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은 무수하게 얽혀든 시대정신의 요약된 정리가 쉽지 않다. 나름대로 역사를 헤아려 많은 칼럼을 써오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스스로 던진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며 많은 시간을 삼킨 부분이다. 이에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 아닌 시대를 관통한 거센 바람 속에 묻혀버린 소중한 이야기를 헤아려 역사의 교훈으로 제시하는 의미를 담았다.
인류사에서 질병과 재해의 악순환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점철되어온 역사가 중세시대라면 르네상스 시대는 이와 같은 중세의 다양한 실험을 통한 인류의 지혜가 결실을 거둔 의미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1789년 시민운동으로 탄생한 프랑스 혁명은 1688년 외세의 힘으로 절대 권력의 폭정을 차단한 입헌군주제를 낳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 식민지 독립의 선언을 통하여 독립전쟁을 이끌어 1783년 미국의 독립이 이루어진 내용과는 분명하게 차별화된 의미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잠시 역사적 맥락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1620년 영국에서 탄압받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도피하여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에 세운 영국의 식민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는 영국 정부가 주관한 식민지 정책이 아닌 자연적으로 생겨난 영국의 자치도시였다. 이러한 바탕에 솔깃해진 영국은 1630년경 무력으로 뉴햄프셔와 메릴랜드 그리고 1663년 캐롤라이나까지 식민 도시를 확장하였다. 이어 1664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오늘날 뉴욕인 뉴 암스테르담을 정복하여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내친김에 스페인 식민지 플로리다를 접수하여 13개 식민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나아가 영국은 1763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북미 대륙의 캐나다 퀘벡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통한 강력한 조세 정책과 무리한 규제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에 식민도시를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거대한 영국의 견제라는 명목으로 프랑스를 끌어들인 후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의 은밀한 지원을 받으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1783년 9월 3일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파리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루이 16세 왕은 식민지 대부분을 잃었으며 영국의 견제라는 명분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막대한 비용의 출혈로 경제 상황이 최악이었다.
![]() ▲ 레베용 폭동/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1789년 삼부회(Estates-General)/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에 민심의 불만이 커지면서 오랜 적대국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가 있는 왕실에 곱지 않은 시선이 쌓여갔다. 당시 파리 ‘포부르 생 앙투안’에서 벽지 공장을 운영하며 왕실을 최고의 거래처로 가지고 있었던 ‘장 밥티스트 레베용’은 이와 같은 피부로 느껴지는 민심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프랑스 남동부 ‘오베르뉴 론 알프’ 지방의 ‘앙노네’(Annonay)도시에서 종이공장을 운영하던 ‘몽골피에 형제’가 1782년 12월 14일 최초로 열기구를 하늘에 띄운 소식이 들려왔다. 평소 이들 형제와 많은 거래가 있었던 ‘레베용’(Jean-Baptiste Reveillon. 1725~1811)은 번개처럼 스쳐 가는 생각을 가지고 궁전으로 달려가 당시 왕비의 가장 절친한 실세였던 폴리냑 부인을 만나 추락하는 민심을 추스를 열기구 기획을 전달하여 즉시 국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에 ‘레베용’의 지휘 아래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는 1783년 9월 19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과 왕비를 모시고 오리와 닭과 양을 태운 열기구 ‘레보용 비행선’(Aérostat Réveillon)을 띄웠다. 이후 11월 21일 인류 최초의 사람을 태운 열기구가 하늘로 날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공적인 열기구 비행으로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에 열기구 열풍이 불면서 추락하는 민심을 붙잡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여기서 하나 살펴 갈 내용이 있다, 당시 ‘몽골피에 형제’가 가지고 있던 ‘앙노네’(Annonay)도시와 인근 지역 비다롱(Vidalon)의 종이공장은 최고의 호황이었다.
