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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영웅 다치카와 마사키 '일본놈 형님!"

한국법정, 민청학련 사건연루 36년만에 日기자 무죄판결

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10/01/30 [21:12]
한국은 일본에 의해 36년에 걸친 식민지 생활을 경험했다.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 마사키씨(이하 존칭 생략)가  박정희 정권 때 내란선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36년 만에 무죄가 된 사건이 있다. 이를 비교하기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지만, 묘한 환영이 그려지는 이유는 뭘까?
 
“한국 민주화 과정의 희생양”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사건 발표). 당시 박정희 정부는 “1천 여명을 영장 없이 체포-구금하고, 7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수 십명을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장기 징역형에 처한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최대의 학생운동 탄압 사건”이다. 당시 27세의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였던 다치카와 마사키(65세)라는 일본인이 이 사건의 핵심인물 중의 한명으로 발표됐다. 그는 10개월간 투옥됐다가 형집행정지로 출옥, 일본으로 추방됐다. 한국 법정은 이 사건이 일어난 후 36년만인 지난 1월27일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다치카와 마사키는 필자와 지난 25년간 교유해온 사이이다. 그는 일본인 기자였고, 필자는 한국인 기자였다. 그간 그와 긴 연륜, 가까이 지냈던 한국인 기자로서 한국 정치가 독재와 비민주의에 매몰됐던, 어두운 시절의 정치가 준 아픔이 어떠한가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한국 민주화 과정의 희생양”이었던, 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다치카와 마사키의 변호인단은 재심을 청구하면서 “피고인 등에게 가해진 고문,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수사와 재판절차 등은 문명국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처럼 권력이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우리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잘못이 되풀이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과거의 잘못된 유산을 청산하지 못하는 이상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었다.

재판부는 이윽고 다치카와 마사키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6년이라는, 참으로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다치카와 마사키에게 무죄가 내려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민청학련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민청학련 사건의 개요


▲눈물을 보인 다치카와 마사키. 그 눈물의 의미는  뭘까?    ©브레이크뉴스
다치카와 마사키는 지난 2008년 12월, 자신의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담당변호사 이돈명, 이석태, 김형태, 김진영, 신동미)를 했다. 재심청구서는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사건의 시대적 배경 및 긴급조치의 내용“을 요약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후 3주가 지난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한 불순 반정부 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했다. 이들이 획책한 이른바 4단계 혁명은 ①유신체제를 비민주 독재로 단정, 반정부세력을 규합하며 ②4월 3일을 기해 전국 주요 대학이 일제히 봉기하여 중앙청, 청와대 등을 점거, 파괴하고, ③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한 후 ④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민청학련의 배후 주동인물로는 ①전 인혁당 당수 도예종과 여정남 등의 불순세력 ②재일조총련 비밀조직의 조원인 곽동의와 곽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태도천정수(다치가와 마사키 )와 조천가선(하야가와 요시하루) 등 일본인 2명 ③기독학생총연맹 간부진 ④이철, 유인태 등 주동급 학생운동자와 유근일 등이다.

▲1974. 5. 27.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사건은 이철-유인태 등 평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불순학생이 핵심이 되어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봉기를 획책하던 중 여정남을 매개고리로 하여 서도원-도예종 등을 중심으로 한 ‘인민혁명당’계 지하공산세력의 지도를 받아 재일 조총련 계열-용공 불순세력 등과 결탁하여 연합전선을 형성, 유혈 폭력혁명으로 정부를 전복, 공산정권을 수립코자 한 국가변란기도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사건 관련자들에게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및 내란예비음모 선동 혐의로 기소하였던 바, 같은 해 7. 13. 비상보통군법회의는 사건 관련자들 중 이철-유인태 등 7명에 대하여 사형(일부는 후에 무기로 감형확인), 12명에 대하여 징역 20년, 6명에 대하여 징역 15년 등을 선고하여 위 판결은 확정되었다.

▲위와 같은 발표를 전후하여 인혁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된 22명(여정남 포함)이 체포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체포하여 1개월 이상 가혹한 고문수사를 한 다음 1974년 5월 27일 이들을 긴급조치위반, 반공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하였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피고인들은 1974년 7월 11일 1심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8명은 사형, 8명은 무기징역, 6명은 징역 20명을 선고받았으며,  2심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4명이 징역 15년으로 감경되었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불과 20시간만인 1975년 4월 9일 아침 사형판결이 확정된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

“각본대로 조작된 것”


▲ 다치카와 마사키는 전남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는 민간인 대사라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지독한 한국사랑(?)이다.  ©브레이크뉴스
재심청구서에는 “수사과정에서 나타난 사건 조작의 의혹”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관련자들은 “수사기관에 의하여 각본대로 조작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를 다시보기 위해 인용해본다.
 
