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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234) 봉선화 꽃물을 삼킨 민족의 애환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01/18 [15:39]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만찬 공연에서 민족의 동요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2016년 케이블 TV 방송 Mnet의 동요 오디션 프로그램 '위키드'에 출연하여 뛰어난 감성과 청아한 음색으로 화제에 오른 소년 가수 오연준 군이 부른 노래였다.

 

이와 같은 동요 고향의 봄은 아동문학가 이원수(李元壽. 1911~1981)가 일제강점기인 1926년 중학생 시절에 발표한 동시이다. 마산이 고향인 그가 고향의 봄을 헤아려 노래한 동요는 우리의 산하에 담긴 아름다운 서정의 감성이 빛나는 노래로 강산의 숨결처럼 사랑을 받아왔다. 이는 1923년 3월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창간한 월간 아동문학지 ‘어린이’에 1926년 게재되었던 작품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동요 고향의 봄은 1929년 홍난파(洪蘭坡. 1898~1941)가 작곡하였다. 그가 1922년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한 이후 1929년 10월에 발행하였던 ‘조선동요백곡집’(朝鮮童謠百曲集)에 고향의 봄 작곡자로 그의 본명인 홍영후로 실려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홍난파의 곡에 앞서 마산에서 출생한 음악가 이일래(李一來. 1903~1979)가 먼저 ‘고향의 봄’을 다르게 작곡한 사실이 있었다.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이와 같은 내용이 확인된 것이다. 이어 가족의 확인에 의하면 당시 본명 이부근(李富根)이었던 이일래는 고향의 봄을 작곡하여 나중 부인이 되었던 여교사에게 선물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감동한 여교사와 1년간의 교제 후 1927년 12월 결혼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면 실질적으로 1926년 작곡된 것이다.

 

▲ (좌로부터) 고향의 봄 홍난파 악보/ 이부근 악보(왼쪽)와 이일래 악보 / 아동문학가 이원수/ 출처: 연합뉴스     © 브레이크뉴스

 


이후 개명된 이일래의 이름으로 새롭게 작곡된 고향의 봄은 1938년 ‘조선동요작곡집’에 수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작사자인 이원수가 1980년에 발표한 글에 동요 ‘고향의 봄’은 이일래의 작곡으로 마산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기 시작하였다는 언급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이어 그는 1928년 '산토끼'라는 동요도 그분이 작사 작곡하였으며, 이후 2, 3년 뒤에 홍난파가 작곡한 '고향의 봄'이 전국적으로 울려 퍼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동요라 할 수 있는 ‘고향의 봄’ 작곡가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본명이 홍영후(洪永厚)였다, 음악가 홍난파는 ‘고향의 봄’과 함께 민족의 노래로 불려온 가곡 ‘봉선화’를 작곡한 음악가이다. 동요 ‘고향의 봄’과 가곡 ‘봉선화’는 남과 북을 막론하고 이 땅의 감성과 민족의 정신을 담은 노래로 불러왔으며 오늘날에도 대표적인 노래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요와 가곡을 작곡한 음악가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가곡 봉선화를 부른 성악가 김천애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는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안익태(安益泰, 1906~1965)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내용과 함께 역사적인 아픔이다. 바로 나라의 국가와 함께 남녀노소 구분 없이 불리고 들려오는 동요와 가곡인 점에서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굴레와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국권을 침탈당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과 친일은 글자 그대로 애국과 매국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조국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48년 9월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 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줄여서 ‘반민특위’는 약 1년간의 활동 이후 1949년 10월 해체되었으며 1951년 2월 법이 폐지되었다.

 

이후 1992년 을사오적의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이 소송을 통하여 일부 부동산을 되찾게 된 사건이 일어나 분노하는 국민의 여론이 높아지면서 2004년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2005년 5월 31일 대통령 소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친일인사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무렵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선정한 4,776여 명이 수록된 친일인명사전도 함께 발간되었다.

