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유공자 선정 기준을 두고 논쟁이 뜨겁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자는 서훈을 받을 수 없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이는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중대한 도전행위이다. 국가 유공자는 독립 유공자, 호국 유공자, 민주 유공자로 분류된다. 독립 유공자는 일제 시대 항일투사다. 이들의 숭고한 투쟁이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이승만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제1호다. 수훈자는 10,518명이다. 호국 유공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의 참전용사다. 이들이 흘린 피가 산업화로 가는 길에 든든한 종잣돈이 되었다. 수훈자는 2,570,000명이다. 민주 유공자는 4. 19와 5.18 등의 민주화 투사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선정 대상으로 보상 차원이면 될 것을 보훈하려고 하니까 무임승차자가 많은 거고 그래서 명단 공개를 금지하고 있다. 수훈자는 20,128명이다.
나의 아버지도 국가 유공자다. '해방경찰'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총탄이 목을 스치면서 생긴 흉터와 총탄으로 날라간(?) 엄지 손가락이 증거다. 어렸을 때 안방을 가득 채운 여러 개의 무공훈장과 경찰공무원으로서 이승만과 박정희로부터 받은 대통령상이 자랑스러웠다. 애국심으로 가득찬 모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어릴 적 내가 닮고 싶은 표상이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1%의 애국심도 아마 이때 생겨난 것이리라. 그러나 훈장과 대통령상의 환상이 깨진 것은 1970년대 초 대한민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모스크바대 출신 고정간첩 유이화 사건 종결 이후 벌어진 논공행상으로 경찰 수뇌부의 썩은 기강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거제도의 일선 지서장으로서 할머니 간첩을 체포하고, 심문하여 31명의 간첩단을 일망타진했는데, 이는 해방 이후 대공사상 혁혁한 전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중앙 상부의 높은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하부에서 애쓴 사람들은 철저하게 소외됐다.
내가 제8대 주 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로 일할 때 훈장 추서 제안을 두 번 받았는데, 이를 모두 고사한 이유도 훈장에 대한 어릴 때 기억 때문이리라. 한 번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의 이름을 선생의 아호인 '매헌'으로 개칭하는 쾌거를 올렸다며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김학준 회장이 청와대 김덕룡 국민통합보좌관을 통해 훈장 추서 제안을 했고, 다른 한 번은 2010 상하이엑스포 대한민국관 정부대표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행정안전부 맹형규 장관으로부터 훈장 추서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
다시 김원봉으로 돌아가자.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로 논란이 분분하다. 굳이 정의를 내린다면 일제 하에서는 진보적 민족주의자이고, 북한 정권 참여 이후로는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게 맞다. 해방정국에서 미소 군정을 거쳐 남북한 단독 정권이 들어서고, 민족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을 겪고, 국시가 반공이 된 나라에서 서훈의 기준은 적성국가 북한에 협조한 사람에 대해서는 '노'를 명백하게 하지 않으면 대혼란이 일어난다. 김원봉을 예외로 하면, 그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고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했지만 숙청된 옌안파 김두봉과 무정, 소련파 허가이, 남로당 수괴 박헌영 등도 서훈 대상에 포함시킬 건가? 또한 무장 항일 투쟁했다고 하는 김일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 ▲ 김정기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
김원봉은 1918년 난징의 진링대 입학 다음 해에 요인 암살과 일제 수탈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목적으로 만주에 의열단을 조직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의거에 가담했다. 1925년 쑨원이 1차 국공합작 시기에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광저우에 설립한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고,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명되어 교관을 지냈다. 당시 교장이 1927년 국민정부 총통이 된 장제스이고, 부교장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주언라이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27년 주언라이가 주도한 난창봉기에도 가담하게 되었다. 1938년 2차 국공합작 시기에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동의 하에 당시 조선인 최강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했다. 1942년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가 국민당 장제스의 지원 하에 좌우통합정부를 구성하고 광복군을 편성했을 때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시켜 부사령관을 맡았고, 1944년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까지 오르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독립운동가로서 김원봉이다.
미군정 시기에 악명높은 일본 고등계 형사 출신인 노덕술에게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수모를 겪고 1948년 남북지도자연석회의 때 월북하여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한국전쟁을 사주했던 박헌영과 달리 남침을 반대했고, 1958년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종파사건으로 숙청될 때까지 북한의 최고위직인 국가검열상, 노동상, 당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부의장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여기까지가 공산주의자로서 김원봉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통일된 한국에서는 서훈 대상자를 확대하는 문제를 당연히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분단된 한국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독립투사라도 적성국가인 북한의 건국에 협력한 인물을 서훈 운운하는 것은 이미 주무 처장으로서 금도를 넘은 것이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왔는가? 피우진은 자발적으로 내려와야 한다. 아니면 강제라도 끌어내려야 한다. 이것은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다.
*필자/김정기.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