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4)

신라와 가야 갑옷이 일본에 준 영향

박선희 교수 | 기사입력 2012/01/10 [13:01]
필자는 이미 기고한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 (1)(2)(3)-고조선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과 고구려 갑옷과 말갑옷이 이웃나라에 준 영향 및 백제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에서 고조선의 갑옷은 여러 모로 우수하고 이웃나라에 비해 기술적으로 앞섰을 뿐 아니라 그 전통이 계속 이어져 고대 우리 민족 갑옷의 전형을 이루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고조선의 갑옷재료와 양식을 그대로 이어 발전시켜 나간 것이 신라와 가야의 갑옷 생산이다.
  
▲ 박선희  교수  ©브레이크뉴스
신라는 한의 진한지역에서 건국되었고, 가야는 한의 변한지역에서 건국되었으므로 신라와 가야는 모두 한의 사회수준을 계승한 나라였는데, 한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상당히 발달한 국가단계의 사회였다. 이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라와 가야의 갑옷은 고조선의 갑옷 생산양식을 거의 그대로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韓)의 진한과 마한 및 변한은 큰 방패를 잘 사용했는데 고조선의 그것을 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진한과 변한에서는 철의 생산이 풍부하여 갑옷과 무기생산을 보다 활발하게 했을 것이다.
 
신라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뿐만이 아니라 일반 평민들도 차기(車騎)와 기물 및 가옥에 이르기 까지 금‧은‧유석‧철‧동‧납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철뿐만이 아니라 금‧은‧유석‧동‧납의 생산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갑옷의 경우에도 철과 유석 및 동 등을 자유롭게 재료로 사용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 유석은 바로 금과 같은 색이 나는 황동(黃銅)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만든 명광개 혹은 금갑이 바로 이 황동으로 만든 갑옷으로 금빛을 띠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재에 유석이 금과 은 다음으로 나열되고 동이나 철 및 납보다 앞에 나열된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은 유석을 귀중한 금속재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신라 고분들에서 철과 유석으로 만든 갑편이 출토되었는데, 출토된 찰갑들이 장방형인 점으로 보아 고조선 갑옷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에서 갑옷과 투구를 생산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보인다. 이를 실제 출토유물에서 확인해보자. 김해지역 출토의 개마무인상 토기에 보이는 말은 마갑으로 무장되어 있고 기사는 단갑과 투구로 무장했으며 방패로 앞을 보호했다. 개마무인상 토기에 보이는 투구는 경주 금령총의 기마 인물상 토기의 무장모습에서 보는 것과 같은 철제 변모(弁帽)형 투구이다. 이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단갑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고조선 갑옷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다 발전시킨 모습이라 하겠다. 또한 서기 4세기경에 속하는 김해 예안리 150호 고분에서도 철제투구를 구성했던 긴 장방형 혹은 윗면이 둥근 장방형의 철갑편들이 출토되었다. 같은 서기 4세기경에 속하는 김해 퇴래리에서는 판갑옷이 출토되었고, 김해 대성동 39호묘에서는 경갑이 출토되었다.
 이로보아 가야에서는 철제 변모형 투구와 찰갑편을 연결하여 만든 투구 및 판갑옷 등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찰갑편을 연결하여 만든 투구양식은 안악 2호 고분벽화에 보이는 무사가 쓰고 있는데 그 실제 유물이 요녕성 무순시 고이산성유적과 조양시 십이태향(十二台鄕) 전력(磚歷) 88M1묘에서 경갑(頸甲)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반도와 만주에 위치한 여러나라들이 모두 고조선의 갑옷양식을 그대로 이었음을 알게 한다.
  