 

당시 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11월 27일 발표를 앞둔 전날 음악가 홍난파의 유족이 서울행정법원에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결과 통지 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내었다. 이에 법원이 효력 정지 결정을 내려 일시 보류되었으나 2010년 11월 8일 유족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역사의 아픔을 헤아려 음악가 홍난파와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봉선화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음악가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옛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 283번지에서 홍준(洪埻)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홍난파(洪蘭坡)의 아버지 홍준()은 홍난파가 태어난 다음 해 1899년 서울 정동 1-45번지 오늘날의 예원학교 자리로 이사하였다. 홍난파(洪蘭坡)의 아버지 홍준(洪埻)은 국악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역관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선구적인 인물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목사의 조선어 선생이었다. 이어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열었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목사와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 성경의 조선어 번역작업에 착수하였을 때 함께 참여하는 등 개화기의 주요한 인물이었다.

 

홍준(洪埻)은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 9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사랑방에서 시작하였을 때에 1892년 세례를 받았다. 이후 언더우드 목사는 1900년 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하고 1915년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하여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일찍 개화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새문안교회를 다녔던 홍난파는 교회음악을 통하여 서양음악에 입문하였다.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5년 사립 영신소학교를 다녔던 홍난파는 1910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YMCA) 중학부에 입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교사인 김인식(金仁湜. 1885~1963)에게서 바이올린을 공부하였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교육가인 김인식은 평양 출신으로 1896년 감리교가 운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졸업하고 서울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음악에 뛰어난 그는 성악과 오르간 그리고 바이올린을 배우던 3학년 재학 중에 1학년 음악수업을 맡았다.

 

이후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당시 생겨난 여러 학교에서 다투어 교사로 초빙하여 국내 여러 학교의 음악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1909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음악교육 기관으로 설립된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이후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로 새롭게 탄생한 교육기관의 음악 교사로 재직 중에 YMCA에서 합창과 음악교육을 함께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이 결성된 배경이다.

 

홍난파는 국악을 공부하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에 입학한 이후 진로를 바꾸어 성악과 기악을 공부하면서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5년 16세에 김상운(金祥雲. 1898~1926)과 결혼하였으며 1916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가 되었다. 이후 1918년 일본 도쿄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에 입학하여 1919년 3월 수료하였다. 이때 맏딸 홍숙임(洪淑姙·1918~1984)이 태어났다. 이후 고국에 돌아와 1920년 ‘봉선화’(鳳仙花)의 원곡인 ‘애수’(哀愁)를 작곡하였다.

 

여기서 많은 자료에서 홍난파가 공부한 일본 ‘동경음악학교’를 ‘동경우에노음악학교’(東京上野音樂學校)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일본 동경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 있었던 학교를 동경우에노음악학교(東京上野音樂學校)로 잘못 표기한 것이다. 동경음악학교는 1887년 일본 최초의 음악 교사와 음악가의 양성 기관으로 설립된 학교로 교사 신축이 완료된 1890년 개교하였다.

 

이후 1893년 6월 동경고등사범학교 부속 음악학교로 바뀌었다가 1900년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로 다시 독립하면서 예비과와 본과 연구과 사범과로 개편되어 당시 홍난파가 입학한 시기에는 1년 과정의 예비과와 2년제 사범과 3년제 전수과로 구성되어있었다. 이후 2차 대전 종전 이후 학제가 개혁되면서 1949년 동경미술학교와 동경음악학교를 동경예술대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에 홍난파는 1년 과정의 동경음악학교 예비과를 1919년 3월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여기서 살펴야 하는 사실이 그해 2월 8일 이른바 동경 2·8독립선언서(二八獨立宣言書) 사건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은 30년 만의 폭설이 내렸다. 이날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현 한국YMCA)에 조선 재일 유학생이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면서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이다.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민족의 궐기를 외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시내로 나서면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당시 약 60명이 체포되어 8명의 학생이 기소된 것이다. 이에 항거하여 지속적인 투쟁이 벌어지면서 2월 12일 독립운동 모의의 명목으로 청년회관을 급습한 경찰에 의하여 5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는 등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내용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3·1 독립선언이 일어났다.

