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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복원해 드립니다 -부여

노중평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1/12/27 [19:23]
백제의 처음 국도는 한성으로 순수한 우리 이름으로 곰이라 불렀다. 두 번째 국도는 웅진이었다. 웅진은 곰나루라는 뜻이다. 웅진에도 곰이라는 문자가 들어 있다. 한성의 백제식 이름이 곰이었는데 이 곰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다. 웅진은 지금의 공주다. 공주 다음에 국도가 얾겨 간 곳이 부여다.

한성은 제21대 개로왕 21년 되는 해인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북성을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였다. 고구려는 이때 많은 귀족들이 함께 살해하였고, 8,000명의 백제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이 475년에 웅진熊津으로 천도하면서 즉위하였다.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방어하기 좋은 곳이었으나 도읍으로 비좁아 다시 부여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성에서 함께 웅진으로 데리고 온 백성과 귀족을 아산의 대두산성과 직산의 웨례성 등에 분산하여 살도록 하였다.

문주왕은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에게 살해당하고 해구가 13세 나이인 삼근을 왕으로 옹립하여 국정을 농단하였다. 그가 연신과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씨 세력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해구를 죽였고, 연신은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백제는 성왕 때인 538년에 사비성泗泌城(사비성은 사방이 강물로 둘러싸인 성, 즉 조선 국도의 별칭인 험독險瀆이라는 뜻이 있다-남부여라 하였다)으로 천도하였다.

 

부여扶餘는 백제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고, 그의 아들 문주왕마저 신하에게 시해당하는 등 국가가 혼란스럽고 국력이 더 쇠퇴했을 때 단군왕검의 네 분의 아들 중에서 부여夫餘와 부소夫蘇 두 분의 명호를 쓴 특이한 도성이다. 부여의 扶자에서 부夫자에 수手변을 갖다 붙인 이유는 두 분 부여와 부소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부여를 써서 국도의 이름을 부여라 하였고, 부소扶蘇를 써서 부소산扶蘇山이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당할 때, 사비성에서 최후의 보루가 된 곳이 임천林川에 있는 성흥산聖興山에 쌓은 가림성加林城(501년 동성왕 23에 축조)이다. 부여군의 옛 이름이 가림군加林郡이다.

지명이 가림군이었기 때문에 가림군의 중심에 정림사定林寺라는 절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백제의 지명에서 임林자가 중요성을 띄게 됨으로 임자에 무슨 역사의 비밀이 숨어 있는지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림林은 백제를 건국한 십제十濟 성의 하나인 목성木姓으로 볼 수 있다. 성흥산의 성흥은 목성木姓이 흥하여 왕이 난다는 뜻의 풍수적인 의미의 산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가림성은 가림군에 있는 성으로, ‘목성이 모두 모인 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보면, 백제에서는 십제 중에서 어느 성에서 왕이 나와도 용인한다는 묵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여의 중심지에는 정림사지定林寺址가 있다. 정림사지 역시 목성이 세운 절터로 볼 수 있는 곳, 목성이 세운 국도를 상징하는 절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한 제26세 성왕聖王(523~554)이 목성 출신이었다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성산이라는 명칭도 목성 출신인 성왕이 흥하게 할 산의 의미로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세가 쇠약해져 제30세 무왕(600~641)은 익산益山으로 천도하였다. 익산이라는 익도益都라는 명칭에 주산主山이라는 명칭이 합해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방위를 오방五方으로 구분했는데, 오방은 동, 서, 남. 북, 중앙으로 하였고, 각 방위마다 성을 두었다. 중방을 고사성(사비성),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고 하였다. (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치열해지자 사비성을 아들에게 맡기고 웅진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웅진방령熊津方領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소정방에게 항복하였다.

<구당서>는 의자왕이 소정방에게 항복할 때, “웅진성의 웅진방령 예식이 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백제가 나당연합군과 싸울 여력이 있는 때였다. 예식이 백제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당군은 포로로 잡은 의자왕과 태자를 웅진성에서 부여군 양화면에 있는 유왕산 쪽으로 압송하였다. 유왕산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이 제30세 무왕(600~641)이 천도했던 익산益山이다.



임천면과 양화면 일대에는 당나라로 압송되어 가던 의자왕과 백제군에 관한 구전이 전해 온다.

유왕산 밑 금강에 의자왕을 태운 당 수군의 배가 머물렀는데, 백제군이 유왕산에 잠복해 있다가 공격하여 싸움이 벌어졌고, 백제군은 당의 대군의 위세에 밀려 전멸했다고 한다. 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부여군에서 유왕산축제를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내는데. 그 역사가 일정 때와 6.25 동란 때를 빼고 7백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당서>에서는 백제의 반역자 예식을 예식진禰寔進이라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미루어 보면, 의자왕의 성이 목성이었기 때문에 웅진방령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소정방에게 바쳤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게 된다.예식의 성은 예이다.

나라가 소생할 가망성이 없다고 본 목성 일족은 전원이 농성하던 가림성을 버리고 또 다른 백제가 있는 일본 땅으로 피신하였다.

