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끼루마 스님은 말기 암으로 병원에서 퇴원조치를 내렸다. 집에서 세상을 떠날 때는 편안히 웃으면서 빈손으로 떠났다.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이 곧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 봄에 그의 얼굴을 보니 시간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은 세계 최장수 국가인데 건강했던 그가 왜 이리 빨리 갔느냐? 그는 건강하나만 믿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열정을 쏟았다. 불같은 불심 하나로 뭉친 그는 흔히 말하는 일본의 양심이었다. 그에게는 절, 집, 사무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가끼루마 스님이 죽고 나니 더 존경스러워졌다. 한국을 위한 그의 마지막 열정으로 북관대첩비를 북한으로 넘기고 떠났다.
북관대첩비 함경도 길주로
국교관계가 없는 북한당국이 북관대첩비의 귀향을 일본정부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다.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일에 가끼루마 스님은 자진해서 나섰다. 남한, 북한, 일본 3개국이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 “이구 전하”가 한국으로 귀향하는데 거리로 나서서 모금운동을 펼쳤다. 그런 조그마한 계기가 연이어지면서 이구 전하는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구 전하는 일본 천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면서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다. 한반도 남북한의 평화를 위해서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로 보내고 싶다.” 이런 사연으로 북관대첩비는 한국을 거쳐서 북한으로 인도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함경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약탈하여 야스쿠니신사 내에 세워두었다. 2005년 10월, 꼭 100년 만에 한국에 되돌아 왔다. 2006년 3월 1일 김대중 대통령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남북한 평화물결로 북한 함경도 길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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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끼루마는 울산동백도
이총과 비총을 시작으로 울산 동백을 한국에 건네 준 일등 공신은 바로 가끼루마 스님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지장원 사찰의 현판에는 울산동백의 뿌리를 밝히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성을 공격한 가등청천 외장이 아침햇살에 피는 아름다운 꽃, 오색팔중 동백꽃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꽃나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여 본국에 가져갔다. 그래서 지장원 사찰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동백을 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차를 즐겼다고 한다. 그 뒤 울산에서는 동백나무가 서서히 멸종되어 갔다. 몇 년 전에 한 한국인이 교토를 관광하다가 사찰의 현판에 적힌 신기한 나무를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울산에 있었던 동백나무는 이 사찰에는 자라고 있고, 왜 울산에는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고향인 울산에는 동백나무가 멸종되었지만, 일본의 한 사찰에서는 아름드리 자라고 있었다.
이 기막힌 소식에 울산시는 거국적으로 정부 당국을 통하여 일본에게 울산동백의 분양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지장원의 주지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면서 한마디로 묵살을 했다고 한다. 일본 스님들의 권위는 우리나라 스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kbs 울산지국장은 삼중 스님을 찾았다. “스님! 거대한 이총도 옮기셨는데 울산동백 나무 한 뿌리만이라도 해결해 주시죠!” 삼중 스님의 저력을 믿었다. 삼중 스님도 이런 뜻을 바로 가끼루마 스님에게 전달했다.
가끼루마 스님은 삼중 스님의 부탁에 곧장 지장원을 찾아갔다. 지장원 주지를 진심으로 설득했다. “임진왜란 때 약탈해 온 동백이지 않느냐? 그 가지 하나 받아가겠다는 데 무엇이 그리 문제가 되겠느냐? 뿌리 하나만이라도 돌려주자.” 그의 설득에 주지는 응했다. 주지의 승낙이 떨어진 날, 삼중 스님은 일본으로 날아갔다. 가끼루마 스님이 동참한 가운데 울산동백 몇 뿌리를 지장원 주지에게서 받아왔다. 울산시청에 심었던 그 동백나무는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또한 울산시 광장에서도 잘 자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겨우 뿌리 몇 개만을 분양받았는데 지장원의 울산동백 나무는 그 날부터 시들시들해졌다고 한다. 동백나무도 고향에 돌아오니 자신의 자리에서 아주 잘 자랐다. 삼중 스님은 며칠 전 울산 시청 앞에서 아름다운 동백나무를 보면서 가끼루마 스님을 위해 기도를 했다. “고마운 분! 하늘나라에서 복을 받으시길!”이라고.