 

1919년 이와 같은 사건이 연속되던 2월 홍난파는 음악과 미술 문학의 빛을 뜻하는 ‘삼광’(三光) 잡지를 동경에서 창간하였다. 이후 3월 동경음악학교 예비과를 수료하고 귀국한 홍난파는 ‘삼광’(三光) 4호를 내고 경영난으로 폐간하였다. 다음 해 1920년 초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 본과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2.8 독립선언사건의 연루자이며 불온사상 소유자로 분류되어 입학이 불허되었다. 이에 일본대학 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920년 가을 다시 귀국하여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유의 깊게 살펴야 하는 내용이 있다. 봉선화의 원곡이 되었던 바이올린 곡 ‘애수’(哀愁)의 작곡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는 1919년 동경의 2.8 독립선언사건과 국내의 3·1 독립운동 이후와 다음 해 1920년 도쿄음악학교 본과의 진학이 2.8 독립선언사건의 연루자이며 불온사상 소유자로 분류되어 불허된 직후 바이올린 곡 ‘애수’(哀愁)가 작곡된 사실이다.

 

‘애수’(哀愁)라는 곡명은 사전적 의미로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 슬픈 시름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여러 내용에서 살펴지듯이 국권을 침탈당한 나라를 잃은 서글픈 감성이 분명하게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좌로부터) 홍난파/ 김형준과 홍난파/ 성악가 김천애/ 조선동요백곡집/     © 브레이크뉴스


홍난파는 1921년 첫 창작 소설집(創作小說集)인 ‘처녀혼’(處女魂)을 발간하였다. 이때 소설집 처녀혼 서두에 애수(哀愁)라는 곡명의 악보를 기재하였다. 당시 홍난파의 자필 기록을 보면 ‘1920년 4월 28일 작품’으로 명시되어 있다. 다음해 1922년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설립하였으며 1925년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세계’(音樂世界)를 창간하였다. 이후 소설집 처녀혼에 실린 악보 애수(哀愁)를 보았던 선배 음악가 김형준이 1925년 작사하여 가곡 봉선화가 탄생하여 1926년 편찬한 ‘세계명작가곡선집’에 실렸다. 이후 1926년 부인 김상운(金祥雲. 1898~1926)이 세상을 떠난 이후 홍난파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와 같은 가곡 봉선화의 작사자는 황해도 안악 출신의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가 중 한사람이며 성악가였던 김형준(金亨俊. 1885~?)이다. 그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인 선교사로부터 음악을 공부하였다. 이후 한때 정악전습소에서 국악을 연구하였던 그는 김인식(金仁湜) 그리고 이상준(李尙俊)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교육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경신중학교와 정신여학교 그리고 중앙고등학교와 경기공업고등학교 등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그는 국악의 채보 활동을 통한 전통음악의 발전과 함께 국악과 국악의 융합을 시도한 음악가였다. 김형준은 홍난파가 살았던 중구 정동의 옆집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홍난파의 집 마당과 마당과 김형준의 집 울타리에 많은 봉선화가 피어났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음악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던 홍난파의 선배인 김형준이 가곡 봉선화의 작사를 하게 되었던 상세한 배경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홍난파의 바이올린 곡 애수의 음악적 선율을 김형준이 봉선화라는 꽃으로 헤아리게 되었던 배경을 추정해 볼 내용이 많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선배인 김형준이 홍난파가 애수를 작곡하게 된 시대적 상황의 비밀스러운 감성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김형준이 봉선화를 보면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와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는 기록에서 이제는 역사로 남은 시대의 아픔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음악가 김형준은 봉선화 이외에도 많은 편곡과 작사를 하였던 것으로 여러 기록은 전하고 있지만 명확하게 전해진 곡은 봉선화와 함께 ‘저 구름의 탓’과 ‘나물 캐는 처녀’의 가사뿐이다. 서울대 교수와 예술원 회원을 역임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피아니스트 김원복(金元福. 1908~2002)이 김형준의 딸이다.

 

홍난파는 1926년 새롭게 설립된 동경고등음악학원(東京高等音樂學院)에 입학하였다. 이는 지난 1920년 도쿄음악학교 본과의 진학이 2.8 독립선언사건의 연루자이며 불온사상 소유자로 분류되어 불허된 후 6년 만에 새롭게 설립된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동경고등음악학원은 오늘날 국립음악대학(国立音楽大学)이 되었다. 당시 홍난파는 1928년 재학 중에 오늘날 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의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하였다. 다음 해 1929년 3월 동경고등음악원을 졸업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연악회를 부활시키면서 재즈 밴드(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교수에 취임하였다. 이때 학교 교육을 위한 자신이 악보를 그린 등사본 ‘조선동요백곡집’을 만들었다.

