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9년 10월부터 1979년까지 꼬박 10년을 재무장관·경제기획원장관·대통령 경제특보로 일했던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생전에 “장관 취임 후 부처의 업무 내용과 현안을 파악한 뒤 정책을 구상해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회에서 입법화하자면 2년도 짧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기의 장관 평균수명은 11.4개월. 업무 파악에 6개월도 부족한데, 1년이 좀 지나면 짐을 싸는 게 요즘 장관실의 현실이다. 과거 정권 때부터 ‘불명예 전당’으로 전락한 장관들. 지령 900호 특집을 맞아 역대 단명 장관 풍속도를 짚어봤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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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평균 장관 수명 11.4개월 그쳐
[주간현대=이동림 기자] 3월9~10일 있었던 유기준·유일호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전말은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압축판이다. 현직 의원인 두 후보자는 당시 여야를 뛰어넘는 동료들의 ‘제 식구 감싸기’ 폐습에 힘입어 실정법 위반 ‘전과’는 아랑곳없이 국회 벽을 넘어 장관에 임명됐다.
해수부 잔혹사
당시 청문회에서 두 후보자의 총선 출마 여부는 정치권의 큰 쟁점이 됐다. 이들이 청문회를 거쳐 장관에 공식 임명되더라도 내년 4월13일 실시되는 20대 총선에 출마하려면 늦어도 내년 1월에는 장관직을 사퇴해야 하기 때문. 이로 인해 청문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임기 10개월짜리 시한부 장관’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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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호 후보자에 대한 국토교통위원회 청문회에서는 새정치연합 이미경 의원이 “10개월짜리 국무위원이 막중한 과제들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걱정”이라며 “내년 총선 불출마 입장을 밝히든지 후보직을 사퇴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같은 당 이윤석 의원은 “(장관직을 제안받았을 때) 총선 때문에 무리라고 거절했어야 한다”며 “출마하지 않겠다고 정확하게 선을 긋든지, 출마해야 하기 때문에 멋지게 장관직을 수행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은 “역대 정부에서 의원 겸직 총리, 장관의 평균 임기는 김영삼 정부 때 10개월, 김대중 정부 때 12개월, 노무현 정부 때 14개월, 이명박 정부 때 12개월”이라며 “10개월이라는 게 그렇게 짧은 기간이 아니다. 어떤 자세로 장관직을 수행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함진규 의원도 “오래 하는 것보다 왜 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유일호 후보자는 조세연구원장, 의정경험, 교수 경력,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등 경제 전문가로 차출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유일호 후보자는 “임기가 몇 년이 됐든 짧든 임기 동안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며 “10개월 동안 매일매일 밤잠 안자고 일해서 누구 못지않은 업적을 낳겠다는 말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은 장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총선 불출마를 요청할 경우 거취 결정에 대해 묻자 “어려운 질문”이라면서도 “꼭 필요하다면 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 ‘의원이냐, 장관이냐’를 놓고 두 장관은 즉답을 피한 셈이다. 문제는 장관 없어도 부처는 돌아간다는 의식이 팽배한다는데 있다. ‘시한부 장관’ 시비와 병행해 논란이 되는 국회의원 겸직 부분도 발상의 기본은 매한가지다. 헌법정신 등 원칙과 배치되는 성격이 없지 않음을 빤히 알면서도 그냥 밀어붙이는 대목은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제헌 헌법은 대통령제에 내각제를 가미했다.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이라는 ‘변종’이 들어설 여지가 원초적으로 마련된 것. 제1공화국 시절 국회 다수를 점한 한민당이 내각제를, 국부로 군림하던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제를 강력히 고집한 결과다.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 실패 후 들어선 제3공화국 헌법은 겸직을 금지하는 등 3권 분립 원칙에 충실했다. 그러나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6차 개헌) 강행을 위해 국회를 구슬릴 필요가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장관·의원 겸직 문호를 열었다.
이후 위헌 지적이 이어지자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여야는 겸직 금지를 약속했고, 다음 해 국회법 개정에 착수했다. 그런데 결과는 국민의 기대와 정반대였다. 제29조는 ‘의원은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 직 이외의 다른 직을 겸할 수 없다’고 규정해 오히려 장관 겸직을 제도화했다. 따라서 당장의 법제상으로만 얼핏 보면 겸직이 문제 될 게 없는 듯하다.
