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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상상의 아이러니 극장에서 버젓히 활보

수채화 가득한 <박종규의 글 세상> 아프리카의 귀신들

박종규 에세이스트 | 기사입력 2009/03/21 [11:12]
아프리카 오지에서 귀신을 떼거리로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북아프리카 수단의 수도 카르툼은 사막지대에 강을 따라 형성된 오아시스가 도시로 발달된 곳이어서 기후가 무덥고 습하다.

키가 장대 같은 검은 피부의 수단사람들이지만 순박하기로는 영락없이 우리네 시골 사람들 같다. 사람들은 흰 두루마기 같은 이슬람 복장과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다녀서 그들도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모처럼 시간 여유가 생겨 시내를 둘러보다가 마호가니’라는 영화 제목이 걸린 극장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썰렁한 매표소 앞에서 조그마한 동양 사람이 어슬렁거리자 키가 훌쩍 크고 바싹 마른 사내가 다가오더니 저녁에 오라면서 할라스, 할라스를 연발했고, 낮에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극장건물은 단층구조였는데 위에 있어야 할 지붕이 보이지 않았다. 

할라스는 그 나라 말로 없다는 뜻이었다. 지붕이 없으니 밝은 대낮에는 스크린의 화면이 보일 리가 없었다. 매표구 옆 시간표에는 저녁 일곱 시부터 영화를 상영한다고 되어 있었다. 고온 다습한 지역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는 더러 지붕이 없었다. 지붕이 없으니 환기는 잘 될 것이고, 영화를 저녁에만 상영하는 데에는 바로 환경적인 이유가 있었다.

‘마호가니(mahogany)’는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불러졌던 노래의 제목이다. 영화 제목에 끌려 저녁에 다시 극장을 찾았으나 영화는 이미 시작되어서 장내는 시끌벅적했다. 나는 어두움을 헤치고 좌석 사이 통로로 조심조심 들어갔다.

객석은 이미 만원이었고, 지붕이 뚫렸어도 흑인들 특유의 체취가 진동했다. 나는 맨 앞줄에 남아있는 빈 좌석을 겨우 찾아가 앉았다. ‘마호가니’는 당시 세계적인 여자 가수였던 다이애나 로즈(diana rose)가 단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 중 한 편으로 75년에 제작된 미국영화였다. 

스크린 하단에는 아랍어로 자막이 흐르고 있었는데, 영국의 영향을 받아 영어가 익숙한 수단 사람들은 영화에 나오는 사소한 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객석은 완전히 영화에 취한 듯해서 거기에 호응을 못하고 있는 나만 더욱 이방인이었다.

이윽고 영화에서 코믹한 장면이 나왔을 때 객석은 웃음소리로 떠나갈 듯 소란스러워졌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다지 우습다는 느낌까지는 못 가졌는데 흑인들의 폭소가 끊이지를 않고 있어서 자연스레 고개를 뒤로 돌려 보던 나는 시선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아찔한 시각체험을 했다.

오싹했다는 표현이 맞을 런지...... 웃음소리는 왁짜한데 객석을 채우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없었다. 스크린의 영상에서 반사되어 되쏘는 광선이 객석을 비춰주었지만 객석에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사람의 몸뚱이가 사라져버리고, 속이 텅 비어있는 흰 옷들과 혼자 움직이는 흰 터번들만 너울거렸다. 이따금 드러나는 흰 이빨들도 스크린의 반사를 받아 형광 빛으로 발색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

수단사람들의 검은 피부는 스크린에서 되쏘는 반사광을 그대로 흡수해서 어둠에 묶였고, 휘적휘적 옷가지들만 웃음소리 장단에 맞추어 하얗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지의 이국땅에서, 나는 귀신들로 가득 찬 극장 맨 앞좌석에 홀로 앉아 머리털이 쭈뼛해지는 괴기바람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곳에서 수단사람들은 투명인간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아이디어의 빛살을 보았다. 내가 정작 귀신들 소굴에 들어앉아 있다 하여도 상관없었다. 무릎을 탁 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바로 이거다!" 그 장면은 그대로 의류제품의 광고에도 채용될 수 있는 굿 아이디어였다. 모델에게 캐주얼 의상을 입혀 촬영한 후 사람의 몸을 지워버리면 누구든지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메시지가 되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었다. 훗날 이런 종류의 의류광고들이 많이 나왔지만 70년대 후반 당시에는 기발한 착상이었다.

상상력 안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귀신들까지도 포함해서. 아프리카에서 만났던 귀신들! 그들은 빛과 어둠이 만들어 낸 착시에 불과했지만 아직도 내게는 기억 속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살아있는 귀신들이었다. 
박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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