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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의원 이종인과 종두인허원 박승석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9/10 [20:32]
일제강점기에 종두인허원 경기도 대표로 활동하였던 박승석과 관련된 칼럼을 기고한지 어느 덧 3회에 이르렀다.
 
이제 4회에서는 두창(痘瘡)을 예방하는 활동을 하였던 이종인과 박승석을 비교 분석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할 생각이다. 
 
이종인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가 공동으로 연구한 종두법을 실시하여 많은 생명들을 구하였으며, 박승석은 일제강점기에 종두인허원으로서 우두법을 실시하여 역시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천연두로 많이 소개되어 있는 두창(痘瘡)을 예방하는 방법을 종두법이라 하며, 이러한 종두법에는 인두법과 우두법이 있는데, 보다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하자.
 
먼저 인두법은 두창(痘瘡)의 독(毒)을 , 인공적으로 인체에 접촉시켜 그 독력(毒力)을 약하게 하는 방법이며, 여기에 비하여 우두법은 두창(痘瘡)에 걸린 소의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해 두창(痘瘡)의 면역력을 얻게 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인두법은 중국을 통하여 조선에 도입되었으며,  우두법도 인두법의 경우와 같이 중국을 통하여 조선에 도입되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과정에서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우두법의 역사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에 인두법의 역사에 대하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본 칼럼에서는 인두법이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하여 조선에 도입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1790년(정조 14년) 초정이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구한 의종금감(醫宗金鑑)을 규장각에 보관하였는데 그중에서 유과종두심법요지(幼科種痘心法要旨) 부분만을 초록(抄錄)하여 집에 소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다산은 청나라때 출간된 중국 최대의 자전(字典)인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신두법(神痘法)은 대체로 두즙(痘汁)을 코에 넣고 호흡하면 당장 솟는다”내용을 통하여 두창(痘瘡)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조선에 전해지지 않은 것을 아쉽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1799년(정조 23년) 의주부윤을 역임하고 돌아온 복암 이기양의 아들 총억에게서 의주인이 연경으로부터 얻어 온 정씨종두방(鄭氏種痘方)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책을 곧 구하여 종두법 중 수묘법(水苗法)을 터득하게 된다.
 
이듬해인 1800년(정조 24년)에 다산은 영평현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초정을 만나 인두법에 대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초정이 의종금감(醫種金鑑)중에서 유과종두심법요지(幼科種痘心法要旨)를 초록(抄錄)한 사실을 알고 다산이 소장하고 있던 정씨종두방(鄭氏種痘方)의 내용을 합하여 종두심법요지(種痘心法要旨)를 완성하였다. 
 
여기에는 종두법을 실시하는 방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초정은 이를  향리의 아들을 비롯하여 관노의 아들과 초정의 조카에게 우선적으로 실험한 결과 효험이 있는 것을 확인한 이후 당시 포천의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종인에게 그러한 종두법을 전수하였다.
 
그런데 1817년(순조 17년) 이종인이 저술한 시종통편(時種通編)의 서문에 이미 1798년(정조 22년) 초정을 통하여 두창(痘瘡)과 관련된 책을 본 것으로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한편 초정을 통하여 종두법을 전수받은 이종인은 우선 마을에 있는 주민들에게 실험을 하여 성공을 거두자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인두법을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종인에게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가 다가 왔으니 그것은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신유사옥(辛酉史獄)에 의하여 그의 의학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다산과 초정이 여기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을 뿐만 아니라 그도 함께 연루가 되어 귀양은 가지 않았지만 심한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천주교와 관련된 문제로 체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경위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상황속에서도 그 고비를 극복하고 1807년(순조 12년) 영남의 상주(尙州)를 시작으로 다시 종두법을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여 보면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부터 10년후인 1817년(순조 17년)에 이종인은 두창(痘瘡)과 관련된 중국의서들을 참고하고 그동안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두창(痘瘡)과 종두법 전문의서라 할 수 있는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하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다.
 