나아가 노무현 정부 당시 이해찬 총리를 비롯한 10명의 의원이 국무위원을 겸직한 사실만 미루어보면 새정치연합 또한 박근혜정부를 향해 마냥 삿대질을 할 입장도 못 된다. 여당 내 ‘친이계·비주류’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때도 겸직은 11명에 달했다. 이렇듯 여의도 정치권에는 하등 믿을 구석이 없다. 제 이익 앞에선 여야가 따로 없다. 국민도, 원칙도 안중에 없다.
앞선 윤진숙·이주영 전 장관도 ‘마의 10개월’ 벽을 넘지 못했다. 윤 전 장관은 2013년 4월 17일 임명됐다가 이듬해 2월6일 해임됐다. 9개월 25일(295일) 만이었다. 윤 전 장관은 임명 직후부터 가벼운 처신에다 부적절한 언행들을 하면서 자리가 위태위태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롱런’이 예상됐다. 결정타는 우이산호 기름유출 사고였다. 방송과 국회에서 또다시 실언을 반복하면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청와대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가 해임 건의를 하는 형식으로 윤 전 장관은 경질됐다. 이어 소방수로 투입된 인물이 이주영 전 장관이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지역구를 둔 3선 의원인 이 전 장관은 장수가 예상됐다. 야당도 호의적이어서 인사청문회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통과했다. 하지만 임명 한 달 만에 예상치 못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세월호 침몰사고였다. 이 전 장관은 진도 현지에 머물며 수습에 나섰다. 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전 장관은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노리고 있었다. 결국 이 전 장관은 지난해 3월6일 취임해 12월23일 물러났다. 임명된 지 9개월 22일(292일) 만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장관은 대체적으로 장수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해수부 장관의 잦은 교체는 매우 이례적이다. 해수부 장관은 과거 정부에서도 대표적인 단명 자리였다. 1996년 해수부 설립 이후 2008년 통·폐합되기까지 15명의 장관 중 11명이 임기 1년을 넘기지 못했다. 평균 재임기간은 9개월에 그쳤다. 역대 장관 중 가장 장수한 장관은 장승우 전 장관으로 1년 3개월(15개월)에 불과하다. 그 다음 오래 장관 자리에 있었던 인물은 오거돈·김성진 전 장관으로 14개월이다. 초단명 장관도 있었다. 최낙정 전 장관이다. 최 전 장관의 재임기간은 불과 보름이었다. 이때도 설화가 문제였다.
이런 현실에 장관 자신도 그러려니와 그런 장관을 대하는 일반 직원들의 속이 어떠할지는 빤하다. 그럼에도 국회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이 대목을 집중 거론하자 여당 의원들은 역대 장관들의 임기도 대동소이했다며 비호하고 나서는 데 급급한 게 현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과거 각 부처 장관들의 임기를 보면 그런 소리를 할 만은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부터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20여 년 동안 임기를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장관(부총리 겸직 포함)은 총 16명이다. 김영삼 정부 (1993~1998) 당시는 6명이었는데, 국기를 뒤흔든 대형 사건에 연루돼 중도 하차한 경우가 절반이었다. 당시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일이 두 가지 있었다. 1994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지방선거 연기를 추진했던 일과 1997년에 터진 이른바 ‘한보 사태’다.
안기부는 1995년 6월27일로 예정된 지방선거의 투표 일정을 미루는 문제를 그 전해 11월에 검토한 사실이 ‘단체장 선거 연기 검토’라는 제목의 문건을 통해 뒤늦게 드러났다. 문건은 선거 연기를 위한 지방자치법 등 관련 법령 개정 추진과 함께 정치, 경제, 언론 및 시민사회 등 각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선거 연기에 대한 여론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시 내용 등을 담고 있었다.
안기부의 정치 개입 논란이 불거지면서 문서 작성 당시 안기부장으로 있었던 김덕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됐다. 논란이 일자 김 부총리는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문건에 대해 보고받은 적이 없고, 지시한 적도 없다”고 해명했지만 1994년 12월 24일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 임명된 지 60일 만인 1995년 2월 21일 결국 경질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한보 사태는 1997년 1월 당시 국내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 부도를 계기로 정경 유착 비리가 드러난 사건이다. 한보는 당시 정태수 총회장의 광범위한 로비 활동에 힘입어 열악한 재무구조 속에서도 5조원이 넘는 대출금을 받아 내며 특혜 의혹을 빚었다. 그 후에도 대출 규모는 계속 늘었고, 동시에 여러 회사를 잇달아 인수하면서 사업을 확장하다가 끝내 부도를 맞았다.
