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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대한 컴플렉스로 인해 문치라는 허울로 변질시킨 송나라의 유학, 성리학

정길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06/23 [02:39]

▲필자/ 정길선 박사     ©브레이크뉴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후주를 전성기로 이끌었던 세종의 유언과 부탁을 받고 후주의 어린 황제 말제를 보호하기로 했지만 끝내 세종과의 약속을 버리고 어린 황제 말제의 제위를 찬탈한다. 후주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킨 조광윤은 정권 전복으로 인한 대표적인 현상으로 이것은 유교 국가로써 성공한 역성혁명의 첫 사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같은 역성혁명으로 고려 유학자들이 중심으로 나라를 뒤엎어 이성계를 세우고 조선을 열었다.

 

조광윤은 5대 10국의 혼란기를 직접 겪었고 역대 중원의 역사로 볼 때 수많은 쿠데타로 국가가 전복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사례가 나올것을 우려하여 황제에 대한 절대 권력을 강조하고 유학을 장려하여 무(武)보다 문치(文治)을 내세웠으며 후주 말제의 제위를 찬탈한 컴플렉스로 인해 황권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는 군권을 가지고 있는 절도사들의 군권을 해임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문(文)과 덕(德), 지(智)로 통치하겠다는 뜻을 관철시켰다.

 

그로 인해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들 중 가장 문화가 발달했지만 역으로 가장 군대가 허약한 나라가 되었다. 국경을 지키는 군사도 얼마 되지 않은데다 지속적으로 거란의 요(遼)나라와 탕구트족의 서하(西夏)의 침공을 받았고 이들을 달래는 외교로 일관하여 경제적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진족의 금(金)나라와 연합하여 요(遼)나라를 타도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중개하는 외교력도 한계를 보였으며 결국 금나라의 침입에 황제인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겪었다.

 

송 태조 조광윤의 군에 대한 두려움과 컴플렉스, 본인이 했던 부도덕한 찬탈 행위 등이 문무를 고루 발달시켜야 하는 국가를 군사력이 최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문치적인 국가로만 득세시키며 이에 대한 정치적 긴장감이 없어지니까 관료 부패를 오히려 더 촉진시키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당시 송나라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강조되던 단어는 의(義)였다. 

 

부도덕한 불의로 전 정권의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오히려 사회 정의를 프로파간다로 내세우고 수호지 같은 소설이나 판관 포청천 같은 극화의 배경을 만들며 의(義)를 전면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또한 이런 정책적 부작용으로 나타난 관료 부패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두 작품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송나라는 중원 역대 통일 국가 중 가장 의(義)롭지 못한 국가였지 않을까 싶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Confucianism and Neo-Confucianism in the Song Dynasty, which was transformed into a façade of civil affairs due to a complex about the military.

 

-Jeong Gil-seon, columnist

 

Jo Gwang-yun, King Taejo of the Song Dynasty, received the will and favor of Sejong, who led the Later Zhou to its heyday, and decided to protect the young emperor of the Later Zhou, Emperor Mal, but eventually abandoned his promise to King Sejong and usurped the throne of the young emperor, Emperor Mal. Jo Gwang-yun, who overthrew the Later Zhou regime in a coup, is a representative phenomenon caused by regime overthrow. This can be seen as the first case of a successful reversal in a Confucian country. And through this same revolution, Goryeo Confucian scholars overturned the country, established Yi Seong-gye, and opened Joseon.

 

Jo Gwang-yoon experienced firsthand the period of chaos between the five major and ten countries, and was well aware of the fact that many countries were overthrown by coups considering the history of the Central Plains. Concerned that a case like this would arise, he emphasized the absolute power of the emperor, encouraged Confucianism, put civil rule before martial arts, and eliminated elements that threatened the imperial power due to the complex of usurping the throne of the late Emperor of the Later Zhou Dynasty. It comes down to the following. He dismissed the military authority of the thieves who held military power, disbanded the army, and implemented his will to rule with knowledge, virtue, and intelligence.

 

As a result, the Song Dynasty became the country with the most developed culture among all Chinese dynasties, but with the weakest military. Not only was there a small number of soldiers guarding the border, but it was constantly invaded by the Khitan kingdom of Liao and the Tangut tribe's Western Xia, and its diplomatic efforts to appease them led to economic ruin of the country's finances. And as the Jurchen people united with the Jin dynasty and overthrew the Liao dynasty, their diplomatic power to mediate between the two countries showed its limits, and in the end, the emperors Huizong and Xinzong suffered the humiliation of being taken prisoner by the Jin dynasty's invasion.

 

Song Taejo Jo Gwang-yun's fear and complex about the military and his own immoral acts of usurpation made a country that was supposed to develop civil and martial arts equally, but its military power was the worst. As the political tension disappears, the result is that it only promotes bureaucratic corruption. At this time, the word that appeared and was most emphasized in the Song Dynasty was righteousness.

