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실린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
부천에 관련하여 우체모탁국을 소개한 글을 보면, 글자가 4개의 글자 중에서 무려 50%에 해당하는 2개나 오자가 있다. 體자가 휴休자로 잘못 표기되어 있고, 涿자가 琢, 濁 자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體자가 休자로 잘못 표기된 것은 體자의 간자체인 体로 썼다가 本자에서 가로 그은 획이 하나 탈락하는 바람에 休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체모탁은 “청구靑邱의 탁수涿水에서 온 소를 기르던 부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청구의 탁수에서 소를 먹이던 사람들’이라면 그곳에서 목축을 하면서 농사를 지었던 부족으로 볼 수 있다. 탁수라면 탁록涿鹿에 있는 강이다. 그들이 소를 기르던 부족이므로 우가牛加라 부를 수 있다. 우가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울 때 핵심세력이 된 부족이다. 마가馬加(말을 기르는 부족), 양가羊加(양을 기르는 부족), 저가猪加(돼지를 기르는 부족), 구가狗加(개를 기르는 부족)와 함께 오가부족五加部族에 들어갔던 부족이다.
그런데, 우체모탁優體牟涿의 우체優體란 무슨 뜻일까? 우체는 소를 미화해서 표현한 문자로 볼 수 있다. 우체牛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체모탁의 涿자는 돼지에게 물을 먹이는 물가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돼지를 기르는 부족을 돼놈이라 불러왔으므로 탁록에 우가와 저가가 함께 섞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모탁牟涿이라는 말에 “소가 음매애 을고 돼지가 꿀꿀거리는 강가”라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평화롭던 고장에서 상고시대 최대의 격전이었던 탁록대전涿鹿大戰이 있었다. 치우천왕과 황제가 10년 동안 판천阪泉에서 싸워 온 10년 전쟁의 마무리를 이곳에서 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치우천왕이 이끄는 묘족을 주축으로 한 구려족九黎族이 참패를 당하고 치우천왕은 전사하였다. 이때 구이족이 내몰린 곳이 산동반도 일대였다. 산동반도가 구려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구이족이 멸망하면서 화이華夷로 불리는 화하족華夏族이 독립하여 황제국을 세웠다.
BC 2457년에 천일태제天一泰帝가 남은 구이족을 수습하여 단국檀國을 세웠다. 천일태제 다음에 지일홍제地一洪帝가 나와 단국의 제2대 제가 되었다. 다음엔 태일성제太一聖帝가 나와 제3대 제가 되었다. 이분이 나라이름 단국을 BC 2333년에 조선으로 고치고 단군왕검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국도를 청주靑州에 정했다. 여러 부족이 섞여 살았으므로 국도의 이름을 서울, 부여, 평양, 속말수, 아사달, 험독 등 다양하게 불렀다.
BC 238년에 조선이 제47세 고열가단군 때 진에게 멸망하면서 대국 9국, 소국 12국에 3조선 체제로 되어 있던 조선이 사분오열되어 삼한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대에 산동반도에 소를 기르는 나라 모국牟國이 있었다. 모국을 달리 모이국牟夷國이라고도 하였다. 화이족華夷族인 제齊나라가 산동반도 북쪽에서 일어나면서 동이족에 속한 소국들은 제나라에 접수당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또한 산동반도의 남쪽에서 노魯나라가 일어나 소국들을 압박하였다. 이들 두 나라의 침략을 받은 소국들은 한반도로 탈출하였다.
후대에 생긴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태어난 모국牟國과 추국鄒國,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태어난 온국溫國등에 살던 지배층들이 모두 한반도로 탈출하였다. 소도蘇塗를 운영하던 하백河伯 집안도 한반도로 탈출하였다. 하백 집안에서 신라를 세운 소벌도리蘇伐都利가 나왔다. 백제百濟란 국명에는 많은 부족이 제수齊水를 건너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뜻이 있다. 물론 부족 전체가 한반도로 들어왔다고는 볼 수 없다.
소벌도리와 같은 성을 가진 웅역熊繹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초楚나라를 세웠다.
이들이 한반도로 들어온 관문關門이 되는 곳이 소래蘇萊였다. 소래는 소蘇성을 가진 래이족萊夷族이 들어왔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소래산은 이들이 정착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일부가 소래산과 성주산을 넘어서 지금의 부천에 정착하였다. 그들이 그때부터 쓴 나라 이름이 우체모탁국이었다.
<진수지>에 따르면, “기준箕準이 위만의 공격을 받아 좌우에 궁인宮人을 이끌고 도주하여 바다를 건너와 한지韓地 금마金馬에 도착하여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고, 그 백성에게 종자를 심게 하고 양잠을 하고 면포를 짜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각 마을에 장수長帥를 두고, 큰 부족을 이끄는 자는 벼슬을 신지臣知라고 하고 그 다음 크기의 부족을 이끄는 자는 벼슬을 읍차邑借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산과 바다에 흩어져 살았는데, 성곽을 만들지 않았다. 이렇게 산 국國이 우체모탁국을 비롯하여 모두 50여국이었다.
이들 국가들은 국명에 반드시 그들이 떠나온 나라의 이름을 붙였다. 선비국에서 온 사람들은 비卑자를 붙여 선비국에서 왔음을 밝혔고, 월지국에서 온 사람은 월지를 붙여 그들이 떠나온 나라가 월지국임을 밝혔다. 역시 초국에서 온 사람은 초楚자를 붙여 그들이 초국에서 떠나왔음을 밝혔다.
이들이 떠나온 나라가 각각 달랐지만, “남자들은 면포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 사람들의 속성이 상대에게 양보하고 힘을 쓰지 않았다. 또한 무기는 선용하는 데에만 섰다. 여자들은 금은과 옷감을 중히 여기지 않고 검소하였으며 귀걸이와 구슬을 좋아하여 치장하며 동족임을 나타내었다. 인구는 대국은 일만여 가구였고, 소국은 수천 가구였다. 기강이 서있었고, 농사를 짓기 때문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우체모탁국이 <동이전 마한전馬韓傳>에 5번째로 등재된 점으로 보아서 인구가 1만여호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체모탁국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것이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4만 1천 평의 공원용지에서 발굴된 선사유적이다. 1996. 8~2000. 5까지 4차에 걸려 발굴했는데, 약 300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우체모탁국에서 손꼽아야 할 지명은 소래蘇萊, 성주聖主, 노고老姑의 삼산이다. 조선조 명종 때의 사람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은 <은비가隱秘歌>에서 이들 3산을 합쳐서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렀다. <사기史記>에서도 삼신산이 동해(주, 황해) 밖에 있다고 했으므로 격암 선생이 이곳을 삼신산으로 본 듯하다.
현재 소래산은 시흥시에 속해 있어서 부천에 속한 삼신산에 포함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부천이 부천으로 존립하려면 임진왜란 이전의 부천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본다.
필자는 부천과 시흥을 하나의 역사권과 문화권으로 통합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정도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