“▲다치가와 마사키=저는 당시 일본의 주간지 기자로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것이고, 취재과정에서 시인 김지하, 이철, 유인태 씨 등 지도자와 접촉, 취재결과를 기사화해왔다. 군사정권이 날조한 것과 같이 한국에서 적색혁명을 선동하거나, 공산혁명을 배후에서 지원한 적은 전혀 없다.▲이철=본인에게 씌워진 죄목은 인혁당재건위, 일본인 기자를 통한 조총련, 국내의 반정부 인물 등의 배후세력과 짜고 현 정부를 전복하려고 도모한 불순 반정부 세력의 수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혁당이라는 이름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으며, 인혁당 관련자 여덟 분 중에서 여정남 선생을 제외하고 일곱 분에 대해서는 이름과 얼굴조차도 모르는 분들이었다.  여정남 선생과의 관계라는 것도 단순히 학생운동 세력의 지방 연락망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여정남 선생이 양쪽 사람들을 다 알았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인혁당과 우리가 연결된 것처럼 덮어씌운 것이다. ▲정윤광=민청학련 투쟁은 학생들의 자주적인 유신철폐운동이었으며, 인혁당재건위와 조총련을 통해서 북괴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은 완전한 허구이다.  조총련의 지령을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는 재일교포 다치가와와 하야까와는 일본 신문 잡지사의 단순한 기자에 지나지 않고 민청학련 주동자 이철, 유인태를 한두 차례 만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총련의 지령을 전달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나상기=본인은 1973년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회장으로서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을 이끌어 온 것은 사실이나 민청학련과 관련하여 이철 등과 사전에 직접 논의하고 준비한 바는 없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세력을 포함한 종교인, 교수 등 민주인권운동세력을 민청학련과 연계시켜 본질을 왜곡하고, 인혁당을 조작하여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려 한 것이다. ▲류근일=중앙정보부에 연행된 후 본인은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 주동학생들의 ‘배후조종자’라는 혐의로 취조를 받았다. 구체적인 혐의내용인즉슨, 본인이 서울대생 라병식에게 ‘빨갱이’로 몰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던 충고가 ‘민족지도부’라는 반역기구를 설치하라고 요구한 것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송운학=이철 선배 등과 함께 문리대 학생 50여명을 조직하기로 합의했다거나 흥사단 아카데미를 재정비하기로 약속했다는 등의 기록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1973년 12월 중순경부터 1974년 1월 중순경까지 창현교회에서 개회되는 세미나에 한번 정도 참여한 적이 있을 뿐, 지속적으로 참여한 적도 없다. 이처럼 세부내용에 있어서도 날조된 허위사실이 강제로 진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처음으로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정부가 발표한 긴급조치 제4호를 통해서였다. ▲강창일=그들은 민청학련과 관계는 없으나 제2선 조직으로 전학련(전국학생연맹)을 조직하여 민청학련이 실패하였을 때 정부내란을 주도하려 했다고 강요했다. 이는 완전한 날조였다. ▲김재규= 이 사건은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던 학생운동 세력을 인혁당 관련자의 사주를 받는 조직으로, 또 인혁당 관련자들을 북한과 내통하여 움직이는 조직으로 조작한 것이다."

7500원으로 국가를 전복?

다치카와에게 1974년 4월 5일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그는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경찰에 의해 붙들려 갔다. 북한에서 무기를 가져다주고 공작금을 주어 남한 정부를 전복하려했고 그 세력을 도왔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다치카와 마사키가 그 당시 한 일은 유인태에게 7500원(미화 20달러 정도)을 건넨 것. 그 돈의 값어치는 쌀 한가마 정도의 값이라고 한다. 이 적은 돈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혁명 자금’으로 바뀌었다. 쌀 한가마 값으로 어떻게 나라를 뒤집는다는 말인가? 지나가던 소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 소도 웃을 일이다. 하여튼 그는 내란선동과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투옥됐다. 재판에서 징역 20년 선고를 받았고, 10개월간 옥살이 한 뒤 일본으로 추방됐다.

