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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31)-프랑크 왕국과 유럽 (中)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2/22 [10:19]

프랑크왕국의 클로비스 1세(클로도베쿠스)는 기독교로 개종을 선포한 이후 세력 확장을 통하여 왕국의 기틀을 확고하게 정립한 이후 51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로비스는 일찍 사망한 둘째아들 잉고미르(Ingomir)를 제외한 4명의 아들 장남 테우데리크1세(485~534)와 2남 클로도미르(495년~524) 그리고 3남 킬데베르트 1세(497~558)와 4남 클로타르 1세(498년~561)에게 왕국과 유산을 분할하여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시대는 다음과 같은 분할왕국으로 통치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네명의 아들로 분할된 영역은 프랑스 파리지역을 중심으로 장남 테우데리크1세는 프랑스 북동쪽 상파뉴 지역 랭스(Reims)왕국을 2남 클로도미르는 프랑스 중북부 레지옹 지역의 오를레앙(Orleans)왕국을, 3남 킬데베르트 1세는 현재 프랑스 북부지역의 파리 왕국을, 4남 클로타르 1세는 프랑스 북부 엔에 있는 수아송 왕국(Soissons)이었습니다. 이러한 유산 분할을  통한 프랑크왕국은 장자승계 원칙에 따라 장남인 테우데리크 1세의 파리왕국(랭스)을 승계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 클로비스1세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 브레이크뉴스

 

 

이후 524년 2남 클로도미르와 534년 장남 테우데리크 1세 가 사망하였습니다. 이어 558년 3남 킬데베르트 1세가 사망하였으며 그동안 각 왕국의 영역으로 더욱 넓게 확장된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왕국은 막내인 4남 클로타르 1세가 다시 통합하여 자기 아들들에게 왕국을 나누어 승계하고 561년 사망합니다. 클로타르 1세 는 6명의 부인에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장남 군타카르를 포함한 7명의 자녀는 자신에 앞서 사망하여 가장 나이가 많은 카리베르트 1세(521~567)에게 옛 파리 왕국에서 아키텐에 이르는 더욱 확장된 영토(네우스트리아)를, 군트람(533~592)은 옛 오를레앙 왕국 일부와 부르군트를 주어 부르군트 왕이 되었으며. 시기베르트 1세(535년~575)는 옛 랭스 왕국의 북부지역과 오베르뉴지역을 주어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되었고 막내 킬페리크 1세(534~584) 는 옛 수아송 영역을 주어 네우스트리아 왕으로 통치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프랑크 왕국은 왕위를 계승받은 왕들이 일찍 병사하는 경우가 많아져 어린 나이에 왕권을 이어받는 사태가 지속되면서 왕실을 관리하는 궁정 장관인 궁재의 실권시대를 맞게 됩니다. 궁재(majordomus宮宰)란 로마제국의 재정 감독관 제도를 모델로 메로빙거왕조 시대에 국왕 과 각 분국(分國)의 왕들이 두었던 장관직 이었습니다, 궁재의 실권이 강화된 것은 왕국의 모든 내용을 파악하는 자리에서 오는 정보력과 왕권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궁재(장관)라는 위치의 권한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피핀 2세(Pepin II, 630~714)입니다.

 

피핀 2세는 프랑크 왕국의 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로 있었습니다.  679년 다고베르트 2세 왕이 옛 파리 왕국의 새롭게 확장된 영역이었던 프랑스 북부지역 네우스트리아국의 궁재파에 의하여 암살을 당하면서 피핀 2세가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네우스트리아국과 부르군트국을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권한을 피핀 2세가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왕권을 아들에게 넘기려 하였으나 708년 장자인 드로고와 714년 차남 그리모알트 2세마저 사망하자 손자에게 이를 양위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피핀 2세의 서자인 카를 마르텔이 반란을 일으켜 모든 권한이 카를 마르텔에게 이양된 후 714년 피핀 2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 생드니 성당 (Basilique St. Denis) 출처:francethisway.com     © 브레이크뉴스

 

여기서 살펴볼 내용은 피핀 2세의 외삼촌 그리모알트가 아우스트라시아국의 지게베르트 3세 왕의 궁재로 일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그리모알트의 처남이며 피핀 2세의 아버지인 안제기젤(Ansegisel)과 함께 네우스트리아 국의 왕 클로비스 2세에게 656년 처형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안제기젤의 아들 피핀 2세가 다시 세력을 키워 아버지와 외삼촌을 처형한 네우스트리아국을 정복하고 새로운 실권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권력투쟁으로 점철된 역사를 실감하게 합니다. 

 

피핀 2세가 궁재(장관)의 신분으로 프랑크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배경을 좀더 깊게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처형당한 아버지의 이야기와 함께 할아버지 아르눌프(Arnulf,580~640)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피핀2세의 할아버지 아르눌프는 메로빙거왕조 프랑크왕 다고베르트 1세 왕(605~639)의 사부이었습니다. 다고베르트 1세왕은 프랑크왕국을 재통합하였던 클로타르 2세 아들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선대왕의 통합과정에서 빚어졌던 갈등에 대하여 언제나 대립이 아닌 타협과 양보의 권력을 행사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학문과 문예에 대한 열정적인 후원을 하였으며 많은 수도원과 교회를 건립하였습니다. 특히 파리 외곽 북부 현재 18구에 위치한 생드니 대성당(Basilique royale de Saint-Denis) 이 바로 다고베르트 1세 왕에 의하여 630년경 건립한 성당입니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이며 초대 주교인 성 디오니시우스(생드니Saint Denis)신부가 275년경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동료 루스티 쿠스 (Rusticus)와 엘루 테리아 (Eleutherius)와 함께 로마 병사에 의하여 순교하였습니다. 목이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10여㎞ 북쪽에 위치한 이곳까지 걸어와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오는 전설의 성지에 세워진 성당입니다.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몽마르트르 언덕의 이름이 유래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639년 다고베르트 1세 왕이 이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왕과 왕비들이 안장된 왕실 봉안당 역할도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1144년 보완 증축되면서 지어진 성가대의 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는 최초 고딕양식으로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에서 전환된 그 예술적 미감은 미술사에 빠질 수 없는 역사적 문화유산입니다.      

            

▲ 생드니 성당 내부 출처:wikipedia     © 브레이크뉴스

    
바로 이러한 배경에 대하여 다고베르트 1세 왕의 사부이었던 피핀 2세의 할아버지인 아르놀프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르눌프는 속인이었지만 메츠의 주교이었으며 수도사의 당시 명칭인 은수사(隱修士)로 훗날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피핀 2세의 서자 카를 마르텔이 바로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 카롤링거왕조 시대의 기틀을 세운 시조입니다. 다음 칼럼은 (31)『프랑크 왕국과 유럽 (下)』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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