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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서기 전 37년 주몽에 의해 재건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주몽의 사당이 있다는 기록은 옳을 것이다. 주몽왕은 고구려를 건국한 뒤 고조선의 영토만의 병합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천하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다물이념(多勿理念)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건국 다음해부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이 전쟁과정에서 고조선이 붕괴됨에 따라 고구려는 고조선에 속해 있던 나라들뿐 만 아니라 선비 및 왕망이 세운 신(新)의 고구려 현을 병합하고 동한의 요동태수를 물리쳤다. 이 같은 사실들로 보아 고구려는 고조선에서 사용하던 무기와 갑옷이 사당에 보관된 것은 다물이념을 실현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고구려인들의 의지는 갑옷의 생산에도 큰 발전을 가져왔다. 그 예로 고구려는 요서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동천왕 20년(서기 247년) 위나라의 관구검과의 전투에서 철기 5천명을 거느리고 싸워 승리했는데, 이 철기(鐵騎)는 바로 병사와 말이 모두 갑옷을 착용한 군사를 말하는 것이다. 고조선시대에는 병사들만 입던 철제 찰갑옷이 여러나라시대로 오면서 전쟁이 빈번해지자 말에게도 입혀진 것으로 그 갑옷의 우수성은 물론 생산력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보장왕 4년조의 관련기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세적이 밤낮으로 12일을 공략해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태종이 정병을 이끌고 수백 겹으로 에워싸며 이세적을 지원해도 결국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요동성의 주몽왕 사당에 전연 때 하늘이 내린 갑옷과 창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세적의 공략이 다시 시작되고 성안이 불안해지자 고구려는 소문을 이용하는 전법을 썼다. 즉, 미인을 부신(婦神)으로 꾸며 추모왕이 기뻐하시니 성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성안의 군사와 백성을 안심시키는 한편 용기를 북돋는 것이다. 이세적이 석포로 공략하자 성안에서는 그물로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 금칠을 한 갑옷을 입은 백제군사가 당을 돕고 있었다. 태종과 이세적은 백제 군사가 입은 갑옷이 햇빛에 번쩍이는 것을 보고 화공(火功)을 생각해냈고, 결국 요동성은 화공으로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사는 요동성에 이어 안시성을 공략했다. 다급해진 고구려는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 및 말갈병 등 15만을 안시성으로 보냈지만, 결국 이들도 패배하여 고연수와 고혜진은 남은 36,800명을 이끌고 투항하고 남은 말갈병 3,800명은 모두 생매장 당했다. 이때 당이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은 말 5만 필과 소 5만 필 및 명광갑옷 1만으로, 갑옷의 생산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구원병은 이렇게 투항했지만 안시성만은 끝까지 지켜 당태종을 회군하게 했다.
중국의 경우 동한시대에는 진제국시기 사용했던 가죽 갑옷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 윗부분은 철갑으로 하고 가슴부분에는 원형으로 된 찰을 이어 물고기비늘모양 갑옷을 생산했다. 동한에서 삼국시대로 바뀌면서 철개(鐵鎧)의 제작이 활발해지는데, 이 철개를 강개(剛鎧)라고도 한다. 이 철갑옷은 양진시대에 주로 사용하던 용수개(筩袖鎧)와 같은 것이다. 용수개는 동한의 개갑에서 발전한 것으로, 아랫부분이 넓은 찰을 물고기비늘모양으로 연결하여 갑옷을 만든 것으로 앞과 뒤가 이어져 있고 어깨부분에 어깨를 보호하는 좁고 기다란 소매가 있어 용수개라고 불린다. 삼국양진남북조시대는 전쟁의 확대와 함께 북방의 소수민족들이 대거 남하하여 황하유역의 한족과 섞여 거주하면서 이들의 생활습속은 점차 융합된다. 이에 따라 한족은 좁고 긴 소매의 짧은 웃옷과 허리띠가 있는 호복을 입기 시작했다. 용수개도 이 같은 호복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용수개는 서기 280년 서진이 전국을 통일한 후 개갑의 주요 양식이었음이 서진묘에서 출토된 도용을 통해 확인된다. 동진(서기 317〜419년)에서도 용수개는 크게 유행한 갑제였는데, 넓은 긴네모모양의 갑편을 연결한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중국에서 갑옷으로 용수개를 주로 생산했던 것과 달리 고구려 갑옷의 특징은 매우 다양하다. 갑옷을 구성하는 찰의 상부가 원형으로 된 것과 긴네모모양 소찰의 아래쪽이 원형으로 되어 있는 것, 또는 좁다란 긴네모모양의 찰로서 구성된 것 등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갑옷이 다양한 찰들로 구성된 점은 중국의 용수개의 경우처럼 단순히 윗부분만을 보호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무사들의 역할과 기능에 따른 활동의 차이를 고려하여 다양하게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이 같은 찰의 형상들은 실제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동태자유적‧우산하 41호 고분‧요녕성 심양시에 위치한 석태자 고구려산성유적‧요녕성 무순시에 위치한 고이산성유적 등에서 출토된 철찰 즉, 철로 만든 갑옷조각편들에서 확인된다.
