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 당국은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임금을 인상하겠다는 통보를 우리 측에 해왔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북한은 작년 11월 개정한 개성공단 노동규정을 근거로 3월분 임금 지급일인 오는 10일부터 근로자 1인당 월 최저임금을 70.355달러에서 74달러로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4월 2일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에 북쪽의 일방적인 최저임금 인상 요구에 따르지 말고 기존대로 급여와 사회보험료를 지급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만약 북쪽 요청을 따를 경우 방북 승인을 내주지 않거나 금융 지원 제한부터 사업 승인 취소까지 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전달하면서 갈등은 고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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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요구는 일면 황당한 주장이 아니다. 월 74달러라면 월 20일만 근무한다고 해도 일당이 3.7달러, 약 4,048원 (2015년 4월 8일 기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상에서 거의 최하의 임금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노동의 착취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북한사회를 근본적으로 그릇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물론 기업가(자본가)의 목표는 최대의 이익 창출이다.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원가절감이나 고가판매 등의 방법이 있지만, 역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임금착취이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혁명이후 서양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고, 곧 사회주의 이념이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도 산업화시기를 거치면서 ‘노동의 착취’를 통해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노조활동이 합법화되고, 일방적인 임금의 착취가 어려워지면서, 기업들은 더 낮은 임금수준의 지역을 찾아서 생산공장을 해외로 이동했다는 것은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개성공단은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의 하나로 2000년 8월 9일 남쪽의 현대 아산과 북쪽의 아태, 민경련간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여 공단 조성에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북한당국이 2002년 11월 27일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그 이후 12월 남측의 한국토지공사, 현대아산과 북측의 아태. 민경련간 개발업자지정합의서를 체결하였다. 2003년 6월 개성공단 착공식을 가졌고, 2004년 6월 시범단지 2만 8000평 부지조성을 완료했다. 2004년 10월에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사무소’를 개소하였다. 2004년 6월 시범단지 18개 입주업체 선정 및 계약을 체결하였고, 2004년 12월 시범단지 분양기업에서 생산된 제품의 첫 반출이 있었다. 2005년 9월에 1차 24개 입주업체 선정 및 계약 후 2006년 9월에는 본 단지 1차 분양기업 첫 반출이 있었다. 2007년 6월에 1단계 2차 분양업체를 선정하였고, 2007년 10월에는 1단계 기반시설 준공이 있었다. 2010년 9월에는 입주기업 생산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2012년 1월에는 북측 근로자가 5만 명을 돌파하였다. 근로자의 1인당 월평균 임금수준은 처음에 약 60달러 수준에서 출발하여 현재는 약 70달러로 10년 동안 약 10달러(16.7%) 인상되었다.
북한당국의 임금인상요구를 받아들이는 우리 정부의 태도를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대북관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북한당국이 개성공단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를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는 무기개발 등에 사용할 것을 경계할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북한주민을 동등한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낮은 임금수준을 이용한 이익극대화에만 신경을 쓴다면, 다른 지역의 제 3세계 국가들에 우리기업의 공단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북한의 근로자들을 단순히 기업의 이익창출을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고, 북한의 임금수준에 따라 북한의 소득수준에 비해 많은 임금을 지급한다고 큰소리 쳐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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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과거 1970년대 서독의 ‘신동방 정책’(Neue Ostpolitik)의 배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국내의 학자들은 ‘신동방 정책’을 일반적으로 ‘동방정책’이라고 부르며, 당시 서독의 수상이었던 사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정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동방 정책’은 브란트의 독자적인 정책이 아니다. 당시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국가들에 대한 접근은 함께 이루어졌는데, 이는 1970년대 이른바 ‘동서데탕트’라는 미국과 소련의 현상유지를 위한 화해무드의 전제조건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신동방정책‘의 추진은 유럽의 평화’유지와 ‘공동의 시장’구축을 시종일관 당론으로 채택했던 자민당(FDP)의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서)독일의 자민당은 자본가와 기업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 당시 서독기업의 해외시장확보와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동유럽국가들과의 관계개선과 교류에 앞장 섰던 정당이었다. ‘동서데탕트’의 분위기가 동유럽의 문호를 개방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자민당은 동독 및 동유럽과의 관계개선에 부정적이었고, 경직된 태도를 보였던 기민당(CDU)와의 연립정권을 깨고, 이념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동유럽에 대한 접근에 적극적이었던 사민당(SPD)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빌리 브란트의 사민-자민당 연정이었다. 