 

In order to dethrone the young emperor of the previous regime due to immoral injustice and dilute it, he put forward social justice as propaganda and created the background for novels such as Shu Ho-ji and dramatizations such as Judge Po Qing-tian, and fully highlighted righteousness. Additionally, these two works realistically show the bureaucratic corruption that appears as a side effect of these policies. Paradoxically, the Song Dynasty may have been the least righteous state among the unified states in the history of the Central Plains. lukybaby7@gmail.com

 

*Writer/ Jeong Gil-seon.

 

 

Novatopos member, historian, archaeological 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Archeology and Anthropology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

 

정길선 칼럼니스트
lukybaby7@gmail.com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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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진한 2024/06/23 [16:14] 수정 | 삭제
  • 전반적인 대학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필자는 성균관대 출신입니다. 지켜야 될 자격과 전통이 있다면, 국가주권, 헌법, 국제법, 한국사, 세계사등에 의거하여, 최고의 가치로 알고 지켜가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 성균관대는, 해방후, 미군정이 공자묘경학원을 성균관으로 개칭(성균관 복구에 해당)하는 법률을 발효, 전국 유림대회 결의(고문:이승만,김구, 위원장: 김창숙)에 따라, 성균관장으로 선출된 김창숙 선생이,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환원(복구)을 실행하는 성균관대를 등록(성균관은 제사기구로 이원화)하여,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승계대학으로, 미군정때부터의 국사 성균관 교육으로, 해마다, 학교에서 성균관을 교육시키고 있습니다.@광복 당시 국내에 있던 일본의 모든 공유 및 사유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적산(敵産)’으로 규정되어 미군정청의 ‘귀속재산’으로 접수되었다...*출처:귀속재산불하[ 歸屬財産拂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필자의견:해방후 미군정당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국립대로 하였는데, 이는 미군정의 敵인 일본잔재 경성제대를 적산재산 국유화 하는 패전국 잔재처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대뒤에 붙여넣은 더 자격없는 신생 대학들이, 국립대 서울대를 가장 앞에 두고, 주권.자격.학벌없이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대항해 온것은, 인정해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일제 잔재 공립 중.고교들이, 구한말에 세워진 한국의 민족학교들보다 좋다고 주장하는것도 적국 잔재 일본 왜구학교로서는, 아무 법적 타당성이 없고,명분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오도하고, 일본 불교에서 파생된 신도(불교 후발 일본 국지적 신앙으로, 일본 국교), 불교, 기독교만 종교로 하여, 강제 포교한 것도, 미군정당시부터 무효가 된 것입니다. 한가지 주의할것은, 서유럽에서 왕족.귀족의 역사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기반에서 형성된 서강대가 속한, 가톨릭 예수회는, 해방후 미군정을 거친 한참후에 들어와 한국에 그 교당이나 신자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중을 위한다는, 가톨릭 외방전교회가 들어와 활동했는데, 수천년 왕조국가 전통의 한국에서는 지배층의 성균관대와 성균관.양반들이 인정할 수 없던 계파였습니다.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 승계 성균관대는 국내외에서 6백년 넘는 역사를 행정법.국제관습법으로 인정받고 있음.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대. 宮(泮宮,學宮, 太學)의 별칭가진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가진 성균관대임. Royal성균관대. 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양반 성대 다음 가톨릭계 귀족대학으로,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패전국 일본 잔재이자, 불교 Monkey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 이 뒤로 서울대를 극복하지 못해온 전국 각지역 대학들. 해방당시 미군정부터, 상위법은 승전국 국가원수들이 모여 발표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이 국제법으로 상위법 역할을 하고, 미군정령은 하위법이라, 상위법 우선의 원칙으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조선.대한제국에는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으로 성균관 하나밖에 없던 나라였음. @ 한편, 미군정이 실행한 적산재산 처리는 합법적인 조치입니다. 불법.강제의 한일병합이나 을사조약을 무효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견해와 일치하는 국제법적 시각으로, 적국 일본의 한국내 재산들은, 그 소유권을 인정해 줄 수 없는, 불법.강제의 대한제국 강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미군정의 법리적 해석에 따른 결과입니다. 적산재산의 불하에 대해, 적국 일본이나, 한국영토에 주권.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출신들이, 미군정의 법적 조치에 대해, 이의제기하는 상황도 나타나지만, 인정할 수 없다고, 이번기회에 필자는 밝혀둡니다.
  • 윤진한 2024/06/23 [16:13] 수정 | 삭제
