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엘공원에서 버스를 타고 성당 바로 옆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차를 하고 5분 남짓 걸어가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점점 다가오는 느낌은 설레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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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바로 앞 면전에서 만나게 된다면 마음의 준비나 호흡을 할 시간도 없이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첨탑 꼭대기부터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며, 타워크레인이 좌우를 날개 짓 하듯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는 놀이 동산의 기차가 서서히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같은 긴장감과 설레임이 동시에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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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멀리서부터 다가갈 때에는 아름다움보다는 성당의 엄청난 규모에 입이 먼저 벌어졌다. 하지만 구석구석 어느 하나 버려질 것이 없는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진 그 형체와 섬세함이 눈에 들어 올 때쯤에는 설레임을 넘어선 경이로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만난 가우디 연구기관의 관장께서 말하기를 가우디를 성인(聖人)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그저 위대한 건축가이자 공학자이며, 자연을 사랑하고 미래를 꿈꾸었던 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를 성인 시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상업화를 위한 비즈니스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는데 사실 성당을 보는 그 순간에는 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건축물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처럼 보여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본 사람은 누구나 가우디를 성인으로 추대하는데 반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곳 사그라다 파밀리아에는 가우디코드라는 것이 있다. 어찌 보면 이 때문에 더욱 그를 성인 시 하는 지도 모르겠다. 굳이 왜 어렵게 그런 코드를 집어 넣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다. 하긴 그가 만든 건축물들 중에 의문점이 있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 그 또한 낯선 일은 아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는 크게 세 개의 파사드로 구분을 한다.
가우디가 생전에 완공을 한 탄생의 파사드와 자신이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미리 알고 설계해둔 수난의 파사드, 그리고 지금 여전히 공사중인 영광의 파사드.
탄생의 파사드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가우디가 애용했던 곡선을 주로 활용해서 만들어졌으며, 가우디 사후 가우디의 설계도에 따라 1980년에 완공된 수난의 파사드는 이름만큼이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각이 지고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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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이 공교롭게도 부활절이다. 그 수난의 파사드 왼쪽 벽(바라보는 방향)에는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유다의 키스상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엔 4×4 크기의 마방진처럼 생긴 숫자판이 있는데, 그 숫자를 잘 보면 이 숫자판은 마방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숫자판의 숫자들 중에는 "10, 14" 와 같이 중복된 숫자들이 있는데, 이는 1부터 16까지의 숫자가 한 번씩만 들어가야 하는 마방진의 규칙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우디는 왜 숫자들을 저렇게 배열했을까?
혹시 저 숫자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신기하게도 저 숫자판의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은 모두 33이다. 이 숫자판으로 33이란 수를 만드는 방법은 무려 310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33이란 숫자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33이란 매우 신성한 숫자인데, 요셉이 성모 마리아와 결혼한 나이가 33세였고,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진 나이가 33세였으며, 창세기에서 예수가 나오는 횟수가 33회였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 횟수가 33회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가우디코드를 엽서로 만들고 상품으로 만들어 성당을 짓는 기금으로 활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스페인 정부에서는 관광수요를 위해 공사기간을 지속적으로 늦추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특히 이곳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찾는 관광객이나 우리 '꽃보다 중년'들도 그것이 사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저 가우디의 염원이 무사히 이루어지길 소망할 뿐이다.
「성가족 성당」즉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1866년에 처음 계획되었다. 기계화와 근대화로 점차 타락해져 가는 도시생활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집'뿐이라고 확신했던 한 출판업자의 염원에서 출발한 「성가족 성당」은 명칭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가족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계획되었다. 그래서 성당의 주제 또한 예수, 마리아, 요셉 세 사람의 성스런 가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1882년 교구로부터 설계를 부탁 받은 건축가 빌랴르(F. de P. Villar y Lozano)는 좋은 취지의 계획이었기에 돈을 받지 않고 50명의 노동자와 함께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당을 무조건 싸게만 지으려고 하는 교구의 자세에 빌랴르는 환멸을 느껴 결국 작업을 포기했고, 자신의 후임자로 제자인 가우디를 추천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우디가 본격적으로 이 성당의 공사에 참여한 것은 1883년 지하의 납골당 기둥이 반 정도 건립될 무렵이었다.
젊은 건축가가 공사를 맡게 되었으니 건축비를 좀더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교구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가우디가 공사를 맡으면서 빌랴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은 폐기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미 가우디의 머릿속에는 가장 성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통해 카탈루냐의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고싶었고 또한 완벽한 가우디의 성격으로 인해 작업은 결코 '대충'될 수 없었다. 교구의 만성적인 적자는 공사를 종종 중단시키는 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공사의 느린 진행은 오히려 가우디에게 종교적인 상징을 완벽하게 설계에 반영하고 충분히 검토할 수 있게 해주었다.
1883년부터 1926년까지 43년간 가우디의 일생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공사에 전부 바쳐졌다. 특히, 마지막 10년은 작업실을 아예 현장 사무실로 옮겨 인부들과 숙식을 함께했다.
이 당시 가우디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잃는 극도의 슬픔을 이겨내야 했다. 속세에 미련을 버린 듯 성당을 건설하면서 가우디는 종교에 모든 것을 의지했고, 이런 성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우디의 모든 열정이 승화된 곳은 바로 그의 작업실이었다. 그러나 가우디는 살아있는 동안 성당을 완성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았고, 가우디 자신도 알지 못할 먼 훗날을 기약하며 설계와 시공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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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7일 오후 5시 반경, 그날도 가우디는 성당을 나와 늘 하던대로 고질적인 류머티스를 이겨내기 위한 산책길에 나섰다. 그렇게 길을 걷던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며칠간을 병원에서 지내다가 운명을 하고 만다. 처음 전차에 치었을 때 택시는 그가 거렁뱅이인줄 알고 이송을 거부하였으며 이는 그가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가 죽기 전 유언으로 장례 행렬을 만들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 그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긴 바르셀로나의 시민들은 그가 떠나는 마지막 길을 성대하게 치뤄 주었으며 그의 주검은 그가 그렇게 염원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묻혀 성당과 영원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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