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대부여 종주국의 핵심지역을 차지했던 곳이 현재의 충청남도이다. 옛 도명은 공홍도이다. 이리 첫말을 떼는 것을 보고 눈치 챌 현인이 있는가 싶어 나를 책망해 본다. 왜냐하면 대부여국이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기에 대부여국이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존재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이를 슬퍼하며 그리 표현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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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여국은 우리 역사서에는 사라졌으나 중국이 가진 24서나 만주지 일본의 서기 등등의 역사서에는 편편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국토는 요하유역을 중심한 만주와 한반도와 왜국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그 나라가 번성하던 근초고왕시절에는 대륙의 중원지방을 아우르고 있었으니 실로 홍산 문화의 유적지가 모두 다 대부여의 영토였던 것이다. 일부 우리 역사에서도 인정하는 고구려의 본가가 대부여국이며 고조선의 찬란한 문물을 옴 싹 이어 받은 것도 대부여국이었다. 달리 말해보면 대륙부여 한반도부여 일본열도부여로 삼분되어 있던 것이 모두 대부여국의 영토였다. 안타깝게도 부여국이 나당연합국에 의하여 멸망하자 고흥이 썼던 서기라는 역사서가 사라져 대부여국 자체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되고 10제 100제라는 연합체의 명이 삼국사기 때문에 백제라는 국명으로 고정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서기를 지은 고흥은 근초고왕(AD346~375) 때의 학자로써 출생에 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서기(書記)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많다. 우리가 지금 믿고 의지하는 역사서 삼국사기의 고기 (古記)를 인용하면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써 사실을 기록함이 없더니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백제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할 수 있다.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근초고왕 때다. 이때 백제는 왕위계승이 초고왕계(肖古王系) 중심으로 안정되었다. 그리고 남북으로 정복적인 팽창활동이 활발하여 거대왕국이 성립되었으며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비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고흥이 편찬한 서기는 왕권을 합리화하고 왕실의 계보를 문자로 기록하고 대부여국에 복속된 여러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왕실중심으로 통합 정리하였을 것이다. 특히 대륙부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아무튼 충남지역은 역사서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수모를 겪은 가운데 1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신라정권이 펼친 백제의 씨종자를 없애기 정책에 희생을 감수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압살정책은 신라 문무왕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그 맥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라는 부여국을 멸망시키자마자 일어난 복신장군의 부흥운동에 진저리를 느끼고 부여인 이주정책을 써서 부여유민(이하 호남인이라 표현한다.: 금호강 남쪽사람)을 함경도나 경상도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그리고 곡창지대인 내포평야와 호남평야에 오로지 공주 전주 나주 세 곳에 감영을 두고 신라의 관리들을 이주시켜 정복자로서 누리고 살게 했다. 그 흔적은 전주이나 나주에 본관을 두고 있는 성씨의 시조들이 대부분 신라 정권의 녹을 받았던 관료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제 호남인들 즉 지금의 금강이남에서 살았던 부여유민들이 핍박받아온 근거를 하나하나 지적해 보기로 한다. 먼저 신라가 반도부여를 삼키자 부여의 국왕과 왕족들은 당나라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여유민들은 슬픔을 가슴 깊이 새기며 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신라는 소위 통일신라라는 반에 반 토막 통일을 하면서 227년간 누리다가 후삼국이 벌어지고 결국 경순왕 때에 와서 천년왕국을 송두리째 왕건의 송도정권에 바치고 정권을 함께 공유했다. 그러나 그 속 알맹이는 신라인이 정권을 이끌고 거죽은 고려인이 겉껍질 노릇을 했다. 그 원인은 천년왕국의 능력이 고스란히 고려국으로 이입되었기 때문이다. 신라천년의 정치력과 문화력은 고려국의 알맹이 노릇을 하는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소위 본관이 경주나 김녕 또는 안동 그리고 김해인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면서 이들 고려에 붙은 신라인들은 호남인 압살정책을 500년씩이나 이어오게 했다. 그것이 소위 훈요 10조라는 것이다.
훈요10조 중 제8조를 보면 기가 막힌다. 이에 대한 설명은 약하고 독자 여러분의 능력과 소양대로 이해하기 바랄뿐이다. 차현(車峴) 이남으로서 공주강(公州江)의 바깥은 산세와 지형이 모두 배역(背逆)으로 뻗어 있어 인심(人心) 또한 그러하다. 그곳 아래의 주(州)·군(郡)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王侯)나 국척(國戚)과 더불어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통합(統合)한 원한을 품고서 어가(御駕)에 범하여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또 일찍이 관사(官寺)의 노비(奴婢)나 진(津) 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하였더라도 혹은 권세에 의탁해 신분을 바꿔 요역을 면하고 혹은 왕후나 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로 권세를 희롱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재변(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아무리 양민(良民)이라도 관직에 있게 하여 일을 꾸미게 하지 말라. 고 강조하면서 10훈(訓)의 끝에는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中心藏之]’는 네 글자를 두어 마감하였다.