사천에 이총의 안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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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 스님은 그 뒤 그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는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부인이 대신해서 나왔다. 암수술을 뒤늦게 해봤으나 수술경과는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부인은 6개월 이상 견디지 못한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보여주었다. 삼중 스님은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인 한 사형수가 만들어서 선물해 준 염주를 머리에 대고 누워있었다. 삼중 스님이 방안에 들어서니 일어났다. 예의가 깍듯한 그는 겨우 일어나서 삼중 스님을 반가워했다. 부인의 애절한 눈빛에서는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읽혔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인 듯 했다. 그리 쓰러지니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었을 것이다.
삼중 스님은 돈을 몇 푼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었다. 약간의 돈은 준비했으나 너무 중태인 병환에 액수가 너무나 빈약했다. 삼중 스님이 준비해서 가져갔던 돈의 10배는 더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 때만은 꼭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들의 눈은 간절했다. 특히 도시마 부인의 눈빛에서는 절절했다. 누워서 허덕이는 그와 도시마, 두 노인네의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삼중 스님은 그때만큼 돈이 절실한 적이 없었다.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돈의 위력을 절감했다.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과의 많은 만남에서 한 번도 돈을 드린 적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는 마지막 돈으로 도와드리고 싶었다.
암수술로 죽어가던 그에게
“스님! 안중근 의사 친필이 정심사에 3점이 있지 않습니까? 사진까지 합하면 70여점이나 되지 않나요. 정심사 조카 주지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삼중 스님은 뼈만 앙상한 그에게 엉뚱한 말을 건넸다. 측은한 마음에서 일부러 강한 어투로 그의 정신에 승부를 걸었다. 안중근 의사의 친필 반환운동에 그는 몇 년 전부터 매달리고 있었다.
“...... 아~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스님이 마지막 일을 하기 위해서 일어서십시오. 그 친필이 반환만 된다면 내가 스님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정부도 도와줄 것이오! 한국에서는 내가 스님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겠소!”
삼중 스님은 그 당시의 자신의 심정을 토해냈다. “야~ 이놈아~ 너 참! 야비한 인간이로구나.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무슨 일을 거들면 도와주겠다는 말이 나오느냐! 한국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던졌던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더냐. 그 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느냐.”
“삼중 스님! 내가 해 내겠습니다. 난 자신 있습니다. 조금 나아지면 곧장 정심사 주지를 찾아가겠습니다.”
가끼루마 스님의 눈망울은 다시 초롱초롱 빛났다. 죽어가던 눈매에서 다시 자신의 열정에 빛이 발했다. 삼중 스님은 그에게 고단한 숙제를 남기고 싶었다. 죽어가는 생명의 불꽃을 연장시키고자 했다. 일본인으로 한국을 위한 그의 내면을 파악하는 사람은 오직 삼중 스님뿐이었다. 현실은 그를 차갑게 냉대했다. 일본에서는 가끼루마 스님을 자국의 이익을 배반하는 이방인으로 치부했다. 역사적으로 귀한 도움을 받은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은 가끼루마 스님을 지나가는 이방인인양 지나쳤다. 삼중 스님은 준비해 간 돈을 건네주지 못한 채 한국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별의별 생각을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이 시기가 가끼루마 스님을 도와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것이다. 가끼루마 스님의 미담을 기사화해서 모금운동을 전개해 볼까? 그래서 그에게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그러나 막막하다. 신문사를 겨냥한 미담 기사에서 과연 모금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가끼루마스님의 훈장?
금년 4월, 삼중 스님은 문화관광부 직원과 동행하여 일본을 방문했다. 그 시기에 가끼루마 스님을 다시 만났다. 며칠 후 다시 병원에 들어간다는 그의 눈망울은 아직까지 살아 빛났다.
“스님! 제가 일본 형무소에 가서 교화 강연을 하러 갑니다. 스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삼중 스님은 그에게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던지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삼중 스님! 제 인생에서 형무소 교화를 한 번이라도 하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각오를 다짐했다. 그런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힘은 점점 빠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안타까운 모습에 삼중 스님은 문화관광부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저 사람 한국정부에서 훈장이라도 하나 주어야 합니다. 저리 아픈 몸으로 뭔가 한국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문화관광부 직원도 감격했다. 자신이 듣고 본 상황들에 대한 보고서를 잘 작성해서, 가끼루마 스님에게 훈장이라도 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다.