필자는 다치카와 마사키를 1985년 미국 뉴욕에서 첫 대면했다. 나는 주간신문 세계신보의 기자로 일했다. 당시 뉴욕에서 한글신문으로 발행된 세계신보는 경향신문 기자 출신인 이형래씨가 발행인으로 있었고, 한국의 민주화에 필요한 논조의 신문이었다. 말하자면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군사정권인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비판하는 반정부 논조가 강했다. 교포 사회에서 벌어지는 반정부 시위나 비판들을 자유롭게 보도하고 있었다. 그 한 중간에 기자로서의 필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하를 통해 미국으로 유입되어온 갖가지 민주화를 위한 뉴스들, 소위 반정부 뉴스들을 보도하는 기자로서 해외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는 '팩스통신'이 위력을 발휘했던 시절이었다. 뉴욕에서 보도된 기사들은 팩스를 통해 한국에 여과없이 전달, 민주화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다치카와 마사키는 '슈깐 겐다이'와 '닛깐 겐다이'의 뉴욕 특파원으로서 뉴욕에서 취재활동을 벌였다. 그래서 맨해튼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추방된 뒤 10여년이 지난 1987년쯤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으므로 그 이전에는 뉴욕에서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던 셈이다. 그러나 내란선동 혐의로 한국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한국에서 추방됐으니 일부 한국인과 교민은 그를 백안시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던 필자로서는 그와 친해지는 게 두려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당시 필자는 세계신보에 '비록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공작사)'라는 시리즈물을 연재하고 있었다. 후일 책으로 출간(전3권)했다. 한국 민주화를 위해 투옥생활을 하면서까지 수난 당했던 그를 볼 때마다 오히려 미안할 따름이었다. 뉴욕 맨해튼에서 만난 나와 다치카와 마시키는 자주 어울렸다. 당시 일본의 경제사정은 요즈음과 달리 우리보다 훨씬 앞섰으므로 뉴욕특파원인 다치카와 마사키의 경제력이 필자보다 앞설 수밖에 없었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면 으레 다치카와 마사키가 계산을 하곤 했다.

김대중 선생 도운 일본 기자
 
그가 미국에 머무는 가운데도 그의 한국 사랑은 여전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일을 힘차게 거들고 있었다. 미국에 망명했던 김대중 선생은 워싱턴 근교에서 777일간 머물다가  1985년 2월 8일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당시 김 선생의 망명생활은 경제적으로 곤궁했다. 다치카와 마사키는 그 당시 수차례 김대중 선생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기사로서 그를 돕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소속된  회사로부터 인터뷰료를 받아 전달, 생활에 보탬을 주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인사들 가운데 미국을 방문하는 정치인-시민단체 인사들의 취재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한국 민주화를 촉구하는 기자이기도 했으나 한국 민주화를 위한 쉬지 않은 후원자였다.

그는 민주화 투사였던 김대중 선생을 만났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 했다.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선생은 아슬아슬하게 낙선 했다. 그 후 미국에 머물던 김 선생은 1973년에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선생을 호텔에서 첫 대면했다. 독일특파원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호텔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오른 손에 힘을 주어 흔들면서 '한국은 민주화 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열정이 묻어나왔다. 일본 정치인들과 비교하면, 일본정치인에겐 김대중 선생과 같은 그런 열정이 부족했다.”