  • 궁예가 반란자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궁예가 양길을 이기고, 궁예의 태봉을 무너뜨려서, 고려가 건국되었습니다. 이런 인류역사는 수없이 많습니다. @@한편,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하고,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 @불교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며 수행하는 종교이다.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실존에 초점을 맞추어 사람마다 다른 사회적 조건과 차이에 따라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함에 따라 경전의 종류도 많다...아트만(atman: 眞我)이나 브라만(梵神)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러므로 부처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緣起)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인간생활의 실제문제와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곧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생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출처:불교 [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브라만에 대항해 후발 신앙을 만든 불교의 부처가 창조주 범천보다 높고 창조주를 가르친다는 Monkey발상 상기시킴. 일제 강점기 불교 Monkey일본이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 유교를 인정않았음. 그리고 창조주에 대드는 성씨없는 점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보다 높다고 목사 고문구타한 사실. 자기들이 들여온 기독교의 신부억압과, 목사 고문.구타한 사실. 다시 상기시킴. 다음 사항 참조바람. - 다 음 - 1.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수천년 동아시아 세계종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중, 불법 강점기 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하고, 일본신도(불교 후발 국지적 일본 신앙으로, 일본의 국교).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2. 부처 Monkey가 창조주 범천보다 높다는 불교. 성씨없는 점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보다 높다고 목사 고문구타한 사실. 자기들이 들여온 기독교의 신부억압과, 목사 고문.구타한 사실.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하나님이 높은가, 천황이 높은가" 질문을 받고 고난을 당했던 개신교의 사례등. 가톨릭도 이런 비슷한 고난 있었음 1). 한국 기독교사, 박봉진 목사 편. 한국에서의 교파합동에 따른 성결교대표이던 이명직목사는 “일제가 성경에서 구약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다”며 강력히 맞섰고 결국 성결교단은 당시 기관잡지인 `활천'이 폐간되는 동시에 43년 5월,전국 성결교회 일제검속령이 내렸다.바로 이 때 박봉진목사도 철원경찰서에 구속,수감된다.유치장으로 들어가기 전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게하고 좁쌀과 콩밥을 주는 색다른 환경 속에서 박목사는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그러나 박목사에게는 더 큰 고통과 형극이 기다리고 있었다.형사앞에 불려간 박목사는 신사참배를 거절한 이유를 하나님 이외에 참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하나님이 천황보다 더 높다고 여기느냐고 묻는 질문에도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다.강직한 신앙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목사님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장작패는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기절하면 다시 물을 끼얹어 깨우고 갖가지 방법으로 3개월간을 주야로 고문했지요.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른 볏집처럼 말랐지만 항복을 얻어내진 못했습니다.일본천황에 충성하겠다고 자술서 한장만 쓰면 풀려나올 수 있는 것을 아버님은 끝까지 신앙지조를 지키신 것이지요 2). 한국 장로신문. 제 1363호(2013년 4월 20일).164. 일제 치하 기독교인은 반역자.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일제 헌법이 천황을 신성불가침이라 규정한 점이다. 신성하고 절대로 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어디에선가 천황폐하라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자동차도 사람도 다 그 자리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반듯하게 차렷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일제 말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일본 경찰이나 형사에게서 천황이 높은가, 여호와 하나님이 높은가라는 황당한 검문을 받기 일쑤였다. 또 그 헌법에는 일본인의 모든 권리가 천황에게서만 나온다는 그런 조항이 서두에 나온다. 국민들은 다만 천황의 신하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절대자 이상의 권한과 존엄을 누리는 것이 일본 천황이었다. 북한에서 김정은은 국가 최고의 존엄이란 말을 쓴다. 그런 천황에게는 최경례 곧 최고의 경례를 표하여야 하는데,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존재도 섬기거나 예배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신앙 첫째의 준수사항이다.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일제시대 기독교는 그 자체가 헌법상 존재할 수 없거나 천황제 아래 굴종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천황을 예배하지 않거나 신사참배에 가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반역일 수밖에 없었다.**민 경 배 목사 3). 가톨릭신문 기사. 발행일 : 1984-07-22 [제1415호, 6면]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생활 50년의 회고] 76. 첫 한국인 교구장 탄생의 뒷얘기들 主敎임명놓고 日本에 密派돼,교황사절에 한국인임명호소,숨막히는 면담 끝에 승락 얻어-기쁨의 눈물 넘쳐,교구장취임장면 全國서 뉴스영화로 上映. ​일본 군국주의가 한반도 문화를 페결핵균처럼 파먹어 들어가던 때、우리 가톨릭도 탄압을 받았다. 천황이 더 높은가 그리스도가 더 높은가 하여 각 성당 제대 위에 가미다나(神棚)를 모셔라 했고 미사 시작전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일본국가제창을 강요했다. 성당의 종을 때어 헌납하라、신부출장땐 배정기(配程記)를 제출하고 허락을 받아라、 고해성사때 신자들이 신부들께 스파이질을 하니 신부와 신자사이에 의자를 놓고 그내용을 들어야겠다고도 했다. 마침내는「기독교 종교단체법안」까지 만들었고、1940~41년에는 일본내 외국인교구장을 교황사절을 앞장세워 일본인 교구장으로 갈아치웠다..... 4). 평화신문 2000.08.13 발행. 가톨릭뉴스. 종소리를 듣고 성당으로 몰려온 신자들은 "이제는 하느님이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는 일본헌병의 질문 신사참배 강요 황군(皇軍)의 무운장구를 비는 미사 고해소에 형사가 입석하 는 일 그리고 신부가 공소를 방문할 때마다 순사에게 신고해야 하는 일이 없어지게 됐다" 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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