“저런 스님에게 한국정부는 어떤 대접을 해 주었나요?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훈장 하나만이라도 저 분께 고마움을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가끼루마 스님은 이 말 한마디에 감격해서 울먹였다. 자신을 그토록 인정해주는 삼중 스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욕심 없이 잘 살아 왔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삼중 스님이 부족한 저에게 칭찬의 말씀을 들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훈장”을 받는 것처럼 한없이 기쁩니다.”
그는 삼중 스님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스쳐지나가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가 좀 더 두 분을 모셔야 되는데 이만 들어가야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다음 번에 꼭 제가 두 분께 저녁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더 이상 무너지는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가끼루마 스님, 제가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몸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문화관광부 직원은 정중히 가끼루마 스님을 문밖까지 배웅했다. 그 노인네의 비틀거리는 모습이 그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사실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정말로 죽기 전에 한국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노인네에게 안기고 싶었다. 며칠 후 그가 병원에 재입원 했는가를 묻지도 못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그에게 돈 몇 푼이라도 전해 주어야 하는 현실에서 삼중 스님은 그대로 일본을 떠났다.
가끼루마는 먼 여행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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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연락할 형편이 아니었다. 가끼루마의 자식들은 ”아무도 오지마라. 우리 아버지는 한국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우리 가족의 희생을 생각하면 울분이 터진다. 한일관계자들은 오지마라.”는 자식들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었다. 도시마 부인은 “이제는 추모회를 드리고 싶다. 힘이 든다. 여러 가지로 어렵다. 그러나 꼭 추모회 모임은 하고 싶다. 삼중 스님은 꼭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부탁을 전달했다고 한다. 갑작스런 부음 소식에 삼중 스님은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일본에 가려면 넉넉한 준비를 필요로 했다. 시간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러 모로 신경이 쓰였다. 먼저 계산이 앞섰다.
삼중 스님은 장 사장의 전화에 선뜻 일본에 간다는 승낙을 하지 않았다. “스님 가셔야죠”라는 당연한 어투에 “조금 있다가 연락하겠다”면서 일단 전화를 끊었다. 장 사장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삼중 스님은 자신을 탓했다. “참 나쁜 놈이다. 가끼루마 스님과 너와는 어떤 관계더냐? 이총을 생각해 봐라. 모든 일들을 전폐하고라도 네가 죽지 않는 한 가야하지 않겠느냐? 가자!”는 결정을 몇 분 내로 내렸다. 한국에 있던 일정을 다 취소했다. 돈 문제는 비상금이라 털어서라도 일단 쓰자는 심사였다. 돈은 이럴 때 써야 한다는 결정은 손쉬웠다. 이런 결정으로 마음이 후련해졌다. 통역자 없이 일본에는 가지 못한지라 장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장 사장도 일정을 조정하여 함께 추도식에 가자는데 뜻을 모았다.
추모사 호령 “가끼루마 가이죠!”
추도식의 통보를 3일 전에 받아서 모든 일들이 뒤섞여졌다. 삼중 스님을 보좌하기 위해 장 사장과 부인도 일본으로 함께 떠났다. 장 사장이 고맙게도 모든 경비를 떠맡아 주었다. 일본에 가서 보니 “정말로 참 잘 왔다!”는 표현이 맞았다. 추도식에는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모였다. 삼중 스님이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을 뻔 했을 것이다. 추도식장에 내려가면서 삼중 스님의 머릿속에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내가 추도식장에서 망신당하는 게 아니냐? 누군가가 한국을 위해서 그리 일했는데 병원 한 번 오지 않느냐는 봉변(?)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조용히 당해야지!”
추도식에는 일본 대승정, 여승, 민단 대표자 등 추도사는 계속해서 연이어졌다. 삼중 스님을 호명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삼중 스님은 또 한 번 생각이 스쳤다. “그래! 유족들의 아픔은 클 것이다. 세상에 그리 한국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병문안 한 번도 가지 않은 땡중을 누가 호명해 줄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다니. 내가 여기서 추모사 하겠다고? 안되지! 참회사를 해야지! 입하나 방긋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있다 떠나자!” 그 때 한 일본스님이 삼중 스님을 향해서 “저기 한국에서 오신 스님이 한 말씀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추모사에 동참시켰다.