서기 5세기 중엽에 속하는 동래구 복천동 10호와 11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와 경갑 및 단갑, 서기 5세기 후반기에 속하는 고령 지산동 32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 부산시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단갑은 찰갑편의 크기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긴 장방형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밖에 부산시 동래구 연산동에서 출토된 단갑은 삼각형 혹은 장방형 및 방형의 갑편들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이들은 긴 장방형의 갑편으로 연결한 단갑과 비교할 때 연결갑편의 형태가 서로 다르지만 작고 둥근 단추형 철징으로 이음새를 처리한 점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한다. 이 같은 이음새의 처리방식을 고구려의 새로운 기법이 한반도 남부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고조선의 청동장식단추와 철장식단추의 기법을 그대로 계승하여 이은 것이다. 또한 동래‧고령‧부산은 가야가 차지했던 영역으로서 가야의 유물이므로 단갑의 전체적인 형태가 같은 특징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경상남도 의창군 동면의 서기 전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다호리(茶戶里)유적에서는 칠기(漆器) 찰갑편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라에 못지않게 가야의 갑옷생산이 가야의 건국 이전부터 매우 발달한 기초위에서 다양하게 이어져왔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서기 5세기 후반에 속하는 부산시 연산동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철투구와 출토지 미상인 숭전대학교 박물관소장 철투구 및 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 철투구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은 모두 챙이 있고 투구를 구성한 찰갑의 형태가 모두 장방형의 모습이며, 위에 서술한 단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투구의 찰갑과 찰갑의 연결부분에 작고 둥근 장식단추형 철징을 이용하여 장식효과도 함께 하고 있다. 이들 철투구가 한반도의 남부에서 발견되었다는 점과 그 형태로 볼 때 신라나 가야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한 서기 5세기 중엽에 속하는 동래구 복천동 10호‧11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와 서기 5세기 후기에 속하는 경상북도 고령 지산동 32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의 경우 그 모습이 긴 장방형의 찰갑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투구들보다 비교적 긴 형태이며 윗부분을 둥글게 마무리 했다. 이 둥근 꼭대기 부분의 철제복발(鐵製伏鉢)을 북방적인 요소로 보고 몽고발형(蒙古鉢形) 투구라 부르면서, 고구려가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북방지역에서는 둥근 꼭대기부분의 철제복발를 하거나 긴 장방형의 찰갑을 연결하여 만든 투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지난날 일부 학자들이 고구려의 갑옷과 투구가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얻은 결론인 것이다. 오히려 신라나 가야의 투구는 고구려 투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단지 꼭대기 부분의 마무리 모습에서 변형을 보일 뿐이다.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가야의 유적에서 이 투구들과 함께 발견된 경갑의 경우도 투구를 구성한 찰갑과 같은 모양의 찰갑으로 연결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여미는 부분은 신라고분에서 발견된 정강이 가리개와 같은 모습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같은 경갑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경주 인왕동 고분에서 마갑(馬甲)을 덮은 마각화(馬刻畵) 토제품이 출토되고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 마갑이 출토됨으로써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찰갑 기마 무장이 낙동강 유역의 신라와 가야 지역에도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 출토된 갑옷편과 그 부속물들은 그 구성 찰갑의 형태가 고조선의 장방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고 전체 모습에서 고구려 갑옷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고조선의 양식을 계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한반도의 갑옷생산기술은 일본의 초기 갑옷생산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일본에서 서기 4세기와 5세기경에 만들어진 철갑옷과 철투구들은 신라와 가야의 갑옷과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은 도래(渡來)한 대륙 공인(工人)의 제작기술을 응용하여, 또는 도래한 대륙의 공인과 한반도 남부에서 귀화해온 기술자들과의 기술교류에 의하여, 또는 일본의 공인과 조선과 중국에서 도래한 공인을 통합한 공인조직에 의하여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혹은 연산동과 상백리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를 일본의 것으로 단정하고,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방증자료로 삼기도 한다. 중국학자들은 서기 4〜5세기 일본 갑옷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반도의 기술을 이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갑옷들은 중국의 갑옷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고조선 갑옷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고분에서는 고조선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청동제 갑편은 출토되지 않는다. 1872년 오사카(大阪)에 위치한 인덕릉(仁德陵)이라 전하는 다이센고분(大山古墳)에서 금과 같은 청동으로 만든 단갑이 발굴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매장되고 모습만을 그림으로 남겼다. 중국학자 양홍(楊泓)은 이 인덕릉에서 출토된 갑옷의 형태와 화려한 미관으로 볼 때 일본이 철갑옷을 사용하기 이전 단계에 생산된 청동갑옷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이 같은 일본의 갑옷생산 상황은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서기 전 2500년경에 청동기 문화가 출현했고 서기 전 12세기경에 철기문화가 출현했으나, 일본열도에는 서기 전 300년경에 그간 한민족이 이루어놓은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가 한꺼번에 전달되었다. 위와 같은 일본의 갑옷 생산은 이러한 문화 이식현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왜열도에는 이 야요이문화(彌生文化)의 뒤를 이어 서기 4세기경에 고분문화가 출현하는데, 이 문화는 한반도의 가야지역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서기 4세기부터 철정(鐵鋌)이 가야지역에서 왜열도로 전달되어, 일본에서도 이를 이용한 본격적인 철기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 5세기 전반기에 철제 마구류 등이 만들어졌고 서기 5세기 후반에 철제의 갑옷과 투구가 제조되었는데, 이 같은 제조기술 역시 한반도의 가야지역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덕릉에서 발견된 단갑의 재질이 금과 같은 청동이라 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신라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 유석, 즉 황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신라나 가야로부터의 수입품일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나라현(奈良縣) 고조시(五條市) 묘총(猫塚) 고분 출토 철투구, 치바현(千葉縣) 기사라주시(木更津市) 출토 철투구, 시가현(滋賀縣), 신카이(新開)고분, 오사카부(大阪府)의 칠관(七觀)고분, 사이마다현(埼玉縣) 고라마초이(兒玉町) 쿠노산(生野山)고분에서 출토된 단갑 등은 가야의 유적인 동래 복천동 10호와 11호 고분의 유물과 거의 일치하며, 나라(奈良)지방의 초기고분은 입지조건‧내부구조‧장법 등에서 한반도의 가야 고분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은 이 유적과 유물의 주인공들이 한반도의 가야계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일본에서 출토되는 갑옷과 투구들은 한반도로부터의 수입품이거나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이주한 가야인들이 한민족의 발달한 문화를 그곳에 전달했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기고한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 (1) (2) (3) (4)를 통해 고조선의 갑옷양식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여러나라시대의 갑옷양식들은 중국과 북방지역은 물론 일본의 갑옷 생산에 크게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고대 갑옷은 모두 고조선 문화에서 확산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갑옷을 중심으로 복식사를 검토할 때, 고조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민족의 고대문화가 일정한 한류를 형성하며 동아시아 지역문화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