이후 자민당은 서독자본의 동유럽 진출에 선봉장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당시 서독의 ‘신동방정책’ 추진 당시와 현재 대한민국의 대북경제교류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서독정부의 정책추진방향을 보면, 민간차원의 대 동독 투자가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독정부는 단지 자국기업의 동독진출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동-서독 정부 간의 가교역할에 치중했다. 이미 1949년 11월에 ‘내독교역신탁소’ (Treuhandstelle fur den Interzonenhandel)라는 것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연방정부 경제부 산하 민간단체인 ‘독일상공회의소’ 내에 소속되었다. 서독정부는 이 기구를 동독진출 창구로 이용하였다. ‘내독교역신탁소’는 1981년에 ‘지역 간 교역 신탁소’ (Treuhandstelle fur Industrie und Handel)로 개칭되어 역할을 계속하였다. 동독의 경우에는 민간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구의 협력 파트너는 동독정부의 ‘대내외 무역성’ (Ministerium fur Außenhandel und Innerdeutschen Handel)이었다. 당시에 서독정부는 공식적으로 동독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차원의 접근방식을 선택했다. 이 기구는 동독에 진출한 자국기업의 이익을 대표하면서, 자국정부의 대리인 자격으로 동독과 자국기업의 모든 거래관계를 지원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남북경협의 경우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개성공단입주기업들의 협의회는 그냥 협회수준에 불과할 뿐이고, 모든 것은 정부와 정부 간의 거래로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런 형태의 교류는 정권의 태도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중단될 수 도 있는 불안정한 형태이다. 정부가 모든 교류에 간섭하고 지도하는 방식의 교류는 그 범위가 확대될 수 없다. 현재 우리 정부는 민간차원의 대북사업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물론 북한정권이 주는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의 지나친 개입은 실질적인 대북사업의 확장을 저해하고 있으며,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경제교류’가 단지 정치적 ‘전시효과’에 치우지는 인상을 주고 있다.
동-서독의 경제교류는 서독의 기업(자본)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독의 대 동독 경제교류는 민간기업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여기서 왜 이들이 동독과 동유럽에 대한 진출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거 식민지 쟁탈 경쟁에서 한발 뒤쳐진 독일의 자본가들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유럽 공동의 시장을 구축하려고 노력해 왔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어떤 공동체를 만들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리고 이것의 전제 조건은 ‘평화유지’였다. 그래서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민당의 당론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이 ‘유럽평화’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동-서 진영으로 나뉘어졌음에도 이들은 지속적으로 ‘유럽평화’를 외치며 상대적으로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고, 미래에 잠재적인 시장이 될 수 있는 동유럽과의 평화관계 구축에 진력했었다. 그 결과 1974년 ‘헬싱키 조약’을 통해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를 성사시키는 막후 세력으로 역할을 했다. 이후 서독기업의 동유럽 및 동독 진출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즉 서독자본의 동독진출은 서독의 자본가들에 의해 준비되고 주도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인 대 동독 투자가 시작된 이후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독일은 통일이 되었다. 서독의 자본주의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동독주민의 변화를 유도하는 출발점을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서독정부의 역할은 이들의 동독진출에 대한 정부 간의 합의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내독교역신탁소’ 혹은 ‘지역 간 교역신탁소’ 같은 민간주도의 단체가 동독정부와 직접 상대하며 사업을 진행했었다.
현재 개성공단 임금인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경우에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에게 이러저러한 지침을 내리고 있다. 북한 정부가 원하는 건 기업들과의 직접 협상일 것이다. 우리도 과거 서독정부가 했던 방식대로, 정부는 여건만 만들어 주고, 민간기업들이 주도적으로 대북투자에 나서는 방법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단순한 노동집약적인 생산공장 만이 아니라, ‘통일대박’을 염두에 두고,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 등을 통한 대기업의 생산 전진기지를 미리 만들 필요가 있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 등의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우리 기업들의 성장전략의 일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서독의 기업들은 핵심기술의 생산은 자국 내에서 하고, 그 외의 부품들을 동독에서 생산한 바 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생산을 분업화 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또한 북한 노동자의 임금도 (과거 동독노동자들의 경우처럼) 적당한 수준에서 충분히 지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북한주민들이 남북의 경제적 격차를 더욱 실감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변화를 더욱 빨리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이익만 챙기려는 식의 대북 투자를 해왔다. 이제는 이러한 방식에서 탈피할 때가 왔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북한주민의 변화를 유도하지 못한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대기업들이 북한정권과 직접 협상하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하고, 대기업들이 주도가 된 대북 경제교류가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의 우량기업들이 개성공단에 국한하지 않고 북한의 전 지역에 진출하게 된다면 그리고 이들의 진출이 북한사회를 개방하는 역할을 한다면, 통일의 길은 그 만큼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권오중.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Philipps- Universitaet Marburg) 철학박사 (현대사/정치학 전공). 서울대학교 교육종합연구원 선임연구원 역임. 민주평통 정치외교분과 상임위원 역임. 한국외대 등 다수 대학 출강. 현재 사단법인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