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彌鄒忽은 초기 고구려사와 초기 백제사에 들어가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지명이다. 미추홀에 고구려를 세운 소서노와 추모왕(鄒牟王, 고주몽)이 관련되어 있고, 백제를 세운 소서노의 두 아들 온조와 비류와도 관련되어 있다.
미추홀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쓰던 말을 한자화 하여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는 문자이다. 미彌자에는 ‘사사직도祀社稷禱(사직에 제사지내 소원성취를 기도하다)’, ‘母婢(부인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부르는 말)’ 등의 뜻이 있으므로, 소서노가 추모왕에게 자기를 낮추어 한 말로 볼 수 있다. 또한 미彌자를 弓+爾의 문자로 보면, 활을 가지고 있는 너(女)라는 의미가 됨으로, 소서노와 아들과의 관계를 나타낸 말로 볼 수 있다. 소서노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너’라 불렀다고 볼 수 있다.
추鄒는 추모왕을 의미하는 말이고, 홀忽은 골(谷), 즉 땅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미추홀은 소서노 쪽에서 보면, “소서노와 미추왕의 땅”이라는 말이고, 비류와 온조 쪽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 “네가 사직에 제사하고 기도하여 소원성취하여 얻은 추모왕의 땅”이 된다.
미추홀은 후대에 가서 고구려로 주인이 바뀌면서 이름을 매소홀買召忽로 바뀌었다. 매買자가 ‘산다, 買入하다’는 의미이고, 소召자가 소서노召西弩의 성이므로, “소서노가 추모왕으로부터 산 땅”으로 해석된다.
매소홀은 주인이 신라가 되면서 이름이 소성邵城으로 바뀐다. 소邵는 소씨召氏의 나라라는 뜻이다. 처음에 召와 邵의 두 성이 있었으나, 두 성이 卲로 합치면서 邵가 되었다.(<氏族博考>) 그래서 신라가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잔재를 지우기 위하여 買자와 召자를 버리고 소성邵城이라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백제의 미추홀은 주인이 고구려로 바뀌면서 매소홀로, 다시 주인이 신라로 바뀌면서 소성으로 바뀌었다. 이 세 가지 이름에 삼국시대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미추홀의 지명이 생긴 진짜 위치는 어디일까? 인천시청에서 <인천의 지명을 소개하는 글>에는 미추홀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인천에서 미추홀이라는 지명을 찾으려 한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당연히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소래사람들이 소래에서 미추홀이라는 지명을 찾는다면, 미추홀이 어디인가를 대번에 알 수 있다. 소래가 소서노가 상륙한 곳이기 때문에 미추홀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래蘇萊는 소성蘇姓을 가진 래이족萊夷族이 들어온 곳이라는 의미가 있는 지명이다. 래이족은 산동반도 동쪽에 살았던 인종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제齊에게 땅를 빼앗기면서 소래로 들어와 정착하여 소래포구와 소래산에 그들의 족명 래이를 지명으로 남겼다.
부천의 주산인 성주산 오른쪽에 소래산이 있고, 소래산 밑으로 부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비루와 비리의 두 고개가 있다. 이 두 고개가 비류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인천에서는 “그곳에서 별이 잘 보여 비루와 비리 두 고개 이름이 생겼다”고 알고 있으나, 별은 고어에서 ‘펄’이라고 하였고, 푸를청靑자를 써서 표현하였으므로(예, 北斗七靑), 비루와 비리라 하지 않고 프르라고 했어야 하였다. 강화도에는 별밭 마을이 있는데, 별밭을 성전星田으로 표기하고 있다. 부루고개와 비루고개를 강화도의 표기법대로 따라 한다면 별고개로 불러야 하는데, 그렇게 부르지 못한 이유는 이 고개가 비류가 넘어간 고개이기 때문일 것이다.
<輿地圖書>(영조 36년 발간 1760)에는 인천의 문학산성文學山城을 미추왕고도味鄒王古都라고 하였다. 필자도 이 글을 인용하여 한동안 미추왕이라 쓴 적이 있으나, 실은 미추왕이 아니라 추모왕鄒牟王이라 해야 맞는다. 추모왕은 산동반도에 있었던 추국鄒國과 모국牟國 출신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곳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 “비류가 도읍하던 곳”으로 명기하여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 미추홀을 매소홀로 개명한 것으로 보아서, 이 곳도 소서노가 추모왕으로부터 사들인 땅 매소홀買召忽의 일부였을 것이다. 소서노가 이곳에 그의 대리자로 비류를 임명하고, 온조를 데리고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지경을 넓히며 옮겨 갔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지금은 소래를 시흥시(소서노가 소래에 상륙했을 당시에 군포, 안양, 영등포, 서초 일대를 포함하여 잉벌노仍伐奴라고 하였다)가 관장하고 있는데, 당시에 시흥을 포함한 주변 일대의 지명을 잉벌노仍伐奴라고 했던 점으로 보아서, 미추홀을 추모왕으로부터 매입한 소서노가 온조와 함께 토착세력을 정벌해 나가면서 그가 인솔한 백성들을 살게 하여 잉벌노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라고 하겠다. 잉仍자는 人+乃자로 ‘이어 사람을 살게 하다’는 뜻으로 풀이가 가능하고, 벌伐자는 소서노가 토착민을 토벌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노奴자는 소서노로 해석한다. 따라서 잉벌노는 “소서노가 정벌하여 얻은 땅”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문학산文鶴山의 문文자는 천문天文을 의미하는 문자로, 학鶴자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은유하는 문자로 보인다. 문학이라는 문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학을 타고 날아 북두칠성에 접근하는 신선(집안군 오회분4호묘)’을 떠올릴 수 있다. 필자는 이 그림이 무당이 칠성거리를 할 때 무아지경에서 느끼는 트랜스라고 보는데, 문학이라는 말이 이 산에서 소서노가 칠성거리를 함으로써 생겨난 말이 아닌가 한다. 소서노가 문학산에서 천제를 지낼 때 칠성거리를 하면서 생겨난 말로 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