고구려의 다양한 양식의 찰로 만들어진 갑옷은 그 형태도 보병과 기병 또는 사용하는 무기에 따라 갑옷의 양식이 다르게 만들어졌다. 즉 갑옷의 형식은 크게 저고리와 바지로 구성되는데 저고리의 허리부분에 띠를 매어 갑옷이 몸에 맞도록 했다. 갑옷 저고리와 갑옷 바지를 다 입는 경우, 갑옷 저고리만 입는 경우 또는 두루마기 형식으로 된 긴 갑옷 등이다. 이들 갑옷 저고리는 소매가 있는 것, 소매가 없는 것, 또는 소매 길이가 긴 것과 짧은 것으로 구분된다. 이들 갑옷은 공통적으로 모두 목 부분을 보호하는 경갑(頸甲)을 했다.
이러한 고구려 갑옷의 다양한 내용은 중국이 일률적으로 거의 같은 모습의 용수개를 입은 것과 달리, 고구려의 갑옷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의 구성과 역할에 따라 그들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투구의 경우도 중국의 경우 용수개를 입은 무사는 귀가 덮인 투구를 썼다. 이 투구들은 주물 쇠투구이거나 가죽투구이다. 반면에 안악 3호분 벽화의 행렬도 좌우에 배치된 개마를 탄 무사가 쓴 투구는 용수개에 쓴 투구와 비슷하게 귀에서 목 부분까지 완전히 가리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투구는 그 표면이 찰갑옷과 같이 소찰의 철합 상태가 표현되어 있고, 얼굴면에 속하는 투구의 가장자리는 붉게 채색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용수개에 쓴 투구의 꼭대기에는 긴 끈이 바로 투구 윗부분에 세워서 장식되어 있는데, 고구려 투구의 경우 투구의 꼭대기에는 반원형의 장식을 하고 그 위로 한 뼘 이상의 축관을 세워 그 상단에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원형인 장식을 올리고 여기에 긴 털을 하나 가득 담고 이것을 좌우로 반반씩 갈라 길게 수식했다.
중국은 남북조시대에 오면 기병이 군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갑옷이 더욱 발전했고, 이에 흉갑(胸甲)과 배갑(背甲)으로 이루어진 양당개(裲襠鎧)가 생산되었다. 출토된 도용과 벽화에서 이 시대 기병들이 철량당(鐵裲襠)을 입고 투구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유물인 하북성 봉씨묘 출토의 무사용과 하북성 고씨묘 출토된 도용에서 양당개를 볼 수 있다. 또한 북조 초기의 무덤인 서안 초력파 1호 묘에서 출토된 도용의 경우도 양당을 입었는데, 이는 『송사(宋史)』에서 말하는 “갑기구장(甲騎具裝)”으로 기병뿐만 아니라 말도 갑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갑옷의 모습은 서역의 귀자국의 병사들이 입었던 갑옷의 특징인 가슴 좌우 부분에 물고기비늘 모양의 타원형의 호심원을 짜 넣은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어 이당시 중국의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 위에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갑옷은 그 찰의 양식이 매우 다양하다. 이 같은 찰들로 구성된 갑옷은 군대의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구려의 갑옷에서는 위에 언급된 중국의 양당의 모습이나 초력파 1호묘에서 출토된 도용이 입고 있는 갑옷과 투구 및 말 갑옷의 모습 도는 기남 화상석묘에 보이는 개갑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서역의 영향을 받은 갑옷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고구려가 건국 이후 계속 갑옷을 발전시켜나간 것과는 달리 중국은 동한 이후 철개가 활발히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양진시대에 이르기까지 용수개의 양식만이 주로 사용된 점으로 보아 다양한 변화 없이 그 보급량만 확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고구려의 경우는 중국보다 앞서 뼈갑옷‧가죽갑옷‧청동갑옷‧철갑옷을 생산했던 고조선의 기술을 계승하여 이미 중국보다 앞선 생산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바탕위에서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계속된 대외전쟁을 치루면서 계속 독자적인 형태의 갑옷을 발전시켜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이와 달리, 비록 전국 말기부터 철갑을 생산하기는 했지만 진제국시대 와서도 주로 가죽갑편을 부분적으로 이용한 갑옷만을 생산했다. 서한 무제시기부터 흉노와의 전쟁으로 부분적인 갑옷에서 개갑으로 무장한 기병의 수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물고기비늘모양 갑옷을 생산했지만, 여전히 가죽갑옷이 철갑옷보다 많이 사용되었다. 중국은 주철제조기술도 서한시대에 와서야 비교적 발전하지만 그 수준은 여전히 고조선에 미치지 못했으며, 동한 중기에 이르러 제철제강기술이 비교적 발전하고 양진남북조시대에 와서야 고조선의 수준에 이른다. 양진남북조시대는 북방민족들의 영향으로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호복이 성행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는데, 이 같은 상황은 철갑 양식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면 북방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북위시대(서기 386〜535년)에 속하는 맥적산 맥찰 127굴벽화에 보이는 갑옷과 말 갑옷의 모습 그리고 돈황 285굴 서위 벽화에 등에 보이는 기병의 모습은 가죽갑옷에 철편을 드문드문 박아 넣거나 매우 큰 철편을 연결한 형태를 보여준다. 