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47년전인 1668년(현종 9)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1653년(효종 4)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제하의 책이 각각 출간되는데, 하멜이 조선에서 13년동안 표류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본 칼럼에서는 이러한 하멜표류기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2회에 걸쳐서 연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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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부분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이 책과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소현세자의 삶으로 잠시 거슬러 올라간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왕세자로서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뜻밖에 한 순간에 운명이 뒤바뀌게 된 비운의 왕세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병자호란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것을 신호탄으로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봉림대군과 많은 대신들이 심양으로 사실상 볼모로 끌려 갔을 뿐만 아니라 특히 수십만의 백성들도 포로로 끌려간 그야말로 비극적인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조선의 왕세자로서 청나라인들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현안을 원만히 해결하는 등 사실상 심양주재 고위 외교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소현세자의 심양생활에 일대 변화가 생기니 그것은 1644년(인조 22)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한 이후 다시 청나라가 이자성을 공격하여 북경을 점령하면서 소현세자도 청나라 군대를 따라서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당시 북경에 있는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발생한다.
비록 2개월도 채 안되는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통하여 그동안 전혀 알지 못하였던 서양과학 문물과 천주교를 접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아담 샬과의 만남이후 소현세자는 8년만에 조선으로 영구귀국을 하게 되는데 귀국하는 과정에서 선물받은 신학서적과 역법서,십자가상과 천구 등과 더불어 천주교로 개종한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국한지 2개월 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죽음은 서양과학 문물 도입을 통하여 조선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해가 1645년(인조 23)이 되는데 그로부터 8년후가 되는 1653년(효종 4)에 조선에 실로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이 해는 효종이 재위한지 4년이 되는데 원래 효종은 왕위계승권자는 아니었으나 친형이 되는 소현세자가 사망하면서 원손인 경선군을 제치고 인조에 의하여 왕세자로 책봉이 된 이후 1649년(인조 27) 인조가 승하하면서 보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효종은 재위기간 내내 북벌추진을 계획할 정도로 청나라 공격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였으나 결국 실현하지 못한 채 승하한 왕이기도 하다.
이러한 효종이 재위한 기간에 뜻밖에 제주도에 하멜을 포함하여 36명의 네덜란드인들이 표류하게 된 것이다.
사실 하멜에 대하여 평소 조선왕조에 대하여 관심이 많던 필자도 이름만 기억할 정도였지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러한 무관심에 일대 경종을 울리는 일이 생겼으니 그것은 방송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2014년 11월 29일 KBS1 역사저널 그날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제하의 방송을 시청한 이후 그 이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하멜 일행과 하멜표류기에 대하여 강한 호기심이 생겼으니 필자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서기로 있는 하멜은 1653년 6월 18일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인도네시아 바타비야(자카르타)를 떠나 대만으로 항해하였는데 그 배에는 전부 65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7월 16일 대만에 도착하여 대만총독 꼬르넬리스 께이사르경을 하선시키고 화물을 풀었다.
7월 30일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대만총독과 의회의 명령에 따라서 다시 출발하였으며, 저녁무렵부터 대만연안에서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더니 밤이 될수록 그 강도가 더 거세졌다.
날이 밝았을 때 배가 중국연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날 폭풍은 가라앉지 않아서 밤새도록 닻을 내린 채 머물러 있어야 하였다.
8월 2일 날씨가 잔잔한 틈을 이용하여 중국연안을 벗어 났으나 그 이튿날 해류가 111Km나 뒤로 표류하게 하였으며,중국과 대만사이로 항로를 정했다.
한편 8월 4일에서 11일까지 날씨는 평온하였으며, 중국과 대만 연안사이를 항해하였다.
그러나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다시 기상악화로 인한 거친 비와 바람으로 돛없이 그저 표류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8월 15일에 날씨가 최악의 상황으로 변하여 배에 물이 가득차고 결국 배가 산산조각이 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서 그러한 순간에 갑판에 있던 선원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바다로 뛰어 들었으나 갑판 아래에 있던 선원들은 안타깝게도 빠져 나오지 못하여 희생되고 말았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결국 그 다음날 새벽녘에 극적으로 생명을 구한 선원들이 총 36명이 되었다.
여기서 본래 대만을 출발할 당시 배에는 전부 64명이 승선하였는데 최종적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인원은 36명이 되었으니 결국 배가 난파되는 과정에서 28명이 희생되는 불행을 겪었던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