이로부터 왕위를 훈요 10조에 준하여 이어 받고 이를 통치이념으로 하여 고려조가 이어지더니 유학이 들고 일어나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씨를 제치고 이씨로 하여금 조선조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정책입안자들이 모두 신라인의 후예들이라서 이들은 철저하게 차현(車峴) 이남 즉 공주강(公州江: 錦江)의 바깥은 인재를 등용하는데 인색했다. 그러니까 신라 문무왕 이래 220여 년 동안 압제 받던 부여 유민의 후예들은 조선 조정에 와서도 이름만 호남인으로 바뀌어 꼭 같은 수난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그 이유를 예를 들면 행정구역 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은 행정조직의 모태는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지방호족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과도기적 조치로 고려 성종 2년AD983년 호족들을 달래어 전국 주요도시를 12목으로 정했다. 12목은 해주 황주 광주(廣州) 양주 충주 청주 공주 전주 나주 승주 진주 상주로써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임명해 보냈다. 그러나 단서를 달기를 그 관리가 엉뚱한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을 볼모로 송도에 잡아 두고 임명했다가 AD983년 이를 풀어주어 가족이 동행하여 부임할 수 있게 했다.
그때 지금의 충청지방은 충주와 청주 그리고 공주로 3목을 두었으니 어찌하여 내포 땅 그 기름진 곳에 사람이 살지 않아 목을 두지 못했는지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해하기 바란다. AD993년 거란과 전쟁을 치른 후 성종 14년 AD995년 중앙집권제로 체제 변화를 가져올 때 12목을 10도로 개편하여 지방장관으로 절도사를 두었다.
그러던 직제를 AD1012년 고려 현종 3년 절도사제를 폐하고 전국을 5도호부로 하여 안무사제도로 하였으나 AD1018년 전국을 양계체제로 개편했다. 이때 충청도는 양주 광주를 중심목으로 하는 양광도에 관내도(고려의 수도 개경 중심)와 하남도(공주 중심) 그리고 중원도(충주 중심)가 흡수되었다. 이와 같이 AD1105년까지 유지해 오다가 양광충청주도로 변경되고 다시 광충청주도로 명칭이 바뀌면서 어느 이름에도 공주를 의미하는 공자는 빠져 버렸다. 그러나 AD1171년(고려 명종원년)에는 양광청주도는 양광주도와 충청주도로 나누더니 AD1313년(충숙왕 원년) 이를 다시 합하여 양광도라 불렀다. 주가 빠진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런데 이 양광도가 AD1356년 (공민왕5년) 충청도로 통칭되었다. 이때 충청도는 경기 강원을 포함한 도명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충주와 청주의 힘이 얼마나 센 것인가 알만하다. 그런 과정에서도 철저히 공주는 외면당하여 한 차례도 주명이나 도명으로 나타나지 못한 참혹한 봉변을 당하고 있는 역사의 파란만장한 뒤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마디 강조할 것은 주명이든 도명이든 그 명칭을 지을 때는 그 지역의 인문환경 정치환경 역사환경을 철저하게 살피어 지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부여유민의 후예의 한사람인 필자가 볼 때 지금의 충북과 충남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역사적 지리적 사회인문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두 지역을 하나로 묶으면서 철저하게 차현 이남인 충남지경의 명칭은 숨겨 버렸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황해도나 경기도처럼 충청도 공홍도로 독립적인 명칭을 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속에 공홍도를 예속시켰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왜 이 문제를 지적하는가 하면 충북은 김유신 장군의 고향이고 충남은 계백장군의 고향이다. 그리고 옥천금산을 두고 서로 국경선이 맞닿아 전쟁이 반복되었던 적대적의 관계였다. 또 충북이 산악지라면 충남은 평야지대다. 충북인이 청풍명월(淸風明月)을 구가하는 성격을 가졌다면 충남인은 해풍연월(海風衍月) 벗 삼아 대양을 지배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정서를 전혀 감안하지 않고 정권입안자들이 제멋대로 신라 중심적 훈요10조에 입각한 정치행태를 보여 전혀 관계없는 지명 속에 부여유민 즉 호남인을 가두어 버렸다고 여겨진다. 그런 억울함이 조선조에 와서 공주목에 더하여 홍주목이 나타나 다소 풀리는가 싶었으나 지방정부의 소재지인 감영은 충주에 자리 잡고 있어 요지부동이었다. 조선조에서 와서도 부여유민들은 독립된 정체성이 뚜렷한 소지명에서 철저히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조선조 태종이 등극하면서 변화가 나타나는데 AD1413년 태종13년 조선을 8도체제로 정비했으나 아직도 충남지경이 도명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AD1505년 청주출신 환관의 비행으로 말미암아 충공도라는 그립고 안타까운 부여 땅이 도명으로 비로소 역사 속에 얼굴을 들고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주의 공자와 충주의 충자를 합한 충공도가 도명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충청도라는 도명칭이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청공도로 AD1549년(중종35년)에 바꾸더니 AD1612년(광해군 5년)에는 공청도로 인조 때에는 공청도 공홍도 라는 공주와 홍주 독점의 지명도 잠시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공청도로 3번이나 바뀌었는데 주목할 것은 공주와 홍주를 따서 공홍도 라고 부른 것은 인조6년 충주목에서 안집중의 모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에 잠재해 있든 권세의 힘이 어디로 증발하겠는가. 다시 잠복기간을 약간 갖더니 효종 때에는 충청도로 바꾸더니 효종7년 청주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자 공홍도로 또 마지못해 얼굴을 비추게 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죽고 현종이 등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충홍도가 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공홍도로 또 다시 충홍도로 환원하더니 영조때 충주와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공청도로 복구하더니 충남 지역이 아닌 청주와 충주에서 모반과 살상이 있어 외민 벼락은 충남이 맞아 충청도로 변경되었다. 그 뒤에도 정조와 순조 연간에 홍충도 충청도 공충도 공청도로 바꾸다가 철종 때는 청주에서 김순생의 모반으로 공충도로 되었다가 AD1896년(고종 33년) 충청도의 남쪽이라 하여 충청남도로 하였다. 참으로 고리타분한 고인들의 지역감정이 크게 실린 정치단막극을 우리는 감상하였다. 지루한 역사의 순환하는 모습을 열거하여 보았다. 그러면서 도명이 무엇과 연관성이 있는가? 라는 자존의 문제와 함께 도명을 잃어버린 충청남도 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나는 대전광역시민이다.’