 

1931년 홍난파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는 미국의 유명 피아노 연주자 ‘윌리엄 홀 셔우드’(William Hall Sherwood, 1854~1911)가 1895년 설립한 시카고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Music School)에 유학하였다. 셔우드 음악학교는 셔우드 교수법이라는 우편을 통한 통신교재로 전문 음악가를 육성하는 통신 학교로 잘 알려진 학교였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학교는 2007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인수하였다.

 

당시 셔우드음악학교 입학하여 바이올린과 작곡 이론을 배운 홍난파는 아르바이트 하며 어렵게 공부하면서 교통사고로 늑골을 다치며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이후 1932년 5월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하고 1933년 1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귀국 독주회를 개최하면서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을 출판하였다. 이후 1934년 일본 빅터레코드 경성지점 음악주임에 취임한 이후 12월 이대형(李大亨· 1913~2004)과 재혼하였다. 이때 1935년 오늘의 기상청 서울 관측소 인근의 서울시 종로구 홍파동 2-16의 자택을 매입하여 1941년 삶을 마칠 때까지 거주하였다.  

 

이후 홍난파는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JODK) 양악부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경성학교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열정적인 활동을 펴던 중 1937년 둘째 딸 홍정임(洪丁姙. 1937~)을 낳았다. 이와 같은 기쁨도 잠시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어느 날 홍난파는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른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또는 동우회 사건이다.

 

이는 1913년 5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興士團)이 창립되면서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와 1923년 평양에 동우구락부를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펼쳤다. 이후 1925년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로 통합되어 1929년 11월 흥사단과 통합하면서 동우회로 바꾸었다. 이후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중일 전쟁을 일으키기 한 달 전인 6월 전쟁 체제의 조성을 위한 탄압 책으로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서울과 평안도 황해도지역에 이르기까지 181명의 동우회원을 체포하였다.

 

홍난파는 미국 유학 중에 흥사단(興士團)에 단번 266번으로 가입하여 단가를 작곡하였다는 이유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함께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되었으나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1938년 병으로 보석 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홍난파는 혹독한 고문으로 이어진 72일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미국에서의 교통사고 후유증 늑막염이 재발하여 매일 피를 쏟는 건강의 악화에 공개적으로 사상전향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후 홍난파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는 친일사회교화단체 ‘조선문예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개최한 ‘시국 가요발표회’에서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와 장성의 파수와 같은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이어 1938년 친일단체 대동민우회에 가입하였으며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에 위촉되어 성전을 독려하였다. 또한, 1941년 친일단체 조선음악협회 회원이 되어 경성방송국에서 친일 음악 방송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친일의 행적 속에서도 일본 경찰의 요주의 감시를 받았다. 마침내 혹독한 고문과 옥고에서 재발한 늑막염이 악화하여 1941년 적십자병원과 경성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살펴지는 내용은 홍난파가 피를 쏟는 옥고의 수형 중에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1937년은 부인 ‘이대형’(李大亨. 1913~2004)의 나이 24살이었으며 딸 ‘홍정임’(洪丁姙. 1937~)은 첫 돌을 채 넘기지 못한 나이였다.

 

‘애국과 매국’, ‘친일과 반일’, ‘공(功)과 과(過)’ 이와 같은 상반된 언어 속에 역사의 교훈은 물론 단호하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명단 속에 음악가 홍난파의 이름은 필자의 헤아림으로는 너무나 아프다. 그것은 피를 쏟는 옥고 속에서 24살의 부인과 첫 돌을 채 넘기지 못한 피붙이 딸을 둔 처지에 서보지 않고서 어찌 그 아픔을 알겠는가? 이는 단순한 감성이 아니라 인간 홍난파가 처했던 상황을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3년간의 친일 행적은 분명하다. 그러나 43세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나라의 아픔을 치열하게 매만진 역사적인 음악가에게 ‘친일 과오자’라는 명칭과 같은 역사적 성찰로 품어 줄 수는 없었는지 질곡의 역사를 품은 푸른 하늘에 묻고 싶다.

