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정태수 인맥으로 흥했다 인맥 집착하며 망하는 비극
부패 스캔들 이후 정치권의 인적 쇄신 몰고 올 가능성 커지고
정치권을 강타한 성완종발 쓰나미로 정국이 혼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의 핵심 실세를 둘러싼 검은돈 거래 의혹. 과거에도 수차례 반복됐던 모습이다. 특히 ‘성완종 리스트’는 18년 전 ‘정태수 리스트’ 복사판으로 정치권의 인적 쇄신을 몰고 올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검찰이 숨진 성완종 회장이 여야 유력 정치인 14명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장부를 확보, 수사 확대가 불가피해지면서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장부에는 성 회장의 시신에서 발견된 메모에 있는 현 정부 인사 8명 가운데 4~5명과,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새정치민주연합 중진 등 야당 정치인 7~8명에 대한 로비 자료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부 외에도 성 회장 측이 보관해온 로비 관련 자료가 더 나올 수 있어 검찰의 조사 대상에 포함될 정치인 숫자는 늘어날 가능성도 커졌다.
|
제5공화국 민정당 시절부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를 넘나들며 인맥을 찾아다녔다는 고(故) 성완종 회장. 물불을 안 가렸다는 그는 결국 인맥으로 흥했다가 인맥에 집착하면서 망하는 비극을 불렀다.
성완종 회장은 1981년 대아건설을 인수하면서 청년회의소(JC) 활동과 민정당 ‘청년기업가 모임’에 참여하며 인맥 쌓기에 나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구천서 전 국회의원, 오장섭 전 건설교통부 장관 등과 가까웠다고 한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민정당·민주당·공화당) 시기 홍인길 전 국회의원 등 YS계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고, DJP연합(김대중과 김종필의 연합) 이후엔 이해찬 전 총리와도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인맥 관리의 정점은 그가 충청 지역 인사들 모임인 충청포럼을 2000년에 만들면서 시작됐다. 성완종 회장은 충청포럼에 가입한 적이 없는 인사까지 충청포럼 명단에 넣어 놓고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광범위하게 인맥을 관리했고, 몇몇은 ‘성완종 장학생’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그의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2003년엔 김종필 총재 특보단장을 맡았고, 이듬해 총선에서 김 총재 다음으로 비례대표 2번을 받았다. 하지만 2년 전인 2002년 지방선거 때 비자금 16억원을 자민련 측에 전달했다가 국회의원 꿈이 무산됐다. 이 사건은 JP가 정계를 은퇴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2012년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변웅전 최고위원의 양보로 서산·태안에 출마해 당선된 뒤 한나라당과의 합당에 나서면서 여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선거법을 어긴 사실이 드러나 작년 7월 당선이 무효가 됐다. 친박을 비롯한 여당 의원들과 본격적으로 친분을 쌓은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최근 검찰 수사 대상이 되면서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친박 인사들에게 구명 운동을 했다. 그가 돈을 줬다고 자살 직전 메모에 남긴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외면당하면서 배신감을 느끼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폭넓은 인맥을 자산으로 여겼던 그의 입장에선 상실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태수 리스트’ 복사판 ‘성완종 리스트’
성완종 회장의 비극이 1997년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 리스트’의 복사판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1997년 4월7일. 정 회장은 국회 한보사건국정조사특위에 참석해 폭탄발언을 했다. ‘정태수 리스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갑자기 신한국당 김덕룡 의원, 자유민주연합 김용환 의원, 새정치국민회의 김상현 의원에게 돈을 줬다고 폭로한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여야의 실세 정치인이었다.
정 회장은 이때부터 청문회 분위기를 주도했다. 목소리를 높였다가 의원들로부터 태도가 불량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정태수 리스트’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입을 열면 정치권에 핵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검찰에 불려간 정 회장은 돈 준 일시·장소는 물론 정황도 자세하게 진술했다. 모 의원은 돈 상자를 호텔에서 받아 끙끙거리며 직접 옮기다 호텔 직원과 시비가 붙었고, 모 의원은 돈 상자를 받아가다 넘어졌다는 것까지 기억했다.
그 후 정 회장은 다시 입을 닫았다. 나중엔 실어증에 걸린 행세까지 했다. 그래도 검찰이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33명의 정치인을 소환조사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소환 전엔 “정태수를 알지도 못한다”고 부인하던 정치인들도 정 회장의 구체적인 진술을 들이밀자 꼼짝 못하고 시인했다. 하지만 당시엔 정치자금을 처벌하는 조항이 없었다. 대가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국회의원이 돈을 받았다고 해도 기소할 수 없었다.
결국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 중 8명만 뇌물수수죄로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자금법이 개정됐다. 지금은 불법 정치자금을 받으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돼 있다. 대신 공식적인 선거자금은 국민세금으로 보전해 준다. 이후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수수 관행은 많이 투명해진 듯했다.
정태수 회장은 2007년 해외로 도피한 지 근 10년이 되었지만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정 총회장은 1997년 1월 자신이 경영하던 한보그룹이 부도 났을 때 온갖 권력형 비리의 전형을 보여준 장본인이다. 이른바 ‘한보사태’로 총칭되는 이 부정 비리는 당시 건국 후 최대의 금융부정 사건으로 기록됐다. 사건의 발단은 한보가 부도를 내면서 불거졌는데, 부실 대출의 규모가 5조7000억여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여서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정 회장이라는 한 기업인과 정계의 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하면서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의 ‘권력 커넥션’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은행들은 한보철강에 거액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1997년 5월, 이 사건으로 인해 정태수 회장은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20~5년을 선고받는 등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이 사태가 발생하면서 제철소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부도 여파로 인해 171개의 영세업소와 외상 거래자들이 빈손이 되었고, 국가 대외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해 국가 경제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그해 IMF 금융위기를 몰고 온 한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과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운영차장 김기섭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 총회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가 지난 2002년 형집행정지,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그는 별건의 사건으로 2006년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횡령)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항소, 서울고법에서 재판을 받던 중 2007년 5월2일 치료목적으로 일본으로 출국한 뒤 현재까지 해외 도피 중이다. 정태수 회장이 성완종 회장의 자살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때 정·관계를 주무르며 재벌 총수로 군림하던 그의 근황이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gracelotus0@gmail.com
원본 기사 보기:sagunin_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