차현 아래서 살아온 대부여 종주국의 후예인 충청남도인은 이 억울한 역사의 칼바람의 희생 속에 살았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대전광역시민으로서의 좌표는 이 공홍도라는 도명을 찾아내는 일에서 발을 빼낼 위치가 아니다. 지금까지 짚어 본 결과 도명에서 주된 도시명이 빠질 때는 모반을 했을 경우와 천도를 어긴 죄를 지었을 때였다. 다시 말하면 충주와 청주를 머리 위에 얹고 살아온 지 120년이 지났다. 충청남도 도명에 반드시 공주나 홍주의 첫 글자 중의 최소한 한 글자만이라도 들어있는 도명을 가져야 할 것이다. 충청남도보다 역사도 짧고 도세도 약한 제주도는 제주라는 주된 도시의 제자를 이고 사는데 그리고 충청북도는 하나도 아닌 두 글자 충주와 청주 머리글을 도명으로 삼고 사는데 부여의 후손들은 어찌하여 찾아 가져야 할 마땅한 도명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하고 산단 말인가! 실로 한심할 일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아는 그들은 누구의 자식이며 어디에 속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다음은 청풍명월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우리가 알기로 조선조의 성리학자 중의 한분이 팔도인의 기질을 4언절구로 표현했다는데 지역감정을 유발하기 좋은 잘못된 표현이며 더구나 공홍도(충청남도) 사람의 기질과 청풍명월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공홍도 사람들은 해양국가 대부여국의 후손이고 그 기질을 당당히 닮아서 구지 4언절구를 빌어 표현한다면 묘망대해(渺茫大海)가 알맞을 것이다. 이는 경상도의 태악준령(泰岳峻嶺)에 대비되는 말이기도 하며 풍전세류(風前細柳)인 전라도 기질과도 대비될 것이니 공홍도 사람들은 앞으로 묘망대해의 기질을 잘 나타내는 말 즉 ‘괜찮아 유~’ 한마디로 대비되는 아득하고 드넓은 바다의 의미를 담은 4언절구를 공홍도 사람이 가져서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맺기 전에 제목의 글자에 충실하기 위하여 역사가운데서 충남인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해 보기로 하자. 먼저 생각나는 것이 충남인은 철저한 역사속의 부여인이다. 호남인이다. 중국대륙과 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대부여국인다. 3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졌다는 거짓 역사의 후예가 아니다. 훈요10조 중의 8조에 해당되는 압제받아온 왕따 당할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제 몸과 제 정신이 숨어버린 충청이니 청풍명월과 같은 글자 속에 갇힌 한미하고 일천한 사람들도 아니다. 왕인 아직이 관륵과 같은 위대한 선조를 가진 충청남도인 아니 공홍도인인 것이다. 보라! 사육신의 진한 피를 보라! 공홍도인 성삼문의 그 기개가 보이지 않는가. 또 보라. 홍주태생 김좌진 장군의 그 기상! 그 기개! 그 애국심! 그 철강석 같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을 보라! 이것이 공홍도인의 본 모습이요 대부여인의 진면목인 것이다. 역사를 잃어버린 자 멸망하리라. 뿌리가 없는 나무가 어찌 존재하리요. 우리 온 국민이 다 같이 공홍도인에게 바른 도명을 붙여 주어야 할 것이다.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 때문에 황해도다. 경기도는 경성과 기호지경이라 경기도다. 제주도는 제주가 전라남도 제주읍 이었으나 사는 사람들이 머리가 있고 생각이 깊어서 제주도가 되었다. 그러나 충청남도인은 누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서 유구한 역사를 묻어버리고 아직도 충청남도로 하여 충주와 청주에 더부살이로 살며 자기를 청풍명월 이라하니 배꼽이 웃을 일이다. 제발 깊이 있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과연 충청남도는 역사 가운데서 무엇일까? 오늘 부터라도 생각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공홍도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리고 대부여인의 후예임을 자랑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