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병한 자연사상칼럼니스트 © 노병한 사주풍수칼럼니스트 |
[노병한의 운발코칭과 開運풍수] 풍수(風水)는 우주•자연•인간•동식물 등 생명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는 자연의 기운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러한 생명체의 중심에는 공기(風)인 대기(大氣)와 물(水)인 음용수(飮用水)가 있다. 전달매체(傳達媒體)인 공기량(氣)•일조량(火)•수량(水) 등을 결정함에는 입지(立地)라고 하는 좌향(坐向)이 중심에 선다. 이러한 요소들이 잘 결합되어 잇는 곳을 명당지라고 할 수 가 있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승인 이 세상에 왔다가 저승인 저 세상으로 간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6개의 터(地)를 가지게 된다. 인간이 갖게 되는 6개의 터(地)는 바로 입태지지(入胎之地)•출태지지(出胎之地)•성장지지(成長之地)•활동지지(活動之地)•퇴후지지(退後之地)•신후지지(身後之地)이다. 이러한 6개의 집터와 주택 중에서 앞의 5개는 이승주택이고 마지막의 신후지지만이 저승주택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인물형성의 결정요인으로 땅의 정령(精靈)들인 지령(地靈)이 잘 뭉쳐있는 곳에서 인물이 탄생한다고 했음은, 만고불변의 천리(天理)•역리(易理)•지리(地理)인 것이니 심오하게 궁리를 해보면 그 실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6개의 터(地)는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입태지지(入胎之地)는 어머니의 자궁에 잉태와 임신을 할 시점의 지점인 집터와 주택을 말한다. 둘째 출태지지(出胎之地)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되어 세상에 나오는 분만과 출생을 한 시점의 지점인 집터와 주택을 말한다. 셋째 성장지지(成長之地)는 어린 유아기와 유년성장기를 보내는 시기의 지점인 집터와 주택을 말한다.
넷째 활동지지(活動之地)는 사회인으로 취업을 하여 직장과 사회활동을 주로 하는 시기의 지점인 집터와 주택을 말한다. 다섯째 퇴후지지(退後之地)는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은퇴생활을 하면서 노년시기를 보내는 초기단계 실버시대 시기에 집터와 주택을 말한다.
즉 퇴후지지는 벼슬을 물러난 뒤를 대비하여 산수가 수려한 곳에 쉴만한 장소를 미리 물색하여 후기단계 실버시대 시기에 집터와 주택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섯째 신후지지(身後之地)는 사후(死後)에 자신의 유해(遺骸)가 묻히는 귀토지(歸土地)로써 무덤=묘지(墓地)인 유택(幽宅)을 말한다.
신후지지(身後之地)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후지지(身後之地)는 부모나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에 사후에 들어갈 만한 명당을 미리 잡아 두는 묏자리이다. 즉 생전(生前)에 미리 잡아 두는 묏자리인 것이다. 좁은 의미로는 자기가 죽기 전에 자신의 묘의 자리를 미리 잡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신후지지란 이렇게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자리를 미리 잡아서 흙더미를 해두는 것>인데 이를 치표(置標)라고 한다. 이렇게 신후지지는 수의(壽衣)와 같은 개념으로 생전의 삶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한 점진적인 화해의 과정이라고도 할 것이다.
신후지지를 명당에 해당하는 곳에 가묘(假墓)를 정하였을 시에는 수명이 연장되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전해진다. 신후지지의 좋은 기운이 살아생전에도 미리 발복(發福)을 하여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만약에 신후지지를 흉지(凶地)에 해당하는 곳에 가묘(假墓)를 정하였을 시에는 큰 재앙이 닥쳐 불행한 삶을 살거나 자기의 천수(天壽)보다 일찍 하직을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능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건원릉도 무학대사가 잡아준 터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하나의 설화가 있다. 망우리(忘憂里) 지명에 얽힌 얘기다. 태조가 일찍이 무학과 함께 사후(死後) 자기가 묻힐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을 발견한다.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에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면서 태조는 자신이 묻힐 곳으로 미리 정해 놓은 곳인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에 대단히 만족했는데, 그로 인해 근심 하나를 덜었다 해서 그 고개를 망우리라 했다는 것이다. 망우리고개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1동에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1394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놓은 조선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후지지인 음택을 물색하게 했다. 양주 검암산 기슭, 지금의 동구릉(東九陵) 내 건원릉(健元陵) 자리에 신후지지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고개에 이르러 멀리 자기의 능(陵)터를 굽어보던 태조가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於斯吾憂忘矣)” 했다 하여 이 고개를 ‘근심을 잊음을 뜻’하는 망우(忘憂)고개, 또는 망우리 고개라 불렀다.
옛날 태조가 넘던 고개가 있는 망우산이 오늘날 묘지공원이 되었으니 예언이나 한 듯하다. 현재의 망우리 고개는 옛 고개 남쪽에 새로 낸 길로서, 옛 고개는 지금 중앙선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터널 윗길이었다고 한다. 망우동에는 예부터 자연부락이 많았는데, 그 중 양원리(養源里/良源里)라는 마을은 망우리 고개이름이 생기게 된 전설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묘(墓)자리를 정한 태조 이성계가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다가 목이 말라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지 이 우물을 양원수, 마을이름을 양원리라 했다. 주택이 늘어나면서 수질이 나빠져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된 양원리 우물은 마을 논 가운데 자취만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한다. 중앙선 북쪽 송곡여중고 뒤에 있는 양원리 마을은 20대를 내려오는 동래 정씨가 6백 년 전부터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유명하다.
망우리고개는 역사의 숱한 애환을 안고 있다. 태조의 장례 행렬이 지나갔고,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장지인 금곡까지 갈 때도 이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6월9일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가 이 고개를 넘어 장호원으로 피신을 했다.
봉록미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인들이 민비를 시해하려고 창덕궁으로 몰려들었을 때, 민비는 상궁복을 입고 상궁가마에 올라 대궐을 빠져 나와 동대문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난을 피했다. 광나루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가진 돈이 없자 민비가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 주어 배 삯을 대신했다고 한다. nbh1010@naver.com
□글/노병한:박사/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노병한박사철학원(원장)/자연사상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