또한 서방의 영향을 받은 중앙아시아의 명옥(明屋)에서 발견된 것은 희랍무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 같은 북방지역의 갑옷들은 고구려 갑옷의 모습과는 그 찰갑의 형태나 투구 또는 전체의 모습에서 완전히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갑옷과 중국 및 북방지역 갑옷의 또 다른 큰 차이는 목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갑옷은 목 부분을 달리 처리하지 않았거나 투구를 길게 드리워서 덮었을 뿐이다. 북방지역의 것도 목 부분을 달리 처리하지 않고, 갑옷의 웃옷을 높이거나 목 뒷부분의 깃을 올리거나 목 부분을 그대로 깊게 노출시킨 모습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고구려의 갑옷은 안악 2호 고분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목의 윗부분에서 돌려져 앞부분에서 여미게 된 것으로, 귀밑까지를 보호하게 되어 있다. 삼실총 벽화에 보이는 갑옷의 경우는 밑에서부터 위로 벌려져 여며졌다. 감신총에 보이는 갑옷은 목부분을 찰편으로 만들어 두른 모습이다. 고구려의 철갑옷은 어떠한 무기도 방어할 수 있도록 매우 완벽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는 이 같은 찰갑 이외에 단갑을 생산했음이 덕흥리 고분벽화 행렬도와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동구 12호 고분벽화에 보이는 기마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지금까지 출토된 단갑으로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은 전국 말기에서 서한 초기에 속하는 운남성 강천 이가산묘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단갑이다. 이 단갑은 앞가슴과 등 부분은 큰 통판으로 연결되었고 팔 갑옷과 정강이 갑옷의 경우는 전체가 긴통으로 되어 있어 활동성이 고려되지 않은 매우 미숙한 모습이다. 또한 이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상해박물관에 소장된 북위 기마 도용에 보이는 단갑 역시 모두 통판으로 되어 있어 고구려의 단갑과 비교해 볼 때 고구려의 단갑이 훨씬 우수한 기술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갑옷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 또는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갑옷과는 다른 모습으로, 동부여의 갑옷과 마찬가지로 고조선 갑옷의 특징을 계승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개마(鎧馬)의 경우 중국학자 유함(柳涵)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개마의 형상을 4세기 중엽에 속하는 안악 3호 고분벽화에 보이는 기병과 북조초기에 속하는 초장파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개마기용으로 보고 있다. 안악 3호 고분은 유함을 비롯하여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등 그 묘주에 대하여 국내외 학계에서 커다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안악 3호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식의 내용을 분석하여 안악 3호분이 고구려 복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왕릉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더구나 안악 3호분에 보이는 고구려 갑옷의 고유한 특징은 복식방면에서 안악 3호분이 고구려의 왕릉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점은 아래에 서술할 개마의 생산연대와 개마복식의 양식에서도 보완될 것이다.
고구려의 개마는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앞서 생산되었다. 서기 4세기 중엽에 속하는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개마는 중국의 북조 초기에 속하는 초장파 1호 고분의 도용에서 보이는 개마보다 그 연대가 훨씬 앞선 것이다. 그런데 안악 3호분보다 앞선 서기 3세기경에 속하는 강원도 철령유적에서 개마모형들이 출토되었다. 이 개마모형들은 고구려 개마가 보여주는 모습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개마의 출현시기가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아래의 내용에서도 확인되는데, 동천왕 20년(서기 246년)에, “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 같지 못하다. 관구검은 위나라의 명장이지마는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있구나’ 하고 곧 철기 5천을 거느리고 쫓아 가서 쳤다”고 하여 갑옷을 입은 개마기병이 5천이었음을 알 수 있고, 서기 3세기 이전 개마가 출현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서기 3세기 이전에 개마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찰갑으로 된 갑옷의 출현이 이보다도 훨씬 앞섰을 것임을 알려준다.
