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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강제이주 80주년! 첫 출발지 '통곡의 역, 라즈돌노예 역!”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을 만나다.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 기사입력 2017/07/24 [14:46]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기념한 역사적인 순례단이 첫발을 뗐다.

 

23일 오후 3시 30분(현지시각),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순례단(공동 대회장 이부영, 함세웅 신부)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목적지도 모른 채 장장6,500Km를 기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갔던 첫 출발지로 고려인의 한이 서린 통곡의 역, ‘라즈돌노예’ 역을 찾았다.  

 

이창주 오디세이 집행위원장은 “러시아 정부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의 타이틀을 러시아 한국 대사관을 통하여 ‘고려인 정주80주년’이라는 타이틀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가 ‘고려인 강제이주’도 못쓰게 하고 ‘고려인 넋을 기리는 진혼제’도 하지 못하게 하여 고려인강제이주 첫 출발지 역인 라즈돌노예 역에서 진혼제를 거행하려고 했으나 하지못하고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거행되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연해주는 1860년 최초의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항쟁의 구심점으로 우리 선열들이 모여 산 역사의 현장이다.

 

항일민족운동의 심장부인 연해주는 가장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일제에 항거한 무장투쟁의 중심지로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을 저격하는 전진 기지였지만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국민들은 잘 알지도 못한다.

 

이창주 오디세이 집행위원장은 “러시아 정부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의 타이틀을 러시아 한국 대사관을 통하여 ‘고려인 정주80주년’이라는 타이틀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가 ‘고려인 강제이주’도 못쓰게 하고 ‘고려인 넋을 기리는 진혼제’도 하지 못하게 하여 고려인강제이주 첫 출발지 역인 라즈돌노예 역에서 진혼제를 거행하려고 했으나 하지못하고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거행되었다. 
 
함세웅 신부(공동 대회장)는 “고려인들이 고향과 모국의 가치를 되새기며 조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되물으며 “남북일치와 화해를 기리며 통일의 길목에서 통일을 염원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민족 사랑과 고려인이 그리는 선조들의 귀중한 삶, 고려인의 희망 미래를 위해 순례자의 뜻을 모아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리자”고 기도했다. 

 

▲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그는 누구인가?

 

러시아 연해주 항일 민족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배후에서 지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된 인물이다.

 

평생을 편안히 잘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꽃같이 살다. 그러나  조국은 그를 역사속에서, 기억속에서 잊고 있다. 그는 평생을 모은 전 재산과 목숨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아낌없이 바쳤지만 이데올로기 희생물로 무장투쟁을 한 연해주 독립운동 부분은 역사에서 재조명되지 않고 있다.  

 

함경도에서 머슴과 기생의 사이에서 노비로 1860년에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대기근이 난 9세때 함경도민 전체가 두만강을 건너 최초 한인촌에 입성했다.

 

최재형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가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 가출이 인생을 바꾸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보시에르(목호)항구에서 소련 원양어선 선장부부가 양아들을 삼아 한인 최초 지식인이 되어 세계일주 여행을 2번씩이나 하며 유럽선진문물을 일찍이 배웠다. 최재형의 유럽여행은 민영환보다 앞선다. 그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핫산과 라즈돌노예 군사전용도로를 건설하는데 한인 노동력을 투입하여 돈을 벌게 해준 덕분에 추운 소련에서 한인들에게 뻬치카(난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연해주에서 13년 동안 군수물자를 납품하여 거부가 되었다.

 

그는 독립군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한인들2세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선생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납업자로 발돋움하여 거부로 성장한다. 보통사람이 한달에 1800-2000원 받을 때 최재형은 당시 한화로 한달에 50만원, 연간600만원의 수입을 올렸으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거부였다.  최재형 선생은 돈을 벌어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쓰지 않고 학교32개를 세워 한인의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그 후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우수한 소련제 무기를 구입하여 지원하고, 1909년9월11일 안중근 의사가 중심이 되어 12명이 참여한 단지동맹 또한 최재형 선생이 주도했다.

 

최재형은 신문사인 대동공보사 사장을 역임하며 한인들의 독림운동을 고취시켰다. 이때 대동공보를 보고 찾아온 안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사주어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산파역할을 한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최재형은 1920년 4월 5일 우스리스크 집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하여 6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최재형 선생이 1919 - 1920년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복원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 최재형 선생이 1919 - 1920년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복원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장마로 도로가 침수되어 이상설 기념관, 발해 성터를 답사하지 못해 아쉬웠다.  러시아 정부가 대국답지 못하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여 라즈돌노예에서 고려인희생자들을 위한 ‘진혼제’를 올리려고 했으나 못하게 하여 고려인문화센터에서 진혼제를 거행했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우스리스크에서 고려인의 문화공간뿐만 아니라 러시아 그리고 소수민족들에게도 톡톡한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려문화센터 건립을 위해서 이부영 전 의원(공동 대회장)이 예산확보 등 2번씩이나 부도가나서 중단될 때마다 많은 관심과 지원을 통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창주 오디세이 집행위원장(세계 한민족포럼 조직위원장)은 우스갯소리로 이부영 전 의원이 이것 하나만은 가장 잘했다고 말할 때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부영 공동 대회장은 축사에서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만시지탄이지만 동쪽 부산에서 서쪽 끝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대륙의 철도를 연결하고 러시아 천연가스를 끌어오면 한반도는 물류중심이 된다”고 역설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이 대회장은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꿈꾸기 위해선 연해주 시베리아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추동해내는 전진기지가 되어 우리의 의식이 경계선을 허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진혼제의 순서에서는 마치 고구려 무희들이 천상에서 내려와 한스런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변화무쌍한 예술과 패션의 진화속에서도 우리의 전통과 얼을 간직한 채 아리랑에 맞춰 춤을 추고 타악기인 북의 장중하고 다이나믹한 리듬에 맞춰 군무를 하는 모습에서 웅혼한  고구려의 기상을 엿보게 했다. (계속)

 

▲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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