이 곳 성흥산에 있는 절 대조사大鳥寺의 창건기創建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어느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수도 중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관음조觀音鳥 한 마리가 날아왔고, 관음조의 발밑에 여러 마리의 작은 새가 죽어 있었다. 스님이 놀라서 잠을 깨니, 그가 깔고 앉았던 큰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하였다.

백제의 대조와 관련되는 문자가 일본의 비조飛鳥라는 문자이다. 비조는 대조가 날아갔다는 뜻이다.

대조를 임금이나 임금에 버금가는 분으로 보면 왕의 차상위자次上位者로 볼 수 있다. 차상위자로 볼 수 있는 분이 개로왕(455년~475 재위)의 동생 곤지昆支이다. 일본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있는데, 그 신사가 가아치국(河內國) 아스카군(安宿郡)에 있는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이다. 그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아스카베노미야스코씨(飛鳥戶造氏)의 조상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대조사의 대조가 일본에 가서 정착한 곤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곤지가 가림군에 있는 목성의 거성居城인 가림성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가서 정착한 곳이 아스카였고, 그는 아스카에서 아스카문화를 꽃피게 하는 씨앗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가림군의 대조사는 일본 아스카문화의 산실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비조가 어떤 새였을까? 일본에서 비조문화시대飛鳥文化時代 다음에 백봉문화시대白鳳文化時代가 오는데, 비조가 비봉飛鳳이라는 의미가 됨을 알 수 있다. 가림성에서 날아간 비조는 비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을 상징하는 새가 봉황鳳凰인데, 봉鳳은 남이고 황凰은 여이므로 일본(왜)에서 곤지가 봉으로 상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멸망할 때 성흥산에 나타난 대조는 곤지를 상징하는 대조와는 다른 대조로 볼 수 있다.

스님의 꿈에 보인 대조는 관음조일 리가 없고 언제나 동이족(조선족)을 괴롭혀 온 매(응鷹)를 인종 아이콘을 가지고 있는 제곡고신帝嚳高辛의 아들 지摯를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의 소정방을 매로 본 것이다. 그의 발밑에 있는 여러 마리의 작은 새는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당한 오방성五方城으로 볼 수 있다. 신라불교가 백제불교를 왜곡시켜 관음새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미륵보살상은 언젠가 백제가 다시 일어설 것을 보장해 주는 미륵불로 볼 수 있다. 그 형상이 괴이하게 생긴 것은 분노로 들끓고 있는 백제인의 심중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일대의 지명이 양화나 충화인데 한자로 어떻게 썼든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점령한 신라의 진무정책鎭撫政策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역심逆心으로 들끓고 있는 백제인을 양민화良民化 시키고 충민화忠民化 시킨다는 신라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해상록海上錄>에 속한 풍토기<風土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백제가 멸망하자 임정臨政 혹은 임성琳聖이라 하였다. 태자太子 형제 세 사람이 신미년(671, 신라 문무왕文武王 11)에 배를 타고 왜국에 들어와 일곱 주州의 태수太守가 되어 혹은 대내 좌경대부大內左京大夫가 됐다 한다. 주방주周防州에 도읍하였다. 그에 대한 찬사讚辭가 있다.

 

부상국(일본)에 배를 대고 / 船寄扶桑

주방주(변방주의 다다량포多多良浦)에 수레를 머물렀네(난을 피해 왔다는 뜻) / 車停周防

족보는 삼한(조선)의 계통이요 / 譜系三韓

핏줄은 백제를 이어 받았네 / 瓜瓞百濟

 

임정臨政이라는 말은 출신과 신분을 속이기 위해서 위장한 문자로 보인다. 임정林政-목정木政을 바꾸어 썼다고 볼 수 있다. 임정臨政을 임정林政으로 바꾸면 목성 출신의 누군가가 가림성에서 가졌던 관직이 임정이었다고 볼 수 있게 한다. 가림성이 있는 곳의 지명이 군사리郡司里인데, 군사라면 오늘날의 군청郡廳 정도의 행정관서로 볼 수 있는 지명이다. 또한 이 곳에 목성木姓의 씨족군대氏族軍隊가 주둔해 있었을 것이므로 군사리軍司里로 볼 수도 있다. 군사라면 사령부나 국방부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림성이 목성木姓의 거성居城이었음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 임성琳聖이라는 문자에서 나타난다. 王 +林자는 목씨들의 왕이라는 뜻이다. 목씨들의 왕이 성흥산聖興山에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림성에는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가 악전고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풍토기>에서, 태자의 형제 세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의자왕의 태자는 부여융扶餘隆 (615~682)이고, 그는 644년(의자왕 4)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웅진성이 함락될 때 의자왕과 함께 당의 수도 뤼양으로 끌려갔다가 후에 웅진도독으로 있었다. 후에 당에 소환되어 죽었다. 따라서 그가 <풍토기>에 나오는 태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본문에 기록된 시는 목성 일족이 성흥산을 떠나서 일본 땅에 정착하였을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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