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독립 위해 국외에서 직접 군사력 키워·조국광복 후 북으로 납치
1919년, 경성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어 간도지역에까지 미쳤다.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망국의 한이 어렸던 그 무렵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간도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트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갖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했다.
특히, 연해주에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화합해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이뤘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 박동원의 집에서 고평, 구춘선, 김영학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해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다그치던 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간도에까지 전해졌다.
이는 타향에서 망국의 설움에 떨고 있는 이들로 말하면 하나의 강심제가 아닐 수 없었다.
고평(高平)을 비롯 간도의 지사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해 용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용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용정촌이 당시 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용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용정거리는 수런거리는 소요와 팽만한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간도 각지의 삼삼오오 떼를 지어 용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여인들을 시작으로 백발노인과 삼척동자들도 가세해 구름떼처럼 3만여명이 모여들었다.
당시, 용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 실정을 감안해 보면 고평(高平)을 비롯 간도의 지사들 활약 덕분에 운집한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 바로 그것이다.
“우리 조선족은 해방을 선언하노라, 지위를 선언하노라, 정의를 선언하노라, 인도주의를 선언하노라!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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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高平)은 자가 수여(秀汝)이며 호는 백하(白霞)이고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충렬공(忠烈公) 제봉(霽峰 ) 경명(敬命)의 후예인데 그의 9대조 응익(應翼)이 전남 창평(全南 昌平)에서 부안 운호(扶安 雲湖)로 들어와서 살다가 다시 그의 5대조 대진(大鎭)이 노적(露積)으로 옮겼기에 부안의 노적고씨(露積高氏)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재갑(在甲)이다.
그는 1884녀(고종 21)에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鎭西面 雲湖里)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인석(仁鉐)인데 뒤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평(平)으로 고쳤다.
어려서 전남 창평의 유촌(柳村)으로 양자가 되어 들어갔기에 어린 시절에 그 곳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그러다 1899년(고종 36)에 서울의 보광중학교(普光中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고종 39)에 졸업하고 이어 1902년에 경성관립법관양성소(京城官立法官養成所)에 입학해 1905년에 거기를 졸업하고 법학사(法學士)의 청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에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京城地方法院 春川支廳)의 검사(檢事)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이른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강제로 맺어지니 바로 사임하고 말았다.
1911년 곧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다음해에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이 종교를 발판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가졌다.
그리하여 1913년에 만주(滿洲)로 건너가서 간도지방(間島地方)에서 대종교(大倧敎)의 포교활동을 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려고 정의단(正義團)에 입단하여 그 부총재(副總裁)가 되었다.
이어 정의단을 해체하고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해 그 참모장에 피임되었다.
김승학(金承學)이 지은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 따르면 이 의군부는 동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한국 의병을 모아 조직한 군사 혁명단체로 간도의 화룡현(和龍縣)에 근거를 두었다고 서술돼 있다.
이렇게 만주지방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21년에는 의군부를 해체하고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했다.
이 고려혁명군의 총사령은 김규식(金奎植)이며 참모장은 고평(高平)이며 기병사령(騎兵司令)은 이범석(李範奭)이었는데 군대의 총수는 약 400명이었다.
고려혁명군은 일본군대와 직접 항전을 벌인 군사단체였다.
그 후 1925년에는 재만혁명동지회(在滿革命同志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다가 1935년에는 중국 본초로 이거해 하남성 방공구국연맹 제1군단 사령관에 피임되었다가 1937년에 동 참모장이 되었다.
1939년에는 하북성 제3소비 사령부 군법처장에 피임되었고 1940년에는 하북성의 군관학교장을 겸임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조국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그동안 국내에서 여러 단체를 이끌고 나갔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서 그의 나이 67세 때에 북괴에 의해 북으로 납치되어 갔다.
그는 위와 같이 젊어서부터 일찍 개화사상에 물들어 현대교육을 받았고 조국이 일본에 의하여 주권을 빼앗기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국외로 나가서 직접 군사력을 길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조국 광복을 맞이한 후 귀국하여 여러 애국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불행히도 북괴에 의해 납치된 이후로는 그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다.
살아있다면 올해로 107세나 되는 그가 지금은 죽었음이 틀림없는 일이겠으나 아무튼 우리 고장이 낳은 훌륭한 애국자요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그가 불행하게 만년을 마쳤음으로 그에 대한 어떤 자료나 공적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길 뿐이다.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전북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