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의 아버지라는 평가와 역사의 도굴자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아직도 진행 중인 독일 태생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신화 속에서 역사를 발굴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 전해오는 신화 속의 고대 도시 트로이(Troy)와 고대 미케네 문명의 중심도시 미케네(Mycenae)를 발굴한 장본인입니다.
고고학의 과학적 체계가 이루어지지 못한 여명기에 슐리만의 발굴 작업에 대하여 영국의 고고학자 스탠리 카슨(Stanley Casson)은 "어느 땅에서나 적합한 고고학적 발굴"을 창안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미술사학자 아돌프 마이클리스(A.Michaelis)는 과학적 방식의 고고학을 외면한 무지의 발굴이라는 비난의 평가도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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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평가는 역사에 맡기기로 하고 신화와 역사의 동행이라는 관점에서 신화로 전해오던 고대 문명에 대한 실체를 평생을 바쳐 발굴한 슐리만과 그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합니다.
슐리만은 1822년 독일 북동쪽 끝머리 슈베린의 노이부코(Neubukow)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들려주던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들으며 꿈만 같았던 아득한 옛 신화에 대한 동경심과 사라져버린 옛 나라의 흔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기가 있었던 루드비히G.Ludwig Jerrer)의 ‘세계의 역사’ (History of the World)를 읽으며 그의 꿈은 8살 어린 나이부터 어른이 되면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린 트로이 시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슐리만은 9살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1836년 아버지가 교회 기금 횡령으로 구속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14살 나이에 일터로 나서 식료가게 직원으로부터 온갖 일터를 전전하였습니다. 당시의 일화 중에 술에 취한 손님이 가게에 와서 시인 호머의 일리아스를 그리스어로 낭송하는 것을 듣고 그 시를 듣기 위하여 자신의 월급에 상당하는 금액의 술을 사주며 끝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슐리만은 그날이 너무나 행복하였다고 자신의 자서전에 회고하였습니다.
슐리만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1841년 함부르크를 거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어느 무역회사에 회계 일을 하면서 사장에게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언어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며 한 언어를 터득하는 데 6주의 기간이 걸렸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특히 마음의 눈으로 언어를 보는 스스로 터득한 방법을 통하여 각 나라의 언어로 일기를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역업무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일하며 러시아어와 그리스어를 배웠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평생을 모국어인 독일어와 위에 언급한 언어 이외에도 스웨덴어, 폴란드어,터키어.산스크리트어,라틴어,아랍어에 이르는 언어를 완벽하게 공부한 놀라운 노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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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만은 1950년 미국 캘리포니아 금광 투기에서 성공한 형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1851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금광석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업 개시 불과 1년 만에 지역 은행을 설립할 정도의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는 행운을 거머쥔 슐리만은 다음 해 러시아로 돌아와 염료사업을 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러시아 정부에 탄약제조에 필요한 유황과 납을 납품하여 거대한 자금을 조성한 이후 1866년 프랑스 에 부동산 투자를 하며 파리에 정착을 결심합니다. 이후 소르본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 고대철학 고전시, 근대 불문학과 비교문법을 공부하였으며 1869년 독일 로스토크 대학에서 ‘이타카(Ithaca)의 지형학적 분석 기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8살 소년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철저하게 공부한 슐리만은 1868년 오늘날의 터키지역 차낙칼렉에 있는 고대 트로이 유적지 히사르 리크(Hissarlik)를 주목하여 탐사한 이후 1870년부터 발굴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Arthur John Evans) 와의 교감이 많은 영향을 가져왔습니다. 에반스는 청동기 유물 전문가로 크로타 이전의 그림문자를 정리한 학자로 미노아 문명의 꽃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한 학자입니다.슐리만과 에반스는 미케네 문명에 대한 견해에서 동부 지중해 영역에서 발견된 지형의 구조와 유물을 참고하여 청동기 시대의 문명에 대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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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만의 신화를 발굴한 배경에 빠트릴 수 없는 사람이 프랭크 칼 버트 ( Frank Calvert,1828-1908)입니다. 외교관 출신인 칼버트 또한 슐리만처럼 어려서부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대한 신화의 꿈의 키워온 사람 이었습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한 그는 영국의 지질학자아며 저널리스트인 찰스 맥클라렌(Charles Maclaren1782~1866)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6판 편집 당시, 그리스 물리적 지형‘ 이라는 칼럼에서 제시한 트로이에 대한 기사를 읽고 1847년 그의 형제 Frederick는 터키 영역의 Hisarlik 일부가 딸린 Akca Koy 지역에 농장 등을 사들여 놓고 있었습니다. 슐리만의 첫 발굴 작업은 연속적인 실패였습니다. 트로이 발견에 포기까지 생각하던 시점에 재정상태가 좋지 않던 칼버트가 자신이 사들인 땅의 발굴에 대한 제안을 해와 이를 받아들여 마침내 신화 속의 고대 도시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슐리만은 7차례 걸친 발굴 작업을 통하여 이 유물들을 밀반출하여 1881년 베를린 박물관에서 공개 소장 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다시 탈취하여 금속 유물은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과 도자 유물은 에르미타슈미술관에 나누어 소장하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 것입니다. 훗날 이 유물들은 다시 푸시킨 미술관으로 통합 소장 되었습니다.
어려서 보았던 한 권의 책으로 꿈을 이룬 신화의 발굴자 슐리만은 자신의 평가를 역사에 남기고 1890년 나폴리에서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슐리만의 가장 큰 업적은 신화 속으로 사라진 잃어버린 역사의 현장을 되찾은 사실입니다. 자신의 평생 노력을 모국에 헌정하였지만 정작 주인은 러시아라는 사실에서 전쟁을 통하여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류 문화의 원천과 같은 트로이와 미케네 문명의 유산이 러시아에 있다는 사실과 동양문화의 정수인 우리 나라의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에 약탈당한 사실에서 소중한 문화 유산이 문화 후진국의 재산으로 뒤바뀐 전쟁의 그릇됨을 절감하게 합니다.
다음 칼럼은 (26)『민족 대이동의 변화』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