‘몽골피에 형제’가 하늘로 오르는 열기구 제작과 실험에 빠져 있던 1781년 비다롱(Vidalon) 공장에서 과도한 노동시간에 적합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대표단을 뽑아 몽골피에 형제와 협상하였으나 ‘몽골피에 형제’는 이를 무시하였다, 이에 모든 노동자가 단합하여 두 달 동안 파업하였다. 이어 ‘앙노네’(Annonay)의 공장까지 가세하려 들면서 지역 경제가 최악의 사태를 맞으면서 지역 민심이 동요하였다, 이에 당시 국왕의 명을 받들어 해당 지역의 사법과 조세를 담당하던 대관소(Bailiage)가 강압적인 중재에 나섰으나 노동자들은 정면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오랜 파업으로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몽골피에 형제’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노동자와 협상에 나서 가까스로 사태를 무마하였다.
이는 프랑스 전제 군주 시대의 사회적 시스템이었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에 대한 오랜 폐단이 불거진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다롱(Vidalon) 종이 공장의 임금인상 투쟁에서 대관소(Bailiage)의 오랜 관행의 역할이 더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다롱(Vidalon)사태를 계기로 그 명칭이 ‘시네쇼스’(sénéchaussée)로 바뀌게 되었던 사실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빠트릴 수 없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몽골피에 형제’의 비다롱(Vidalon)공장에서 1781년 발생한 임금인상 투쟁은 작은 도시의 사회적 민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프랑스의 전반적인 민심과 시대 상황을 선구적으로 예고한 의미가 있다. 이후 1785년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은 당시 최악의 경제 상황에 짓눌린 일반 서민의 입장에서 그 전후 사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를 자극하는 상상 할 수 없는 고가의 사치품이라는 사실과 왕과 왕비라는 권력을 바탕으로 추악한 술수를 동원하여 이를 취득하였다는 가정이 전제되면서 진실과 거리가 먼 민심이 증폭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다시 되새겨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 1786년 5월 31일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최종 판결에서 로한 추기경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희대의 사기단 라모트 부인은 실형을 받아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탈옥하여 영국으로 도주한 것이다. 이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외국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격앙된 민심이 고조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투옥된 희대의 사기단 라모트 부인이 탈옥하여 영국으로 도피한 행간에는 바로 이러한 묵시적이고 동정적인 사회적 민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1788년 영국에서 희대의 사기단 라모트의 비망록 ‘여왕 폐하’(Mémoires Justificatifs)가 영어판과 프랑스어로 출판된 사실 또한 역사가 품은 내용이다. 당시 프랑스의 개입으로 미국의 모든 식민지를 잃어버린 가장 적대적인 관계이었던 영국에서 허구의 내용으로 가득한 사기단의 비망록이 연속적으로 출판되어 프랑스에 소개되면서 프랑스의 민심은 왕실을 향한 분노의 몸짓을 키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추락한 민심이 날이 갈수록 차곡차곡 화약고처럼 쌓여가던 시기인 1789년 4월 26일 마침내 성난 불꽃을 켜댄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많은 노동자가 밀집한 파리의 생 앙투안’(Faubourg Saint-Antoine)에서 벽지공장을 운영하던 ‘장 밥티스트 레베용’(Jean-Baptiste Reveillon. 1725~1811)이 경기 침체에 따른 임금 삭감을 통한 제품가격의 인하를 거론한 것이다. 당시 ‘생 앙투안’ 지역은 파리는 물론 프랑스의 실물 경기에 직접 영향을 미칠 만큼 많은 공장과 노동자들이 있었다.
당시 자꾸만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에 대놓고 불만을 터트리는 노동자들을 보며 사업주들은 사업주대로 경기 침체에 따른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1789년 4월 21일 칸(Cannes) 앞바다에 있는 생 마르게리트(Saint-Marguerite)섬에서 삼부회(Estates-General) 소집을 앞두고 각 계층의 불만 목록 청원(Cahiers de doléances)에 대한 집회가 열렸다. 이는 국가 파산상태에 이른 심각한 국가재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루이 16세 왕이 1789년 5월 5일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면서 각 계층의 불만을 수렴하여 청원 목록을 작성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제조업을 대표하는 ‘레베용’은 하루 임금의 절반을 써야 할 만큼의 폭등한 빵 가격에 대하여 이를 감당할 방법이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어 그는 노동자와 경영주가 협력하여 이를 극복해야 한다며 3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자신의 공장에서 이를 먼저 실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와전되면서 ‘레베용’이 임금삭감을 발표했다는 내용만 파리에 전달되면서 ‘생 앙투안’가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고조되었다. 1789년 4월 26일 일요일이었다. 파리 노천카페에서 누군가가 ‘레베용’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허구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어 진실과 허구가 혼재된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있었다. 26일 일요일의 시위는 내일 다시 만나자며 조용히 끝났다.