추모사로 연단에 자리한 삼중 스님은 가끼루마 스님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섰다. 추도식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어딘지 냉랭했다. 서자마자 곧바로 고함을 질렀다. “가끼루마 가이죠(회장). 가끼루마 가이죠!, 가끼루마 가이죠!,” 영정을 향해 3번의 고함을 쳤다. 가끼루마 스님은 일한불교협회 회장으로, 삼중 스님은 한일불교협회 회장으로 만났다. 그러니 스님과의 호칭은 자연스레 가이죠(회장)로 호칭했다. 통역이 진행되기 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일본인들은 추도사를 영정을 등진 채 서서는 조그마한 소리로 흐느끼면서 가만가만히 진행했다. 그런데 삼중 스님은 영정을 바라보면서 고함부터 질렀다. “저게 미쳤나? 아니 웬 고함을 저리 질러?”하는 눈초리들은 삼중 스님의 등판에 꽂혔다.
“가끼루마 가이죠는 왜 한 장의 사진으로 탁자 위에 점잖게 앉아 있습니까? 빨리 내려오시오. 한국에서 삼중이라는 땡중이 왔는데 이게 뭐요! 빨리 내려와서 손을 잡고 끌어안아 줘야 되지 않소! 당신은 항상 그리해 주지 않았소! 행동하는 일본의 표상, 육신은 갔지만 모든 한국인의 가슴엔 새길 것이오. 당신은 잘 들으시오! 일본이 저지른 역사의 만행에 대해서 한국인에게 생명을 바쳐서 뜨겁게 참회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인구가 1억 2천인데 왜?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습니까? 당신이야 말로 참된 인격자였소! 돌이켜 봅시다. 일천 사오백년 전, 한국은 일본에게 불교를 전해 주었습니다. 불교 뿐 아니라 한문, 천문, 지리, 미술, 공예, 건축, 음악, 심지어는 점복술까지 당신 일본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사실상 일본의 뿌리는 한국문화가 모국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은혜를 갚았습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많은 한국인들의 귀, 코를 끊어서 전시기념비인 이총을 세우지를 않나, 당신들은 은혜를 짐승처럼 대했잖소! 당신이 한일 3대 아픔을 푼 장본인이라서 더욱 알지 않소! 이총, 비총, 울산동백, 북관대첩비 당신 손에서 한국인들에게 되돌려 주었지 않았소! 그런 인생 마감에 당신과 동참을 하게 되어서 그 동안 참으로 행복했소! 금강경에 인생은 한마당의 꿈이라고 했소! 도깨비장난같이 인생은 풀잎의 이슬 같은 것이지 않소!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편안히 쉬십시오.”
통쾌한 추모사에 대승정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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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사장은 아주 통쾌한 추도사에 일본까지 온 보람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추도식의 좌중은 삼중 스님의 목소리에 압도당했다. 일본 대승정(90세가 넘은 큰스님)은 연세로 보나, 위상으로 보나 삼중 스님이 대승정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쳤다. 대승정은 삼중 스님의 좌석에 일부러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고맙다. 일본인이 죽었는데 먼 한국에서 와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대승정에 이어 추도식에 모인 대부분 많은 스님들이 삼중 스님의 곁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삼중 스님은 부인 도시마에게 약속을 했다.
“가끼루마 스님의 훈장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힘닿는 대로 한국정부에 노력해 보겠다. 훈장의 추서를 건의해 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가끼루마 스님을 위한 추모비를 경주의 내 사찰에 만들고 싶다. 사찰이 완성되면(지금 건설 중이라서 전제를 분명히 밝혔다.) 가끼루마 스님의 추모비를 꼭 세우겠다. 일본인의 추모비를 한국사찰에 세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것이다. 한국인도 가끼루마 스님을 추모해야 한다. 꼭 약속 지켜질지는 내 건강이 문제이지만 건강도 잘 챙겨서 스님의 넋을 추모하고 싶다.”
부인 도시마는 삼중 스님에게 가끼루마 스님의 머리카락이 담겨진 함을 전달했다. 삼중 스님은 부산 자비사에 함을 모셔놓고 사찰이 완공되면 그의 추모비에 세울 결심을 다졌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니 아주 기뻤다. 마지막이 참 좋았다. 마무리를 잘했다. 일본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그때 갔을 것. 사람 도리를 했다. 형편껏 보탬이 되도록 노력했다. 나로선 일본에 가서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가끼루마 스님이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저 세상에서 들어도 부끄럽지 않는 마음이다!” sungae.kim@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