이렇게 본다면 이종인은 의원으로서 인두법을 널리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종통편(時種通編)을 남겼으니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의학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의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의학자로서 인두법의 실시에 큰 공로를 세웠던 이종인이 안타깝게도 1817년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한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그의 행적과 관련된 하나의 단서를 “한국근대보건의료사”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후기 실학자 오주 이규경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되어 있는 종두변증설(種痘辯證設)에서 ”포천에 사는 이종인(의관으로 관직이 지현(知縣 : 현감으로 추정됨)에 달함)이 시작한 이후에 다시 영남에 전해져서 근세에 종두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이종인이 지은 ‘시종통편(時種通編)’에 그 방법이 적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헌종연간에 간행된 책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볼 때 불과 20 ~ 30년 사이에 인두법이 조선에 널리 실시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종인이 정확히 언제 별세하였는지 현재로선 알 수가 없지만 조선에 인두법이 널리 보급되는 과정에 있어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아울러 알렌이 “조선왕실병원 제1년도 보고서”에서 1886년(고종 22년) 당시 인구 100명중에 60 ~ 70명이 인두법을 시술받았다고 전하는 것을 볼 때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실시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인두법이 언제 중단된 것인지 그 연도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최근에 증조부의 행적을 다시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종인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로 자료조사를 비롯하여 관련 전문가들에게도 그의 잊혀진 행적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였으나 구체적인 답변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 이종인의 위상은 다산과 초정의 종두법을 계승한 후계자로 볼 수 있는데 현재 그의 행적뿐만 아니라 인두법이 누구에 의하여 계승되었는지 그 부분도 알 수 없다는 점에 착잡한 심정 금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필자의 관심사인 박승석과 이종인의 관련성에  대하여 분석하기로 한다.
 
이종인이 정확히 언제 별세하였는지 명확히 모른다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나 박승석이 1865년(고종 2년)에 출생하였으니 시기적으로 볼 때 박승석이 이종인으로부터 직접적인 전수를 받기 보다는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간접적인 영향이란 이종인의 저서라든지 아니면 이종인 제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인데 사실 그의 제자가 있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부분은 필자의 개인적인 추론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지역적인 연고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이종인은 당시 포천에서 거주하는 의원이었다는 점이며, 바로 박승석의 고향이 포천의 경계지역이라 할 수 있는 연천이란 점인데, 필자는 이러한 지역적인 연고가 이종인과 박승석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이종인은 20년이상 인두법을 실시하였으며, 여기에 비하여 박승석은 우두법을 20년이상 실시한 것으로 알려 졌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여 이종인과 박승석은 두창을 예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종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인두법이 두창(痘瘡)의 예방법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증조부가 이종인의 영향으로 두창(痘瘡)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필자가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던 초창기 시절에 자료를 통하여 이종인이 포천에 거주하였으며, 그가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한 사실은 기억하였지만 사실 그 책을 저술하게 된 전후사정에 대하여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부분은 증조부가 연천에서 우두시술을 최초로 실시하였기 때문에 혹시 이종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궁금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 관계를 명확히 밝히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는데 어느 덧 증조부 탄생 15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이 부분을 다시 조사하게 된 것은 단지 필자만의 의지가 아닌 증조부의 혼백(魂魄)이 필자를 이끌어 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필자는 오랜 세월 증조부가 우두법만을 실시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인두법을 알게 되면서 어쩌면 증조부가 인두법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여 증조부가 인두법을 직접 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인두법도 두창을 예방하는 중요한 방법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적어도 인두법에 대하여 공부를 하시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추정이지 증조부가 인두법에도 관심을 보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둔다.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조선후기에 인두법 실시를 통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였던 이종인의 의술(醫術)이 후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여부인데, 앞으로 이 부분은 그동안의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하여 밝혀볼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다산과 초정으로부터 종두법을 전수받은 이종인이 이를 조선에  널리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였는데, 1817년(순조 17년) 이후 그의 행적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앞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종인과 박승석의 관련성을 추적할 생각이며, 이와 더불어 필자의 칼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의원 이종인과 종두인허원 박승석의 의술정신(醫術精神)이 우리 사회에 널리 전파되기를 바란다. pgu77@naver.com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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