이어 시민과 노동자는 다음날 4월 27일 센강에 있는 시테섬(Ile de la Cite)에 모여들었다. 당시 목재와 돌로 만들어진 생미셸다리(Pont Saint-Michel)를 건너 나오면서 5구역과 13구역 사이의 무두장이와 대장간 등이 몰려있었던 ‘포브르 생 마르셀’(Faubourg Saint-Marcel) 지역의 노동자와 수공업이 밀집한 ‘마레 지구’(Explore the Marais)에서 나온 노동자들이 합세하였다. 이어 누군가의 가자! ‘레베용’의 공장으로! 라는 구호가 터져 나오며 ‘생 앙투안’가를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27일의 시위는 많은 노동자가 합류하여 대형시위로 발전하였지만, 평화적인 시위로 끝났다. 다음날 28일 시내에 몰려든 노동자들은 격앙된 구호를 외치며 ‘생 앙투안’가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곳 근로자까지 가세하여 많은 수가 늘어났다. 이어 함성이 밀려들면서 수많은 노동자가 또 한편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수공업 제조소가 많았던 인근의 샤량통르퐁(Charenton-le-Pont)과 샤론 쿼터(Charonne quarter)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레베용’의 벽지공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군대가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레베용’은 진실의 유무를 떠난 성난 군중의 행동에 누군가의 조작된 선동으로 선의의 민중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이에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며 경찰국장에게 요청한 군대가 공장을 지키고 있었 다. 마침내 저녁이 되면서 밀고 밀리던 시위대와 군대가 충돌하면서 300여 명의 부상자와 30 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당일 레베용의 벽지공장은 불타지 않았지만, 인근의 소금공장이 불탔다. 이어 성난 민심은 다음날 레베용의 벽지공장마저 불태웠다.
혁명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진실의 유무를 떠나 민심의 편이 아닌 특권층의 권력으로 존재하는 권력에 항거한 민중의 행동이었다. 이는 민중의 힘이 모이면 무한한 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 발화점이었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혁명은 역사의 횃불로 타올랐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루이 16세 왕에게 민중의 힘을 경고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 귀족 출신의 사회 개혁가인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747~1827)이다. 그는 루이 16세 왕에게 타오를 횃불의 실상을 전하였을 때 반란이냐고 물었던 왕에게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한 일화는 역사가 남긴 이야기다.
마침내 1791년 6월 20일 루이 16세 왕 가족은 성난 민중의 횃불을 피하여 왕실을 버리고 도피에 들어가 프랑스 북동부 작은 마을 바렌(Varennes)에서 붙잡혀 강제송환 되어 튈르리 궁전에 감금되었다. 이른바 바렌느 도피 사건(Flight to Varennes)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곁을 지키며 튈르리 궁전에 감금된 왕비의 시중을 드는 여인이 있었다. 필자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의 횃불을 켜 든 내로라하는 인물들 속에서 소리 없이 피었다가 스러진 들꽃 같은 이 여인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앞 편의 칼럼에서 소개한 ‘앙리에트 캉팡’(Henriette Campan. 1752~1822)이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 궁전에 들어와 루이 15세 왕 딸들의 교육을 맡았다. 이후 루이 15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일급 시녀(Première femme de Chambre)가 되었다. 일급 시녀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침실 열쇠를 왕비와 유일하게 가지고 출입이 가능한 인물이다. 이에 그 누구보다도 왕비의 모든 것을 가장 자세하게 알 수 있었던 ‘앙리에트 캉팡’이 역사에 남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기록은 프랑스 혁명으로 타오른 군중심리와는 사뭇 달랐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1792년 8월 10일 과격파 혁명당원 ‘상 퀼로트(sans-culotte)’들이 튈르리 궁전을 쳐들어왔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전 감금 상태에 있었던 루이 16세 왕 부부를 포함한 일행은 혁명군이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이 있는 파리 3구의 템플기사단(Ordre des Templiers)의 근거지였던 탕플 탑(Tour du Temple) 수도원에 감금시킨 직후였다. 당시 혁명군은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이때까지 ‘앙리에트 캉팡’은 튈르리 궁전에서 마지막 왕비의 곁에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혁명이라는 피바람이 불어오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폴리냑 공작부인’은 혁명 이후에도 왕실의 재건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대부분 기록이 왕비를 배신한 도피자로 오스트리아의 망명을 기록하고 있지만 잘못된 기록이다. 그녀는 혁명 이후 실력자들로부터 스위스로의 망명 권유를 받아 스위스로 간 후에도 왕비와 많은 연락을 취하였다. 1793년 10월 16일 왕비가 처형된 이후 12월 9일 그녀는 왕비의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러 정황과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보낸 밀사의 성격도 살펴진다. 그녀의 사후에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오늘날에도 진실과 허구의 판단이 쉽지 않다.
