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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32)프랑크 왕국과 유럽 (下)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2/23 [12:43]

714년 피핀 2세의 죽음 이후에 프랑크 왕국은 피핀 2세의 서자인 카를 마르텔은 궁재(궁전 장관)직의 권한을 장악하고 721년 메로빙거 왕조의 최후의 혈통 다고베르트 3세의 외동아들 테오데리크 4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737년 테우데리크 4세가 사망하자 카를 마르텔은 자신의 왕위 등극에 대한 시기를 조정합니다. 이는 당시 사라센(Saracen)이라는 거대한 이슬람 세력이 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영역에 거대한 세력을 만들어 프랑크왕국은 물론 동로마제국(비잔틴국)까지 위협하여 739년 롬바르드족과 함께 동맹하여 이슬람 세력을 물리칩니다.

 

그리나 2년 후 왕위 계승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741년 사망하게 됩니다. 그는 두 아들 카를로만과 피핀 3세에게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로 나누어 프랑크 왕국을 승계하였습니다. 그러나 형 카를로만이 747년 왕권을 버리고 수도사의 길을 선택하는 변동이 생기면서 피핀 3세는 아우스트라시아 궁재직도 함께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751년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받아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공식으로 계승합니다. 이는 궁재(궁전 장관) 통치라는 오랜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시대가 등장하는 배경입니다.

  

▲ 라파엘로(RAPHAEL)작품 샤를마뉴 대관식 상상도 출처:wikipedia     © 브레이크뉴스

 

 

새로운 역사를 연 피핀 3세는 768년 세상을 떠나며 두 아들 샤를마뉴와 카를로만에게 다시 나누어 왕국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 771년 동생 카를로만 1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의 완전한 왕이 됩니다. 이후에 샤를마뉴는 강력한 전사 세력과 결합하여 영토의 확장과 기독교 전파라는 복합적인 왕정으로 전설적인 기록들을 역사에 남기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 792년 곱사등이의 장애를 가진 아들의 반란을 사전에 색출하는 사건과 지방 귀족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을 제압하며 서유럽 최강의 세력으로 부상하였습니다. 특히 훗날 색슨 인의 바탕이 되는 게르만 부족집단의 작센 족 과의 33년간의 전설적인 전투는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가 되어 역사적으로 잘 알려 졌습니다.
      

▲ (롤랑의 노래) 미니아튀르(세밀화)작품 출처:wikipedia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800년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의 집도 속에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이루게 됩니다, 47년간의 통치기간을 전쟁으로 일생을 대부분 마친 샤를마뉴는 글을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듯 문예 활동에 대한 열정적인 지원과 많은 교회를 건립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기고 813년 넷째 아들 경건왕 루이(루트비히 1세)에게 공동 황제를 부여한 후 81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건 왕 루이(루트비히 1세)는 첫째 아들 로테르 1세는 공동 황제를 부여하고 자신이 사망하면 제국 중심을 계승하게 하고 둘째 아들 피핀 1세는 아키텐의 왕으로 셋째 아들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 지역을 조카 베르나르에게는 그의 아버지의 나라 이탈리아를 물려주었고 카를 2세(대머리왕)는 서프랑크 지역을 물려주며 840년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둘째 아들 피핀 1세가 사망하고 형제간의 내분이 생겨나 843년 베르됭조약을 통하여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나누기로 합의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합의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의 경계선이 프랑크 왕국의 동서 분열이라는 영원한 경계선이 되어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세 나라의 국경이 되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이후 각 왕국은 프랑크왕국의 승계원칙에 따라 자식들에게 분할을 거듭하는 상속을 이어갔습니다. 샤를 2세(대머리왕)를 이은 말더듬이 왕으로 불린 루이 2세(Louis II 846~ 879)의 재위 기간은 2년이었으며 그의 아들 루이 3세( Louis III 863~882)는 아버지보다 1년이 긴 재위 3년으로 후사가 없어 그에 동생 카를로만 2세 (Carloman II 867~884)가 왕이 되었으나 재위 5년 만에 884년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에 서프랑크 왕권은 동프랑크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샤를 3세 (Charles III.879~929)가 이어받습니다.

 

이후 샤를 3세의 실정에 분노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샤를 3세 왕과 대적하던 로베르 1세의 사위이며 부르고뉴 공작 리샤르 2세의 아들 라울(Raoul, Rudolph.890~936)을 서프랑크 왕으로 추대합니다. 13년간 재위하였던 라울 왕은 메로빙거, 카롤링거왕조의 인맥과 연관성이 없는 새로운 세력의 왕으로 오늘날 프랑스의 바탕이 되었던 카페 왕조 (Capetian Dynasty) 시대의 서막을 알리며 936년 사망하였습니다.  다음 칼럼은 (33)『카폐 왕조 300년』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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