개마복식의 양식을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개마와 중국 및 북방지역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개마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그 양식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갖는다. 물론 앞선 생산연대를 갖는 고구려의 개마가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려 개마의 형태를 보여주는 실물자료로는 황해남도 신원군에 있는 장수산성의 고구려유적에서 나온 3세기경의 개마모형과 3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편년되는 안악 3호 고분벽화의 행렬도와 매우 비슷한 강원도 고산군 회양군 철령에 있는 고구려유적에서 나온 많은 양의 기마모형들과 갑옷을 입힌 개마들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안악 3호 고분벽화, 약수리 고분벽화, 삼실총 벽화, 개마 고분벽화, 쌍영총 벽화, 덕흥리 고분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장수산성유적과 철령유적에서 출토된 기마모형들 가운데 간혹 등자(鐙子)가 보이고 있어, 고구려의 등자 생산연대가 주변국 보다 앞선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개마는 크게 말 갑옷과 말투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말 갑옷의 경우, 4세기 중엽에 속하는 안악 3호분과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는 약수리 벽화무덤에 보이는 개마의 경우 가죽갑옷과 철갑옷이 함께 나타난다. 안악 3호무덤의 대행렬도에는 철갑옷 대오와 가죽갑옷 대오가 따로 분리되어 행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가죽갑옷의 행렬은 적은 수이며 5세기경에 해당하는 벽화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의 고구려 군대의 개마들은 모두 철갑으로 무장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말투구의 경우 귀막이의 부분이 꽃잎모양으로 된 것과 둥근 모양으로 된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철령유적에서 나온 개마모형들과 삼실총, 쌍영총, 개마총의 고분벽화에 보이는 귀막이는 꽃잎모양으로 장식적인 효과를 나타낸 것이 특징이고, 안악 3호분과 약수리 고분벽화의 것은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고구려의 개마와 5세기 혹은 6세기경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중국 및 북방의 개마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갖는다.
첫째로, 고구려의 개마는 모두 말 투구를 했다. 그러나 함양 저장만 북주묘(서기 6세기경)의 개마기용과 서안 초장파 1호묘(서기 5세기경)의 개마기용 및 북조시대인 서기 5세기〜6세기경에 속하는 하남 등현 채회화전도상에서 보이는 개마들은 모두 말투구가 씌워져 있지 않다. 북방지역의 서위 대통 5년(서기 539년)에 그려진 돈황 285굴 서위벽화에 보이는 한 개마의 경우도 말투구가 씌워지지 않았다. 고구려의 말 투구는 아래턱이 자유스럽게 된 금속판으로 만들어졌는데 귀막이와 볼보호용 구조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북방지역의 돈황 285굴 서위벽화에 보이는 말 투구는 말의 앞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철갑으로 감싸고 있어 비교적 자유롭지 않게 보이고 고구려의 말 투구에서 보이는 귀막이와 볼보호용 구조면이 없다. 맥적산 맥찰 127굴 북위벽화(서기 5세기〜6세기경)에 보이는 말 투구는 전체를 철판으로 씌웠는데, 입이나 코 부분이 자유롭지 않게 보이며 역시 귀막이와 볼보호용 구조면이 없다.
둘째로, 고구려의 말 갑옷은 서기 4세기경의 고분들인 태성리 1호 고분, 약수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개마들은 아랫부분이 타원형인 철찰을 연결한 찰갑옷을 입힌 것들이며, 나머지는 직사각형의 철찰을 연결한 찰갑옷을 말발굽만 보일 정도로 길게 드리웠고 말잔등에는 갑옷을 덧씌운 모습이다. 맥적산 맥찰 127굴 북위벽화에 보이는 개마는 가죽 갑옷에 철편을 드문드문 박아 넣은 것이다. 함양 저장만 북주묘 개마기용은 6각형의 찰갑을 연결하여 만든 것으로, 말의 몸만을 가리우고 있어 말의 다리부분은 그대로 드러난다. 서안 초장파 1호묘 개마기용은 말의 몸 부분 만 갑옷을 씌우고 말머리와 말의 목 부분은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의 여러 가지 비교로부터 중국이나 북방지역 개마의 형태가 고구려 개마의 형태보다 훨씬 미숙한 것으로 확인 되었다. 고구려 개마의 생산시기가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약 2세기 정도 앞섰다는 점이 실물에서 증명되었다. 따라서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개마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한국의 말 갑옷이 북방지역이나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집안 동구 12호 고분벽화와 장천 2호 고분벽화에 보이는 개마무사들은 정이 솟아 있는 신을 신었는데, 실제로 집안경내에서 철정과 금으로 만들고 청동으로 정을 달아 만든 정(釘)이 솟은 신발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신들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 같은 양식의 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은 것이다.
고구려 갑옷에서 엿볼 수 있는 한민족 고유성의 계승은 그들이 추구했던 다물이념이 단순히 지난날의 고조선 영토만의 병합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같은 실천의 노력은 일반 복식방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복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