![]() ▲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1791년 6월 20일 바렌느 도피 사건(Flight to Varennes)/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와 함께 ‘사부아 공작 랑발 부인’(Savoy, Princesse de Lamballe. 1749~1792)으로 불리는 마리 테레즈 루이즈(Marie Thérèse Louise)에 대한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다. 그녀는 1791년 루이 16세 왕실의 구원을 위하여 영국을 다녀왔다. 이후 사지와 같았던 튈르리 궁전에 합류하여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건강이 나빠져 잠시 수녀원에 치료를 받으러 가게 되었을 때 왕비는 돌아오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돌아와 1792년 8월 10일 탕플 탑에 함께 투옥되었으며 8월 19일 루이 16세 왕가 이외 투옥자들을 라 포르스 감옥(La Force Prison)으로 분리하는 조치에 따라 왕비와 헤어졌다.
1792년 9월 3일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동맹군이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던 시기에 이러한 군대와 왕가를 지지하는 군대가 감옥을 습격하여 죄수를 석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이에 과격파 혁명당원 ‘상 퀼로트’가 먼저 감옥을 점령하여 형식적인 즉결 재판을 통한 대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9월 학살이다. 당시 ‘라 포르스 감옥’에서 열린 즉결재판에서 ‘사부아 공작 랑발 부인’은 혁명의 정당성과 왕실과 왕비를 부정하는 답변을 요구받았다. 그녀는 왕비를 부정하는 대답을 거부하면서 즉결 처형되어 세상을 떠났다.
‘루이 16세 왕’(Louis XVI of France. 1754~1793)은 1793년 1월 21일 오늘날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으로 불리는 혁명광장에서 단두대의 처형으로 3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이국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는 10월 16일 38세 나이에 처형당하였다, 부부는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 막내딸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Sophie Hélène Béatrix. 1786~1787)는 생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둘째이며 장남인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Louis Joseph Xavier François. 1781~1789)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 10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황태자로 책봉된 셋째이며 둘째아들인 루이 샤를(Louis Charles-Louis XVII. 1785~1795)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감옥에서 10살의 나이로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녀 마리 테레스 샬로트(Marie Therese Charlotte. 1778~1851)는 어머니의 나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협상으로 프랑스 혁명군 포로와 교환되어 1795년 12월 감옥에서 풀려나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이렇게 비운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사후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왕비가 수레를 타고 마지막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서의 모습과 최후의 처형 순간까지 보여준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은 행동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정한 왕비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왕비가 마지막 삶을 앞두고 함께 투옥되었던 루이 16세 왕의 여동생인 시누이 엘리자베스 공주(Élisabeth of France. 1764~1794)에게 남긴 절절한 편지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 내용을 다시 새기게 한다. 당시 왕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시누이 엘리자베스 공주는 처형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많은 편지를 남겼다, 그중 자녀들에게 훗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억울한 부모의 죽음에 대하여 절대로 복수하여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강하게 남기고 있다. 이는 자식을 살려내기 위한 왕비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러한 유언을 남겨 자녀들이 훗날 문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시누이 엘리자베스 공주도 왕비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처형되었다.