검찰이 한보의 부도 원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포함된 여야 의원들과 전직 고위 관료들이 정 총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중간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정 총회장 등 한보 관계자 2명과 이철수·신광식 전 제일은행장, 홍인길·황병태·정재철 신한국당 의원, 권노갑 국민회의 의원, 김우석 전 내무부 장관 등을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대출 특혜를 지시한 배후를 규명하라는 여론이 빗발쳐 재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여야 의원 및 전직 관료 등 정치인 30여 명이 금품을 수수한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대형 권력형 비리로 타격을 입은 김영삼 정부는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1997년 3월 한승수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장관급 인사 10명을 경질했다. 그중에 안광구 통상산업부 장관은 주무 부처 수장으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었고, 김용진 과학기술처 장관은 한보가 퍼주기 식 대출을 받던 시절 은행감독원장을 역임한 게 경질 사유였다. 두 장관은 나란히 1996년 12월20일에 임명됐지만 재임 기간 76일 만에 물러났다. 앞서 1993년 3월 박희태 법무부 장관은 이중국적을 지닌 딸이 대학에 특례입학한 사실이 구설에 오르면서 장관 취임 10일 만에 하차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1998~ 2003) 때는 총 7명으로,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많은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 특히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일을 장관 임명 전에 저질렀다가 들통이 난 경우이거나 물의를 빚을 만한 발언이 불거져 물러난 경우였다. 김 전 대통령이 주로 개인적 친분에 따라 다양한 경력의 장관을 낙점하다 보니 생긴 문제로 풀이된다.
이 당시에는 취임 3일(43시간) 만에 사퇴해 역대 최단명 장관 기록이 나왔다.
2001년 5월 21일 임명된 안동수 법무부 장관은 이틀 뒤인 23일 사표를 제출했다. 이른바 ‘충성 서약’ 논란이 발단이 됐다. 안 장관은 취임 인사말이 적힌 초고에서 “위대한 대통령님과 성공한 국민의 정부만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며 “집권 후반기에 대통령님 통치 철학에 따라 대통령님께 목숨을 바칠 각오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안 장관은 “문제의 문건은 당원용 인사말로 다른 사람에게 작성을 지시한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스스로 사표를 제출했고 청와대는 곧바로 이를 수리했다.
2008년 8월 송자 교육부 장관은 취임 전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편법으로 주식을 취득하고, 부인과 딸의 이중국적이 문제가 돼 재임 기간 24일 만에 사퇴했다. 손숙 환경부 장관도 취임 전에 약속된 러시아 현지의 연극공연에 출연했다가 대기업으로부터 찬조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33일 만에 퇴임했다. 인기 절정의 예술인이 대기업으로부터 협찬을 받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었으나, 문제는 현직 장관인 까닭에 찬조금에 ‘+α’가 붙은 게 망신을 산 이유였다.
1998년 3월 임명된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은 과거에 16차례 위장전입을 하면서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휩싸여 59일 만에 물러나 김영삼 정부 때 박양실 장관을 떠올리게 했다. 여성으로서 초대 내각의 보건 장관으로 발탁됐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2001년 9월7일 취임한 안정남 건설교통부 장관은 부동산 투기 및 증여세 포탈 등의 의혹이 제기돼 23일 뒤인 2001년 9월29일에 장관직을 떠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2003~2008) 때도 3명의 퇴진 장관 모두가 각종 의혹과 논란 속에서 여론의 뭇매를 받고 물러난 경우였다.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 때는 3개월 이내 물러난 장관이 단 한 명도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온갖 구설과 논란을 부른 장관이 한 명도 없었던 게 아니라 대통령 자신이 따가운 여론에도 불구하고 장관을 자르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던 까닭이다. 이 당시에도 여론의 뭇매를 맞아 취임 6일 만에 장관직을 잃은 경우가 있었다. 이기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앞서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판공비를 과다 지출하고 대기업 계열사 사외이사를 겸직한 일로 장관 임명 때부터 도덕성 시비에 휩싸였다. 이후 각종 의혹이 쏟아졌다.
역대 단명예고
LG전자 북미총괄 마케팅팀장으로 서울에서 일하던 장남이 앞서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것에 대해 이 부총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직장을 갖고 있는 아들의 의견을 존중했다”고 해명했으나 이것이 거짓말로 드러나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또 부인인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과 재산 신고 내역이 서로 달라 제기된 허위 신고 의혹도 이 부총리의 발목을 잡았다. 이 부총리는 2005년 1월 취임 5일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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