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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대아저수지 구 댐이 그립다

이승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5/03/30 [16:06]

옛날 사랑방이야기는 저자 쌀값부터 시작하여 이야기책 읽기 등 정말 ‘이야기판’이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이야기를 만들어 이어가는데 약간 틀려도 그러하려니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바로 이런 믿음 위에 소향리(小向里) 이야기를 펼쳐 본다.    

 

▲ 이승철     ©브레이크뉴스

 

 “용바위 ‘용’을 가새기 ‘가시’가 찌르니 용이 꼬리 쳐 쌍바위가 움푹 패었고, 안남리 즐비한 나무들은 그 때 일어난 구정물 먹고 자랐으나 안내미 사람들이 고개도 ‘안내밀어’ 기린리는 ‘길을 잃었으며’, 이를 본 종암 사람들 ‘종알종알’하자, 오메가 ‘어메!’하니 말울이의 ‘말이 울어대자’ 방죽안 ‘방에서 죽 푸던 처녀’ 마음이 들떠 시랑골 ‘신랑’과 혼인할 제 양막 ‘양마’ 타고 신당리 ‘신당’ 찾아가 잘 살기를 빌자, 조살메 ‘조씨 할매’ 운문사 ‘웃물’ 대양리 ‘대야’에 떠다 씻겨주니 운용리 머시매들 가슴이 ‘울렁울렁’ 울분이 터져서 세차게 ‘새재’를 뛰어넘어 관모봉 ‘감투바위’를 낚아채니 우르르 굴러 내린 바위덩이가 물머리 산천[내]를 가로막아 ‘삼천바위’가 됐당께.” 지명을 이리저리 얽어 붙여 그럴 듯하게 말을 만들었다. 오래 사는 시골 사람들 일희일비(一喜一悲) 웃으며 고향을 지켜 나왔다.

 

지금부터 실제 우리 이야기를 펼쳐 보자. △대아저수지 옛 댐은 남한의 ‘수풍 댐’ 혹은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 같다 하지 않았나. 해방 직후 일요일마다 미군들이 구경 왔고 근동 주민들은 명절이면 여기 찾았으며 초등학교 6년 내내 여기 원족(소풍)왔다. 물에 잠기지 않고 댐 그대로만 있었더라면 수 조 원 소향리 큰 자산이 되고도 남았을 것. 운룡리, 용바위, 대향리 땅값은 지금의 수백 배로 위락시설 등 한국 제1의 관광지가 됐을 것이다.

 

△화암사, 안심사, 운문사(雲門寺)는 고산현(군)의 유명한 3대 사찰이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누군가가 두 절 안심사와 운문사를 불태웠다. 그 후 완창리 안심사는 복구됐으나 고산 운문사는 이름조차 잊혀지는 판국이다. 가령 운문사가 그대로 있었다면 전 이리농림고등학교 땅을 포함하여 오묘하게 개발했을 것이고, 그 결과 지금 내장산․속리산처럼 굴지의 관광지가 됐을 터인데 소향리는 ‘물’로 ‘불’로 대박을 놓쳤다. 소향(小向)은 이래서 이름처럼 ‘작은 길로 향한 꼴’이 됐다.   

 

삼례읍 석전리 석은 이병교 옹의 운문사 시 “…유아명구고미환(留我名區故未還:나 머문 이름난 이곳 무슨 연고로 못 떠나나!)” 쉬며 실컷 놀고 이튿날 아침 비 내리자 이렇게 읊었다. 다시 말해 떠나기 싫다는 시어이다. 사람 생각은 한이 없다.    6·25전쟁 중 사라진 김옥님 기억하는 이 없고 지금 설령 돌아온들 반겨 줄 사람 몇이 있으랴! 옛날이야기 아무리 해도 사라진 것 도리 없구나! esc2691@naver.com 
 
*필자/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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