다치카와 마사키와 김대중 선생의 인연은 계속됐다. 1985년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김대중 선생의 굳건한 일본 인맥이 됐다. 다치카와 마사키는 동경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 닛깐 겐다이의 외신부장으로 오래 재직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그는 이희호 여사를 최초로 단독 인터뷰 했다. 대통령 취임식 때 초청도 받았고, 재임시절에 청와대로 초청 받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 영빈관에서 열린 조찬행사에 초청도 받았다. 하토야마 유키오(현재 수상)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만큼 지한-친한 인사로 대우를 받은 것이다. 다치카와 마사키는 필자에게 말했다. “일본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취미가 '다나까'라고 말한 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대한민국'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김대중'이라고 답할 것이다.”라고.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필자가 그간 옆에서 주욱 지켜본 그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 뉴욕에 머물 때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지상사 요원을 뉴욕에 많이 파견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돈이 많은 일본인 지상사 요원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주로 한국인들과 어울렸다. 김경재 전 의원, 박지원 현 의원, 유종근 박사(전 전북지사), 임병규 변호사, 언론인 강준식(전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과 어울렸다. 필자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한번은 필자와 함께 밤 12시가 넘은 심야 시간에 맨해튼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술집에 들어갔다. 라면도 끓여먹는 조촐한 자리였다. 이때 술에 취한 필자는 “한국에는 미군들이 가진 핵무기가 많을 것이다. 반일감정이 많은 한국인들 가운데서 그 핵무기를 훔쳐다가 동경에 떨어뜨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일본인들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러나 한국인인 나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다치카와 마사키 같은 일본인이 있는 한 지구가 무너져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치카와 마사키를 낳아준 일본을 사랑한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인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날 내가 떠벌인 '동경폭파 핵무기론'은 무위로 돌아갔다. 한국인인 나 보다 한국의 비민주화를 더 염려했던 다치카와 마사키 같은 일본인 기자가 있는 한 동경에 한국인들이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을 것임을 재확인 했다.

필자는 1989년에 미국에서 귀국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그 때만해도 전두환 정권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언론자유가 주어졌다. 1년간 세계일보에서 일했고, 이어 토요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 대행까지 맡았었다. 그런 위치로 1992년 대선을 치렀다. 토요신문은 주간신문이었다. 뉴욕에서 길러진 언론자유에 대한 육화(肉化)를 토대로 자유언론의 기치를 맘껏 내세웠다.
 
기자로서 '영웅'이었다
 

▲다치카와 마사키.  ©브레이크뉴스
한국에 귀국한 이후 다시금 다치카와 마사키와의 조우가 시작됐다. 김대중 선생이 대선 후보로 출마한 1992년을 전후한 시기에 다치카와의 한국 입국이 빈번해졌다.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양주 한 병과 양 담배 한 보루를 들고 나에게 나타났다. 그가 알고 있는 한국의 지인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런데도 공항에서 면세로 살 수 있는 양주와 양담배는 늘 내 차지였다. 왜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푸는지 알 수 없어 일본을 잘 아는 분에게 “왜 그럴까요?”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분은 “일본 사람들은 한번 사람을 사귀면 오래 간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정말 나는 세상에 태어나 다치카와 마사키에게 술과 좋은 음식을 셀 수 없이 얻어먹었다. 일본에 초청되어 동경에 간적도 있다. 그의 덕분으로 동경 타워도 보았다. 후지산도 올라가 봤다. 일본의 시골도 둘러볼 수 있었다. 고급 온천장에서 목욕도 해봤다. 동경에서 닛깐 겐다이 편집국장도, '소문의 진상'을 발행했던 오까도메 발행인도 만나볼 수 있었다.

지난 1월 27일 다치카와 마사키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무죄를 받았다는 소식을 이성호 전 평화관광 회장(김대중 전 대통령 막내 처남)으로부터 처음 전해 들었다. 그는 긴 시간을 거쳐, 36년 만에 무죄인이 됐다. 그간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화 인사들의 성공을 빌었던 다치카와의 한국사랑에 고개가 숙여졌다. 긴 시간을 잘 참아낸 그의 스토리를 잘 안 나로서는 감동이 찌르르 흘렀다. 그는 기자로서 '영웅'이었다. 그는 그런 상황이 다시 와도,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실토했다. 현장을 뛰어온 한국인 기자로서, 일본인 기자인 그에게서 배우는 바가 많다.

1월 28일 광화문 세종문화 회관 뒤쪽에 있는 전주식당, 조촐한 축하연이 열렸다. 하객수는 겨우 8명. 이성호 회장이 만든 자리였다. 그에게 무죄소감을 물었다. “이 사건은 당연히 날조였다. 36년 만에 한국 정부가 잘못했음을 인정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든 한국이 밉지 않나?”라고 질문했다. 그는 감정을 죽이고 차근차근 말했다. “상관없다. 한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신념을 존경한다. 앞으로 한일 교류차원에서라도 열심히 일하겠다. 한국 정부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데 36년이나 걸렸다. 그래도 끝내 자기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kcia)가 이런 일을 했다. 당시 일본에선 kcia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 이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무서운 기관이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당시 나는 이철-유인태씨 등과 친했을 뿐이다. 그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던 젊은이들이었다. 숨어서 라면을 먹으며 투쟁했다. 그래서 불고기라도 사 먹으라며 돈 7500원을 유인태씨에게 건넸었다. 미화로 20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이 돈이 공작금으로 둔갑한 것이다. 구치소에서 기소사실을 보고 웃었다. 기소장에 액수는 쓰지 않고 이철 등에게 공작금을 주었다라고 무리하게 만들어서 날조한 것이다. 난 그때도 당연하게 무죄라고 생각했다. 나는 1975년에 형집행정지로 출옥된 이후 일본으로 추방됐다. 그리고 1986년까지 한국에 입국할 수 없었다. 
 