 

이는 그가 만든 민족의 동요 ‘고향의 봄’과 가곡 ‘봉선화’가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민족의 노래로 불리고 있는 사실과 ‘성불사의 밤’과 ‘옛 동산에 올라’ 그리고 ‘금강에 살어리랏다’와 ‘봄처녀’에 이르는 주옥같은 노래와 ‘고향 생각’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과 같은 헤아릴 수 없는 보석과 같은 동요들을 영원히 불러야 하는 국민의 입장도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음악가 홍난파의 민족적인 노래들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요의 장단을 품은 선율이 흐른다. 이처럼 운율적인 가사의 리듬이 반복되어 흐르는 그의 음악을 일러 홍난파의 동요는 "주옥과 같다"고 말하였던 민족 음악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의 평가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홍난파의 곡 애수에 김형준이 1925년 노랫말을 쓴 봉선화(鳳仙花)가 음반으로 발표된 것은 1932년이었다.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를 졸업한 성악가 최명숙(崔命淑)의 노래로 제작하였다. 당시 음반은 강릉 출신 시인으로 일찍 하와이에 이민을 떠난 함호영(1868~1954)의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사공의 노래’와 앞뒤로 수록되었다. 이어 1936년 빅터레코드에서 함남 원산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소프라노 박경희(朴景嬉)의 봉선화 음반이 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소프라노 박경희(朴景嬉)에 대하여 짚고 갈 역사에 담긴 이야기가 있다. 이는 평양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사의 찬미’를 부른 이후 연인과 함께 대한해협에 투신한 가수 윤심덕(尹心悳. 1897~1926)과 얽힌 이야기이다. 윤심덕은 1926년 레코드 녹음 일정으로 일본에 갔다. 그는 당시 닛토레코드사에서 녹음 계획에 없었던 곡을 추가하였다. 바로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작사한 ‘사의 찬미’(死―讃美)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오면서 연인이었던 유부남 극작가 김우진(金祐鎭. 1897~1926)과 대한해협에 투신하고 말았다. 당시 닛토레코드사에서는 이와 같은 윤심덕 가수의 슬픈 죽음을 앞세워 음반을 출시하여 세간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폭발적인 음반판매를 기록하였다.   

 

이후 닛토레코드사는 1934년 전일본신인음악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입상한 박경희를 스카우트하여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다시 리메이크한 ‘애상부(哀傷賦)’라는 음반을 제작하였다. 즉 제2의 윤심덕 효과를 노렸으나 실패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박경희의 감성적인 목소리로 빅터레코드사가 1936년 봉선화(鳳仙花)를 제작하였다.

 

이는 봉선화(鳳仙花)노래의 원곡 애수(哀愁)가 1920년 홍난파에 의하여 작곡된 이후 1925년 김형준이 노랫말을 써서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성악가 최명숙(崔命淑)의 노래로 최초의 음반이 제작된 역사이다, 이후 1936년 빅터레코드에서 소프라노 박경희(朴景嬉)의 봉선화가 발표되면서 방송에서 봉선화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살펴지는 내용은 당시 호소력이 있는 소프라노 박경희(朴景嬉)의 애잔한 목소리로 취입된 봉선화는 당시에 노래가 가지고 있었던 슬픈 감정을 중시한 시대적 감성을 살펴보는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보면 당시 봉선화 노래가 연이어 음반으로 발표되면서 짓밟힌 나라의 슬픔과 아름다운 산하에 대한 감성이 애잔하게 담긴 가곡 ‘봉선화’는 은밀하게 애창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봉선화가 민족의 노래로 등장한 것은 1941년 홍난파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42년 4월 일본의 음악대학 졸업생 대표들이 참가하는 ‘전일본신인음악회’(全日本新人音樂會)에서였다. 이는 1942년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 1919~1995)가 동경 히비야 공회당(日比谷公會堂)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메인 곡으로 독일가곡을 부른 이후 앙코르곡으로 봉선화를 불렀다.