이와 같은 혁명이라는 폭풍과 같은 회오리 속에서 혁명을 이끌던 주체 세력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유죄를 얻어내기 위하여 온갖 그릇된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처형으로 몰고 갈 만큼의 실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이에 추구한 죄목이 둘째 아들 루이 샤를(Louis Charles-Louis XVII. 1785~1795)과의 근친상간이었다. 왕비에 대하여 원 없이 부풀린 온갖 소문의 실체를 도덕적인 훼손을 통하여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도덕한 문제가 생겨났다는 시기는 아들 루이 샤를이 다섯 살 나이였다. 긴 막대기를 가지고 놀던 중 고환을 다쳐 우는 아들의 고환을 만진 어머니의 죄가 근친상간이었다.
여기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가장 진솔한 모습을 지켜본 ‘앙리에트 캉팡’(Henriette Campan. 1752~1822)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간다. 그녀는 1792년 8월 10일 왕비가 떠난 튈르리 궁전을 지키던 그는 분노한 폭도들에 의하여 자신의 집마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시골로 내려갔다. 이후 1794년 파리 서북쪽 교외의 생 제르맹 앙 레(Saint-Germainen Laye)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세웠다. 혁명에 의하여 처형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였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하는 내용이 있다. ‘앙리에트 캉팡’이 1794년 학교를 설립하여 1806년까지 운영한 학교의 학생명부를 보면 ‘외젠 드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 1781~1824)와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Hortense de Beauharnais. 1783~1837) 남매가 있다. 바로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1821)의 의붓자식이다. ‘나폴레옹 1세’가 1796년 첫째 부인 조제핀(Empress JoséphIne. 1763~1814)과 결혼하였다. 이때 부인 ‘조제핀’에게는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Alexandre de Beauharnais. 1760~1794)와 결혼하여 낳은 남매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에 가담하였던 조제핀의 첫 남편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는 삼부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뒤바뀐 법으로 의원직을 잃고 혁명 이후 편성된 라인군(Armée du Rhin)에 복직하여 1793년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영국과의 전투에 패하면서 적과 내통했다는 의심으로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부부가 투옥되었다. 1794년 7월 24일 남편은 처형되었으나 며칠 후 내각이 바뀌면서 부인 조제핀은 풀려났다.
전 남편이었던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가 1794년 처형되었을 때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는 13살이었으며 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는 11살이었다. 이후 조제핀은 어린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는 목공 일을 배우게 하였으며 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는 재봉 일을 배우게 하였다.
유난히 악몽 같았던 해가 지나고 다음 해 1795년 프랑스 전역에 집에 있는 모든 무기를 반납하라는 공고령이 내려졌다. 이를 어길 때에는 반란죄로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외젠 드 보아르네’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품 보검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칼을 들고 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는 무턱대고 가장 높은 사람이 있을 만한 사무실을 찾아 들어갔다. 때 마친 들어오는 어느 군인이 있었다, 어린 소년이 들고 있는 심상치 않은 보검을 지켜본 군인이 물었다. 무엇이냐? 이때 소년은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칼을 지키고 싶어 왔다고 대답하였다. 소년을 한참 지켜본 군인은 집에 보관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써주면서 이름을 물었다. “저는 ‘외젠 드 보아르네’입니다.”라고 또박또박 대답한 소년은 공손한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칼을 들고 집에 온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 조제핀은 아들의 소망을 받아준 고마운 군인을 찾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바로 그 군인이 나폴레옹 1세였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나폴레옹 1세는 두 자녀를 둔 조제핀과 1796년 3월 9일 결혼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1세는 부인 ‘조제핀’이 전 남편에게서 낳은 두 자녀를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이때 나폴레옹 1세가 이들의 교육을 ‘앙리에트 캉팡’이 1794년 설립한 기숙학교에 맡겼다.