야당의 지도자였던 김대중 선생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5년 2월8일 귀국했다. 그때 김대중 선생과 함께 동행, 입국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김포공항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일본의 친구나 친척들은 나에게 앞으로 한국에는 더 가지마라고 했다. 한국 기업인 롯데 등의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한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군사정권이 저지른 일이고, 한국 국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했을 뿐이다.”
 
하나 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무죄 이후 일본에서의 반응을 물었다. 많은 축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한국법원이 나에 대해 무죄 판결한 사실을 사회면 톱기사로 다뤘다. '군사독재정권 타도 음모했던 일본기자 36년 만에 무죄'라는 타이틀이었다. 닛깐 겐다이 시모기리 오사무 사장도 전화로 축하해줬고, 보상금이 나오면 한잔 사라(?)고 말했다. 나 때문에 평생 고생한 누나는 보상금 절반은 내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많은 친구들이 축하 전화를 해주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투옥됐던 “이철-유인태 전 의원들을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이철 전 의원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신념을 너무 존경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어 군법회의 법정에서 함께 재판을 받았다. 그 장소에서 이철씨를 만나게 됐다. 이철씨는 나를 보고 '고생합니다, 웃으세요. 모두 정치적인 쇼입니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겠지만,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치카와 마사키씨는 아마 5년 정도는 고생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 웃으십시오'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 당시 이철씨의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먹었다. 그때 이철씨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하나 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그의 자세를 보고 감동을 먹은 것이다.”
 
동아일보는 지난 1월 29일자에서 다치카와 마사키와 관련한 재판 결과를 톱기사로 내보냈다. 36년 전 사건과   관련 톱 기사를 쓴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이 신문은 한국이 그에게 한 나쁜 짓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양심이 살아있는 신문이었다. 동아일보는 “36년 전 누명 벗게 해준 한국 민주화에 큰 감격”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동아일보는 다치카와 마사키가 말한 “1974년으로 돌아가도 취재하러 다시 올 것”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한겨레신문은 1월 28일자의 박스 기사에서 “‘간첩 혐의’ 일본기자 36년 만에 무죄”라는 타이틀로 법원의 무죄판결 사실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다치가와 마사키 재심서 누명 벗어…'그래도 한국은 좋은 나라' 라는 부제를 달았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그의 인생은 긴 기간 풍비박산이 됐다. 술로 외로움을 달래는 시간이 많았다. 아들이 외국 감방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그의 첫 부인(한국인)은 정신질환을 앓아 그와 이혼 했다. 그런 사이 하나뿐인 아들마저 어린 시절에 수영장에 빠져 피붙이를 잃었다.
 
“민간 대사라도 맡고 싶다”
 
▲  다치카와 마시키와 문일석 본지 발행인. ©브레이크뉴스
광화문 세종문화 회관 골목길을 함께 걷다가 “한국을 위해 어떤 일을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라고 질문했다.

“나는 지난 2008년부터 일본어판 '전라남도 관광가이드 책'을 만들기 위해 줄곧 취재를 해왔다. 올해까지 이 책을 꼭 만들고 싶다. 2012년에 여수에서 해양엑스포가 열린다. 그때 일본인들이 전라남도 지방을 많이 방문할 것이다. 내가 존경했던 분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전라남도 출신이다. 골프선수 최경주, 신지혜도 전남 출신이다. 국제사회에 전남을 홍보하고 싶다. 개인적인 욕심이겠지만 한국 정부나 지자체가 원한다면 전남의 아름다움 좋은 점을 세계에 알리는 민간 대사라도 맡고 싶다.”

다치카와 마사키는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기자이다. 36년 전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취재하다 투옥생활을 당했던데 그치지 않았다. 이라크 전 때는 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북한탈북자를 취재하러 중국에 갔다가 추방되어 수년간 중국에 입국하지도 못했다.
 
