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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관에서 숙명론과 결정론의 본질적인 차이

운명관에서 <숙명론은 운명의 힘을 어찌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

노병한 사주풍수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9/08 [07:35]

 

▲ 노병한 자연사상칼럼니스트     © 노병한 사주풍수칼럼니스트

[노병한의 운세코칭] 운명을 믿는 자도 있고 운명을 불신하는 자도 있다. 그런데 운명을 믿는 쪽의 운명관에는 숙명론과 결정론이 함께 병존하면서 갑론을박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운명관에서 <숙명론은 운명의 힘을 어찌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고, 운명관에서 <결정론은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운명관에서 <숙명론은 운명의 힘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인간의 존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그 어떤 숙명이 있다고 하는 <소박한 신앙>으로 정립된 것으로 종교적 철학적인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숙명론은 신()이나 우주 지배자의 의지에 따른 결정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규정한다고 본다. 따라서 숙명론에서는 개개 인간은 자신의 장래를 전혀 예견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숙명론은 흔히 결정론과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정론이란 모든 일은 각각의 원인에 따라 일정한 조건 아래서는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결정론에서는 예견과 예측이 가능하며 예외적인 현상의 발생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결정론이나 그에 대한 비결정론은 오히려 운명이 어느 정도 발전된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숙명론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미개시대의 미()개인이나 아니면 고대민족의 신화나 전설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다. 예컨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보이고 있는 운명과 관련된 운명과 관련된 여신은 3명의 모이라이(Moirai)인데 각각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여 생명의 실을 짜내는 클로토(Clotho) 여신

인간의 생애를 마음대로 다루는 라케시스(Lachesis) 여신

인간의 생명·줄을 끊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아트로포스(Atropos) 여신

 

이와 같은 운명신과 관련된 신화는 게르만신화나 바빌로니아신화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이 미개인이나 고대민족에서는 <운명의 힘>을 의인화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런 <소박한 신앙>은 원시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소박한 운명의 신을 신앙하는 폴리스가 해체로 접어들었을 때에 비로소 합리적 정신에 기초한 신화의 수정이 시작되었다.

 

플라톤(Platōn) 이전에 운명을 고찰한 철학자로서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생성과 발전을 일정한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필연적인 운명을 깨닫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이성적이며 최선이고 행복이라고 했다.

 

한편 스토아파(The Stoic school)도 우주는 로고스(Logos)에 의해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고스는 운명인 동시에 모든 것을 합목적적으로 형성하는 이성적인 섭리라고 인식했다. 소우주로서 인간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인 로고스와 동일하기에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 바로 로고스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라 여겼다.

 

이렇게 모이라이(Moirai) 이외의 다른 관점에서 <운명의 관념>을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바로 플라톤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소박한 신앙>이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의 독립성이 자각되고 강조되는 중세 이후에 비로소 철학과 신학 등으로 승화를 하기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운명관에서 <결정론은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정신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물질적인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 2가지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운명관>의 관점은 그리스도교의 구제예정설救濟豫定說()이나 근세유럽의 관념론(觀念論) 등이다.

 

둘째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운명관>의 관점은 고대의 데모크리토스(Démocrite)로부터 근세자연철학에 이르는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변증법적인 논리 등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교의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죄를 공유하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영원성의 소멸로 인간의 운명이 규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구세주 예수만이 이 상태를 최종적으로 구제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구제예정설 논쟁으로 발전한 것은 기독교의 대사도 바울로(Paulos)가 그 기원이다. 바울로는 구약시대에 있어서 신의 섭리와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제를 연결시킴으로써 현세의 존재나 사건을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아담에 의한 원죄를 공유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덕적으로 무력하여 구원은 신의 의지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에 맡겨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의 은혜라는 측면을 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받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깊게 논하지를 않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예정만 언급되어 있고 멸망에 대한 예정의 언급은 없었다는 점이다.

 

구원과 멸망이라는 이중예정설(二重豫定說)을 설파한 사람은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칼뱅(Calvin)이다. 그는 구원만이 아니라 멸망도 신에 의해 사전에 예정되어 있어 어떠한 선행을 통해서도 이를 바꿀 수 없고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한 이중예정설의 귀착점은 바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절망이다. 그러나 칼뱅은 개인은 스스로를 선택된 자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직업에서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이래의 수도원적인 금욕은 바로 세속적인 금욕 즉 직업의 노동과 검약으로 대치되게 이른다.

 

한편 17세기의 스페인의 신비신학자 미겔 데 몰리노스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교회의 일이나 개인의 윤리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으로 향한 명상과 자기포기에 의해 신의 섭리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수동적인 불()활동을 철저히 지킬 것을 역설한다. 이 사상은 1687년에 이단으로 배격되었지만 오히려 루터파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숙명론과 결정론은 불교의 인과응보나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죄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비()결정론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근세의 관념논리학, 스피노자(Spinoza)의 합리적 결정론, 라이프니치(Leib´niz)의 예정조화설, 칸트(Kant) 및 신칸트파의 목적론적 결정론, 과학적 결정론 등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근세 유럽에서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휴머니즘 사상의 보급으로 인해 특기할 만한 운명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무()를 뜻하는 니힐리즘(Nihilism)은 새로운 운명관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런 무()사상이 바로 동양의 노자(老子) 사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이전의 신학적 예정설은 신() 혹은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였다. 이렇게 니체(Nietzsche)로 대표되는 근대의 니힐리즘은 그에 대한 반정립(反定立)을 뜻하는 안티테제(Antithese)였다. 그러므로 니체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대표적인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자신이 태어나면서 거부할 수 없이 <선천적 숙명론적>으로 타고난 요인과 살아가면서 수많은 변화와 변동 그리고 변곡점을 맞이하는 <후천적 운명론적>인 부분들을 구분해 면밀한 관찰을 한번쯤 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게 바로 동양에서 개발된 인간의 동태를 궁구하는 정통 사주(四柱)학과 정통 명리(命理)학을 통해서 말이다. nbh1010@naver.com

 

/노병한:박사/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노병한박사철학원(원장)/자연사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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