이와 같은 ‘앙리에트 캉팡’이 나폴레옹 1세와 가졌던 인연을 살펴보기 위하여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앙리에트 캉팡’ 그녀의 본명은 잔느 루이즈 앙리에트 카르동(Jeanne Louise Henriette Cardon)이다, 아버지 ‘에듬 쟈크 주네’(Edme-Jacques Genet. 1726~1781)는 당시 영어에 정통한 통역관이었다. 그는 프로방스 백작의 통역관을 거쳐 프랑스 왕실의 영어 통역관으로 근무하였다. 그에게는 딸 ‘앙리에트 캉팡’(Henriette Campan. 1752~1822)과 아들 ‘에드몽 샤를 주네’(Edmond-Charles Genet. 1763~1834)가 있었다.
‘앙리에트 캉팡’은 부모의 교육열에 힘입어 조기 교육을 받아 매우 영특하였다, 특히 어학에 뛰어난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녀는 15세에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이와 같은 재원에 대한 자자한 소문이 왕실까지 전해져 1768년 루이 15세 왕은 그녀를 공주의 교육을 전담하게 하였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곁을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왕실에 들어간 그녀는 1774년 왕실 관리의 아들인 피에르 도미니크 프랑수아 버틀렛 캉팡(Pierre-Dominique-François Berthollet Campan. 1722~1797)과 결혼하였으나 1790년 이혼하였다.
또한, 그의 남동생 ‘에드몽 샤를 주네’(Edmond-Charles Genet. 1763~1834)는 어려서부터 영어와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라틴어에서부터 스웨덴어와 독일어에까지 능숙한 천재였다. 그는 아버지를 이어 18세이던 1781년 왕실 영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다가 1788년 러시아에 프랑스 대사로 갔다. 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과 스페인 연합의 대프랑스 전쟁에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임무를 가지고 1793년 최초의 미국 프랑스 대사가 되어 파견되었다. 이에 미국에 건너가 미국 중남부 멕시코만(灣) 북쪽 미시시피강 유역에 소재한 ‘루이지애나주’(Louisiana)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강력한 지원요청을 펴다가 미국 정부가 프랑스 혁명정부에 이를 항의하는 바람에 본국 송환령이 내려지면서 미국에 망명하여 정착하였던 인물이다.
이러한 ‘앙리에트 캉팡’이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1821) 의붓자식의 교육을 맡게 되었던 배경이 있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 1746~1785)와 나폴레옹 1세를 프랑스 왕실에서 만났다. 나폴레옹 1세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제노바 공화국(Republic of Genoa)의 영토이었던 지중해의 코르시카(Corse)섬에서 태어났다. 이후 루이 15세 왕 시대인 1768년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이루 1776년 사실상의 코르시카섬의 대표로 선정된 그가 베르사유궁을 방문하여 루이 16세 왕 내외를 알현하였다. 이어 다음 해인 1777년 6월 8일 코르시카섬의 정식 대표가 되어 다시 찾았을 때에 둘째 아들 나폴레옹 1세를 데리고 왔다.
당시 왕비의 면담 일정을 총괄하던 ‘앙리에트 캉팡’이 뛰어난 이탈리아어로 통역을 맡게 되면서 프랑스어를 못하였던 소년 나폴레옹 1세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자상하게 챙겨주는 ‘앙리에트 캉팡’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깊은 인상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앙리에트 캉팡’이 1794년 파리 서북쪽 교외의 생 제르맹 앙 레(Saint-Germainen Laye)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세울 때 나폴레옹 1세의 도움이 많았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나폴레옹의 의붓자식인 ‘외젠 드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 1781~1824)와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Hortense de Beauharnais. 1783~1837) 남매의 교육을 ‘앙리에트 캉팡’이 맡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 1778~1846)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1873)가 1852년 프랑스 황제가 되었던 사실 또한 역사가 품은 비애의 이야기이다.
이와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조카이었던 신성로마 황제 프란츠 2세(Francis II, Holy Roman Emperor. 1768~1835)는 1804년 황제에 오른 프랑스 나폴레옹이 1810년 1월 첫째 부인 조제핀(Empress Joséphine. 1763~1814)과 이혼한 이후 딸 마리아 루이즈(Marie Louise, Duchess of Parma. 1791~1847)를 나폴레옹과 결혼시켰던 사실에서 실타래처럼 얽혀든 역사의 흔적을 살피게 한다.
