했으며,그런 격변 속에서 포비즘이나 큐비즘의 탄생과 초현실주의의 탄생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추상회화가 탄생하게 되었고 칸딘스키는 추상회화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았으며, 몬드리안과 말레비치는추상회화의 영광을 당대에도 지금의 후대에도 누리고 있다.
하지만 1960년 그녀의 작품이 그녀의유언에 따라 사후 20년이 지난 후 세상에 공개되고 그녀가 표현해 냈던 ‘태고의 이미지’와 ‘우주의연결’, ‘빛과 어둠’은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세상에던진 미술사적 의미는 대단하다. 미술사가 결코 달리기 경주가 아니라는 어느 비평가에 의해 그녀의 미술사에의자리매김이 어떻게 정리될 지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녀의 작품이 갖는 미술사적의 의미와는 별개로 선명한색상과 균형 잡힌 기하학적 조성, 추상적인 스타일은 앞으로 수 많은 미술 애호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줄 것임이 분명하다.
| ▲ Hilma af Klint. © 강욱 기자 | |
어린 나이에 죽은 여동생때문에 신지학(Theosophy)에 몰두 했다는 그녀는 그 영향으로 인행 오컬트적인 성향의 그림이 탄생되었다고한다. 이 그림을 그린 장본인도 당시에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유언에 사후 20년 동안 절대 본인의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여 1960년대 중반에서야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가 되면서 그녀의 명성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이번의 대형 힐마 아프 클린트의 이번 회고전은 스톡홀름의 현대미술관과 베를린의 국립미술관 그리고 스페인 말라가의 피카소미술관이 함께 기획하여 전시가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한국에서는 블록버스터급 전시회가 일년에 적게는 대여섯 건 많게는 십 여건이 열리고있다. 하지만 그런 전시회는 이미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그래서 쉽게 인지하고 홍보할 수 있는 전시회위주로 진행이 되고 있다. 수많은 예산이 투입이 되고 수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하니 어쩌면당연하게도 그리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태생이 블록버스터급 전시회에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우리도 이런선구자적인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당당히 다른 블록버스터급 전시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경쟁을 할 수 있는 그런 토양이 하루 빨리 만들어 지기를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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