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대와 30대의 절반을 미국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고, 40대의 절반을 중국에서 대학교수와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마치 외국인처럼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가지게 되었다.
한민족의 후예로서 상당한 자긍심이 있지만, 여전히 전근대적인 유산이 지배하는 '병적인 사회'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다수의 한국인이 행복추구권 관점에서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케이스가 수없이 많지만, 우선 교육이 만들어내는 기형적인 한국인과 비극적인 한국사회를 보자.
한국사회에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대학입시와 학부모의 허리를 휘게 하는 사교육 열풍은 심각한 사회적 모순가운데 하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 과열을 해소하기 위해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오히려 사교육비만 엄청나게 올려놓았다.
한국의 입시 경쟁은 SKY로 통칭되는 일류대 입학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며, 그 싸움이야말로 승자와 패자가 영원히 갈리는 단판 승부로, 일류대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로 한 사람의 값어치와 신분이 평생에 걸쳐 결정되다시피 하는데, 어찌 이 전쟁에서 물러설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학생과 학부모를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동인은 바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굳어진 대학 서열화에 있다. 국내 200여 개 4년제 대학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일렬종대로 순위가 매겨져 있고, 출신대학의 서열이 곧 개인의 사회적 계급과 직결이 되므로 모두 서열이 높은 대학에 가려고 죽기살기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적성이나 희망보다 성적으로 순위를 매겨서 학교를 선택한다. 이것은 선택이라기보다 배정이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도 자신의 적성과 자신의 진로, 대학의 환경 등을 따지기보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대를 가야 해, 고려대나 연세대 이하는 안 갈거야' 라고 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서열화된 틀에 꿰맞춰버린다.
그나마 그런 선택도 할 수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류에 끼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마저 잃어버린다. 이처럼 자신의 소질과 꿈을 희생하게 만드는 한국식 교육은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부정적 시스템이다. 더 심각한 것은 서열 구조의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류 코스만 밟은 사람들은 과연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그 영광을 누리고 있을까?
![]() ▲ 김정기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
수재들에게도 등급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수재들만 모아 뽑아도 줄은 여전히 한 줄로 세워지고, 이 수재들 또한 단 한 명을 빼면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재능도 개성도 서로 다른 개인들을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모두 한 줄로 세워 등수를 매기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편의를 위한 방식인가? 더 말할 것도 없이 단 한 명의 일등을 위해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죽이기보다는 사회의 척도를 다원화하여 각자의 기준과 방식대로 진로를 정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앞날을 선택할 시점에 놓인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내 인생에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선택해야 하는 지를 깨닫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 기준이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우리 사회는 그런 깨달음을 방해한다. 그저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데만 몰두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마저 잃게 만들 뿐이다. 놀랍게도 사회 체계 자체가 무한한 능력을 가진 개인들이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 사회의 기준을 다원화하는 것이다. 다원화된 기준이 서 있는 시스템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가치를 개발하고 발전함으로써 100, 또는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제 한시바삐 우리가 지속해온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 명의 일등을 위해 나머지 99명을 모두 꼴등으로 만드는 데 골몰하는 우리 사회는 회생 가망 없는 비극을 향해 줄달음치게 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