혁명이라는 신성한 정의를 명분으로 역사의 거리에 피와 함성을 쏟아낸 프랑스 혁명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온건한 혁명을 통한 바로 서는 나라를 위하여 중재의 선을 넘나들었던 미라보 백작(Mirabeau. 1749~1791)이거나 19세의 나이로 미국 독립전쟁에 뛰어든 자유주의자 라 파예트(M. La Fayette´. 1757~1834)와 같은 인물이 추구한 이념은 온건한 혁명이었다,
이와 달리 소외된 계층의 인간다운 삶을 주창하며 신성한 혁명을 위한 피는 흐르는 자체로 아름답다며 단호한 처형이 곧 혁명임을 내세웠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의 암살이라는 분노를 삼키며 죽음의 횃불을 치켜든 이들이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와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이었다. 민중의 심판이라는 시퍼런 칼날(단두대)로 처형한 숱한 생명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 칼날에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내용 또한 역사로 남은 이야기다.
시대의 변화를 요구한 혁명(revolution)이라는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역사적인 의의는 크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함성에 죽어버린 진실과 신성한 개인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박탈한 책임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필자는 이와 같은 피바람이 몰아친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소리 없이 피었다가 스러진 들꽃 같은 여인 ‘앙리에트 캉팡’(Henriette Campan. 1752~1822)을 오래도록 품고 있었다. 자신의 굴곡진 마지막 삶을 프랑스 혁명 기간에 처형된 자녀의 교육과 전쟁으로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 교육에 헌신한 진정한 의식과 휴머니티가 그 무엇에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느껴진 까닭이다.
![]() ▲ ‘앙리에트 캉팡’(Henriette Campan. 1752~1822)/ 에쿠앙 성(Château d' Ecouen)/ 망트라 졸리(Mantes-la-Jolie) 마을 ‘앙리에트 캉팡’ 묘지 1823년 회고록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그녀는 이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특히 어린 소녀의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나폴레옹 1세에게 간곡히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을 받아들여 1807년 에쿠앙 성(Château d' Ecouen)에 세워진 메종 교육기관(Maisons d' éducation)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814년 4월 연합군에 의하여 파리가 점령되면서 에쿠앙 성 인근에 러시아군대가 진주하였다. 이에 수많은 소녀가 있는 학교의 안전에 파리 시민들이 깊은 우려를 보내며 긴장하였다. 당시 ‘앙리에트 캉팡’이 러시아군의 오스텐 자켄 장군(Fabian Gottlieb von Osten Sacken. 1752~1837)에게 학교를 보호하여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에 감동한 러시아 장군 오스텐 자켄이 즉시 지휘관을 불러 지금 이 시각부터 전 장병은 에쿠앙 성(Château d' Ecouen)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엄명하여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이야기는 ‘앙리에트 캉팡’에 대한 아름다운 인성을 절감하게 한다. 이와 같은 에쿠앙 성은 훗날 소설가 출신의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국립르네상스미술관으로 만들어 오늘날 존재하고 있다.
이렇듯 혁명과 전쟁이라는 역사의 폭풍을 맞아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던 그녀는 1822년 3월 16일 70세의 나이로 승천하였다. 그녀는 센강이 흐르는 노르망디의 도시로 모네의 정원으로 잘 알려진 지레르니 마을 곁의 망트라 졸리(Mantes-la-Jolie) 마을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묘는 다음과 묘비가 서 있다, ‘그녀는 청소년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불행한 이들을 위로하였다.’(Elle fut utile à la jeunesse et consola les malheureux)
‘앙리에트 캉팡’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 1823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라는 세 권의 회고록이 출판되었다. 회고록에 담긴 내용은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처형한 왕비의 죄상과 그 내용과는 너무나 달랐다.
신성한 혁명의 가치를 영원히 역사에 전하려면 프랑스 국민은 혁명이라는 함성과 횃불 속에 소중한 진실과 생명의 신성함까지 무참하게 쓸어 담은 잘못에 대한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 칼럼은 (217) 분단이후 최초로 북한을 그려온 화가 황창배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