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의 역사를 한 마디 말로 정리하면, “단군왕검 때에 해시海市였던 팽려彭蠡(양주楊州에 있는 호수 이름, 회수淮水와 바다海 사이에 양주가 있다.)를 떠난 삼묘족三苗族이 세운 팽국彭國의 도성都城 평택平澤”이 된다. 평택과 팽성의 문자를 풀어서 나온 결론이다.
옛날에 삼묘족三苗族이 있었다. 치우천왕을 배출한 인종이 삼묘족이었다. 삼묘족이란 3방향으로 흩어진 묘족이라는 뜻이다. 치우천왕이 탁록에서 황제와 싸우다가 황제를 응원한 응룡족應龍族이 탁록강涿鹿江을 막았다가 터트려 수공을 가하는 바람에 전멸하고 치우천왕의 배후 세력이었던 묘족이 흩어져 삼묘족이 되었다.
삼묘족의 한 갈래가 BC 387년경에 동정호와 팽려호 사이에 살았다. (安王甲午十五年(BC 387) 昔三苗氏 左洞庭右彭蠡<通鑑> 권1 周紀.) 여기가 단군왕검시대에 신시를 열었던 8개의 해시 중의 하나인 팽려해시彭蠡海市였다.
단군왕검이 부도를 세우고 매년 10월에 신시를 열자 각 인종의 대표자들이 신시에 교역할 물품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당시에 신시는 중앙에 조시朝市 1개소, 지방에 해시海市 8개소 모두 9개소를 열었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웠을 때, 팽려는 8개 해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진시황 8년에 조선이 진秦에게 멸망하면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넘어갔다. 이 시대가 중국의 역사에 기록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였다. 산동반도에서 제국齊國이 일어나 산동반도와 산서성, 장강 부근에 흩어져 살던 동이족을 공격하여 거의 다 한반도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 출신의 유명한 손무孫武가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썼는데, 여기엔 조선의 후예인 동이족과 제와의 전쟁이 상당 수 기술되어 있을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팽려에서 이동한 묘족이 평택과 팽성에 정착하였다. 평택은 팽려의 변음으로 볼 수 있다. 팽이 평으로 바뀌고, 려가 택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다. 평택平澤을 팽택彭澤의 변음으로 보는 것이다. 팽택은 <우공禹貢 38장>에 나오는 지명이다.
예장군 팽택현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팽려가 예장군 팽택현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명은 평택에 팽성읍이 있는 것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우공38장>에서 서강과 동강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들어 합해진다고 하였다. 팽려는 예장, 여주, 감강군 3주의 땅을 타고 넘는다. 그래서 파양호라 하였다. (彭蠡地志在豫章郡彭澤縣東 合江西江東諸水 跨豫章饒州南康軍三州之地 所謂鄱陽湖者是也)
지금의 평택에 가면 길음리가 있고, 작은 사거리가 있다. 이 사거리 한쪽에 유치원생들이 놀 수 있도록 만든 작은 공원이 있는데 이름이 탑동공원이다. 건너 쪽에 붕어찜을 잘 하는 허름한 집 한 채가 있다. 평택 오성면에서 낳고 자란 토박이 친구 정숭녕이 1년에 두세 번 친구들을 불러서 붕어찜을 먹으러 간다.
매년 그곳을 가면서 갈 때마다 평택이 변해 가는 것을 본다. 평택에는 6.25동란 때부터 미 공군이 진주하여 군사도시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평택항이 개발되었고, 자동차 수출항이 되었다. 또 해군도 그곳에 와 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삼성과 LG의 공장이 들어오면 평택이 또 변하게 될 것이라 한다.
지금은 서울 용산에 있는 미군부대를 이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일대에는 엄청나게 큰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문전옥답이 많이 수용이 되었는데, 미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민주투사들이 극렬하게 반대데모를 했지만 모두 허사가 되었고, 공사는 진행되고 있다. 역사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다. 용산이 오랜 역사를 가진 군주둔지였으므로 군대가 가지고 있는 주술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백제시대의 군주둔지 연무대가 지금도 육군의 군주둔지로 쓰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평택 또한 그런 이유로 군주둔지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곳이 평택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엔 팽성彭城이라 불렸다고 한다. 팽성이라면 군대가 주둔한 성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사라져 없지만 사각으로 쌓은 팽성이 지금의 미군부대 안에 있었다고 이 고장에서 낳고 자라고 학교도 다닌 나의 친구 이종환은 말한다.
평택이라는 말은 군주둔지를 의미하는 팽성의 땅의 형태를 보고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彭이란 문자에는 군고軍鼓(군대의 북)를 두두려 내는 고성鼓聲(북소리)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팽성(지금의 팽성 미군기지가 있는 곳)은 한반도 중심에서 지나내륙支那內陸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만든 발진기지發進基地이자 한반도의 중심부를 방어하기 위하여 만든 방어기지防禦基地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백제가 지나내륙支那內陸을 경열할 적에 이곳이 백제의 배후기지가 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彭은 배거기排車器로 불리는 군대의 방어무기의 명칭이다. 구루마에 거대한 방패를 설치하여 1열로 세우면 아군을 방어하며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평택이 평지이므로 이런 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옛날에 팽성이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다량의 배거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팽성으로 불렸다고 볼 수 있다. 팽자에는 또한 나라 이름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아마 삼한시대三韓時代 이전부터 이곳에 팽성국彭城國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符都誌> 제15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또 예澧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팔택八澤에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시월 아침에 드리는 제사(朝祭)를 지내니, 사해의 종족들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 종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종족들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받들어 올리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라고 하였다. 이를 가리켜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이때에 산악과 해양의 종족들이 생선과 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의 대부분이 절인 어물과 조개와 가죽류였기 때문에, 곧 희생제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하고, 조상의 은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피에 손가락을 꽂아 생명을 성찰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에 보답하니, 이는 물체가 대신 오미의 잘못을 보상하여 재앙을 멎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육신고충의 고백이었다.
언제나 새해맞이 제사(歲祭) 때에는 물화物貨가 폭주하므로 네 나루와 네 포구에 해시를 크게 열고, 몸을 깨끗이 하여 지리地理를 거울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며, 물성의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또 부도에 있는 여덟 개의 연못 모양을 본떠서 못을 파고, 굽이굽이 휘어 흐르는 물 사이에서 추수감사제(報賽)를 지내고, 모여서 잔치(會燕)하여 모든 물자를 구제하는(濟物) 의식을 행하였다.
그러나 화이는 팔택을 우임금이 양자강 좌우에 만들었다고 왜곡하였다. 팔택의 명칭은 대륙大陸, 뇌하雷夏, 맹제孟諸, 하택荷澤, 영택榮澤, 대야大野, 팽려彭蠡, 진택震澤, 운몽雲夢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