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에서는 신라의 다른 적석목곽분처럼 금관 이외에 銀盒杅, 청동 솥, 유리잔, 칠기 숟가락, 수 놓은 綾으로 만든 옷 조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제작연대를 기록한 명문이 새겨진 은합우이다. 은합우에는 덮개의 안쪽과 은합 겉 부분 바닥 면에‘延壽’라는 年號가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연호가 정확히 밝혀지면 서봉총의 정체와 절대연대는 물론 신라 적석목곽분 편년의 한 기준이 된다. 신라 고분의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서봉총의 명문에 대해 분석해 왔으나 절대 연대를 올바르게 비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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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합 겉면 바닥에 새겨진 ‘延壽元年太歲在辛’을 해석한 결과 延壽는 高昌國의 연호라는 사실과 연수원년은 고창국 麴文泰 왕이 즉위한지 5년이 되는 해에 연호를 重光에서 延壽로 바꾼 원년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즉 연수원년은 고창국 국문태왕 5년으로 서기 624년이다. 그리고 ‘太歲在辛’은 德이 있어 많은 것을 이룬 明君이 계속하여 재위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명문은 고창국에서 연수원년에 麴文泰 왕이 계속 명철한 성군으로 재위하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기록이라 하겠다. 명문의 해석 내용으로 보아, 서봉총 은합우는 서기 624년에 고창국에서 만들어져 신라에 예물로 보내진 것이라 추정된다. 또한 은합 덮개 안쪽에 새겨진 명문인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은 국문태 왕이 즉위한지 5년 되는 연수원년은 만물이 무성하기 시작하는 3월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즉 연수원년에 고창국의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어 번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의 연구는 신라에서 금관이 사용되었던 하한연대를 서기 6세기로 보았다. 그러나 '延壽’라는 연호는 고창국의 연호이며, 연수원년은 서기 624년임이 분석되어, 서기 624년은 신라 진평왕(서기 579〜632년) 46년으로 甲申年이 된다. 그러므로 연수원년의 연호 해석을 근거로 볼 때, 서봉총의 묘주는 진평왕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금관이 출토된 무덤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경으로 편년되어 있다. 자연히 금관 또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정되어 연수원년이 서기 624년으로 분석되었음에도 서봉총의 묘주가 진평왕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수원년인 서기 624년에 만들어진 은합우는 적어도 서기 624년 이전에 조성된 무덤에는 묻힐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로 본다면, 지금까지 편년에서 금관이 사용되었던 하한연대가 6세기 전반 경이라는 비정은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금관은 적어도 진평왕이 재위했던 서기 632년까지를 잠정적인 하한연대로 삼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금관이 사용된 하한연대를 7세기까지 내려 볼 수 있는 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신라의 복식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신분에 따른 복식의 차이를 제도화했으나 신라 고유의 것을 고수했다. 경주 백율사 石幢記에 양각되어 있는 이차돈의 순교 당시 입은 의복과 모자가 그 좋은 증거가 된다. 그런데 신라는 진덕여왕 2년에 김춘추가 당에 가서 당의 복식제도를 따르겠다고 말하고 돌아온 뒤인 진덕여왕 3년(서기 649년)부터 당의 복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문무왕 4년(서기 664년)에는 부인들까지도 중국의 복식제도를 따르도록 했다. 실제로 신라초기 토우는 우리민족 고유의 복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관모의 경우에는 변이나 절풍을 쓰고 있고, 웃옷은 긴 겉옷을 입고 아래에는 밑을 댄 통이 넓은 바지와 주름 잡힌 바지나 치마 등을 입었다. 신발도 목이 없는 履를 주로 신었다. 그러나 후대에 만들어진 토우들은 중국 복식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주듯이 관모는 복두를 쓰고 원령의 긴 겉옷을 입었으며 신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진덕여왕 이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양식을 갖는 복식이 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신라 복식제도의 변화 시기를 고려하면, 금관은 진덕왕 2년(서기 648년)에 김춘추가 당에서 돌아와서, 신라 고유의 복식을 중국의 복식으로 바꾸기 시작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덕왕 3년부터 관모는 모두 중국의 관모인 복두로 바꾸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왕이 사용했던 금관도 더 이상 만들지 않게 되었고, 금관은 사라져갔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므로 금관이 사용되었던 하한 연대를 7세기초기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은합우 명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결과가 서봉총의 절대연대를 밝히게 되었으므로 신라적석목곽분의 편년과 더불어 신라 금관의 하한연대 설정에도 좋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학자들에 의하여 서봉총에 대한 연구가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으나 일본인 학자들의 해석범주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발굴 당사자였던 일본인에 의해 붙여진 서봉총의 국적 없는 명칭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은 물론, 그들이 만들어낸 신묘년이란 간지 설정에 매달려 헛된 연대 해석에 몰입해 왔다. 그러므로 이제 서봉총이라는 조작된 이름에서 해방되어 진평왕릉이라 일컬어야 할 것은 물론, 신라 사람들의 혼이 담긴 신라금관의 자리매김도 새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봉총 금관은 진평왕이 썼던 왕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마땅하다.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