 

당시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의 김천애의 봉선화를 들은 교포들과 유학생의 박수갈채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이어 무대 뒤로 찾아간 교포들은 김천애를 끌어안고 끝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음악회가 끝난 후 조선 유학생들과 교포들은 동경 YMCA회관으로 이동하여 눈물로 봉선화를 부르며 밤을 지새웠다는 이야기가 여러 기록에서 전해지고 있다.

 

감리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서양음악을 접하였던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 1919~1995)는 이북 강서 출생으로 평양 정의여고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武藏野音樂學校)를 졸업하였다.

 

▲ (좌로부터) 1942년 성악가 김천애가 봉선화를 불렀던 일본 동경 히비야 공회당(日比谷公會堂)/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사 최명숙(崔命淑) 봉선화 음반/ 김천애 봉선화 음반/     © 브레이크뉴스


 1942년 전일본신인음악회에서 봉선화를 불러 화제를 모았던 성악가 ‘김천애’의 소식은 국내에 빠르게 전해졌다. 이에 일본은 태평양 전시체제의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1942년 조직된 친일 음악 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에 김천애를 등용하여 그해 6월부터 부민관(府民館)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공연에 들어갔다. 이어 많은 인기를 얻었던 성악가 김천애는 오늘날 덕수궁 건너편 프라자호텔 인근에 1916년 제2대 조선 총독 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의 이름에서 유래된 경성공회당으로도 부른 하세가와 공회당에서 독창회를 시작으로 평양의 유명극장 ‘평양키네마’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창회가 이어졌다.

 

여기서 살펴야 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 친일 음악 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순회공연에서 성악가 김천애가 부른 노래는 1938년 일본의 국민가요로 만들어진 전설적인 음악가 ‘고세키 유지’(古關裕而. 1930~1980)의 곡 ‘애국의 꽃’(愛國の花)이 먼저 불린 이후 우리의 가곡 봉선화(鳳仙花)를 불렀다. ‘후쿠다 마사오’(福田正夫. 1893~1952)가 작사를 하고 ‘고세키 유지’(古關裕而. 1930~1980)가 작곡한 일본 국민가요 ‘애국의 꽃’은 후방을 지키는 여성의 마음을 벚꽃과 매화 그리고 동백꽃으로 비유한 노래이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일본의 꽃 이후에 가곡 봉선화가 불린 것은 바로 봉선화를 조선의 꽃으로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잠시 일본의 작곡가 ‘고세키 유지’(古關裕而. 1930~1980)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는 클래식에서 가요 영화음악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음악을 남긴 일본의 전설적인 음악가이다. 그는 특히 일본의 대표적인 수많은 야구 응원가를 만든 음악가이다. 오사카 타이거즈의 노래(大阪タイガースの歌 1936年)에서부터 가장 인기 있는 고교야구 고시엔(甲子園)의 응원가인 ‘영예의 관은 너에게 빛난다.’(栄冠は君に輝く)를 1948 작곡하였다. 1964년 도쿄 올림픽 개막식 선수 입장의 행진곡 ‘Olympic March’를 작곡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성악가 김천애는 공연과 독창회에서 가곡 봉선화를 부를 때마다 하얀 치마저고리 소복 차림으로 노래하였다, 당시 관객들은 봉선화를 함께 노래하며 가슴에 눈물을 쏟아내었다.    

 

광복 이후 성악가 김천애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전신인 경성음악학교 교수를 거쳐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와 학장으로 후진 양성과 국내 음악발전에 삶을 바치고 1972년 고별공연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995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역사의 아픔에 대하여 긴 글을 써오면서 객관적인 사실을 담으려 노력하였다. 사랑하는 자식과 부모 형제를 두고 죽음으로 산화한 애국지사의 정신과 시대 속박을 거부하지 못하고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의 정신이 같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이 한 때 나치당에 가입하였던 잘못이 있었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과 열정을 품어 안은 독일 국민의 승화된 의식 또한 소중한 것이다. 고난의 세월을 품어 안고 서러움 붉게 피어난 꽃으로 민족의 노래가 되어 가슴에 흐르고 손톱에 물들였던 가곡 봉선화의 노랫말로 장황한 글을 마무리한다,      


봉선화(鳳仙花) 작곡:홍난파 / 작사: 김형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 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다음 칼럼은 (235) ‘우주의 꿈을 키운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구겐하임미술관’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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