필자는 일요서울의 편집국장 시절이었던 1997년 초에 그의 독도 입항을 도운 적이 있다. 그는 두고두고 이 사실을 잊지 못했다. 일본인 기자로서 독도의 첫 취재는 기자의 명예를 높이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1997년에 일본인 기자로서 독도를 처음 방문했다. 일본인 기자로서 최초의 독도 취재였다. 기자로서 영광이었다. 그때 일본의 nhk 방송에도 출연, 독도의 이모저모를 보여줬다. 일본 외무성의 한 관료는 '왜 일본인이 한국을 거쳐 독도를 가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필자는 한일 양국에서 문인으로 활약했던 수필가 김소운 선생의 말년에, 그 분을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다. 그 분은 한일 양국 간의 문화교류에 일생을 바쳤다. 한일 양국에 있어 자신의 역할에 대해, 배가 항구에 닿을 때 부둣가에 고무 타이어를 붙여놓은 것과 같음을 언급했다. 완충작용을 하는 타이어처럼 한일 양국의 완충자를 자임했었다. 다치카와 마사키. 그는 한국에서 큰 수난을 당했으면서도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이었다. 완충작용체가 아니라, 오른손과 왼손의 사이처럼 서로 돕는 한 지체 같은, 삶을 살아왔다.
 
이 글은 긴 시간에 걸쳐 한밤중에 썼다. 집필실 창밖, 한강가로 어둠이 꽉 들어차 있다. 밤을 새우며 이 글을 썼던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한-일이라는 국경이 있는 두 나라를 초월, 그의 인간 사랑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메모해두기 위함이었다. 어둠이 짙은 밤이 지나면 동트는 새벽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훤해질 것이다. 다치카와 마사키가 연루됐던 민청학련 사건은 한국정치가 어두울 때 만들어졌던  실화적 스토리이다.
 
그는 필자와 함께 술을 마시고 나서 헤어질 때면 “지금, 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여자가 필요하다. 따뜻한 사랑을 가진 여자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한국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받은 직후, 광화문 근처에서 축하의 맥주 한 잔을 '짠'하고 부딪쳤다. 그는 내 귀에 대고 “아무 생각 없이, 온천장에서 한 일주일, 생각을 비우며, 그저 쉬고 싶다”고 말했다. 박정희와 그를 추종했던 권력자는 그에게 몹쓸 짓을 했다. 그를 옆에서 오랜 동안 지켜본 한국인 지인으로서 사죄한다. 그의 사건이 무죄로 판결되어진 이 마당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했을 때의 추한 사건을 제발 잊지 말았으면 한다.

최근에도 다치카와는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 그간 그가 나에게 베푼 인정을 그 무엇으로도 모두 상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뉴욕과 서울의 뒷골목에서 셀 수 없이 졌던 술 빚-음식 빚을 열심히 갚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당뇨병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며 술 마시기를 꺼려한다. 그러하니 빚을 갚아 나가는 일이 더딜 뿐이다.

일본놈 형님-일본 분 형님

술에 취한 나는 가끔씩 다치카와 마사키에게 민족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36년에 걸친 일제 식민치하 시절의 악감정이 섞인 말투를 스스로 씻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내 나이보다 6세가 많은 다치카와 마사키를 향하여 '일본놈 형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일본놈 형님'이란 호칭은 비하와 존대가 뒤섞인 이상한 호칭이었다. 내가 조어로 만든, 사람을 비꼬는 뉘앙스가 담긴 투의 호칭이었다. 거의 그를 만날 때마다, 그런 호칭으로 불렀다. 그러니 난 자연히 '한국놈 동생' 이었던 셈이다. 그는 한국 정부 때문에 36년을 고생했다. 그가 필자 앞에서 흘린 눈물이 '한국놈 동생'의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반일감정을 지우는데 유효한 뜨거운 액체였으면 한다.
 
한국을 나 보다 더 사랑했던, 한국을 좋아했던 그를 어찌 '일본놈 형님'으로만 계속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 사이에 국경을 초월, 나이를 초월, 우정이 깊이를 더해갔는지 모를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놈 형님'에서 '일본 분 형님'으로 화해 갔다. 국경을 초월,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간 일본과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이젠, 나와 그는 가깝고도 먼 나라 사람이 아닌, 가깝고도 가까운 사이의 사람이 됐다. moonilsu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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