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 닿는 강연이 귀에서 머리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필수품목을 챙겨가야 했다. 손에 든 간식거리는 평안한 마음으로 강연의 따뜻한 맛을 음미하게 했다. 감옥에서 때우는 3 끼니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달콤한 간식은 온통 관심의 대상이었다. 빵 하나, 떡 한 조각, 음료수 한 병이야말로 가장 부유한 여유로움을 재소자에게 안겨주었다.
정부에서는 공식적인 3끼로만 의무를 다할 뿐 종교단체들의 활발한 지원을 기대했다. 종교 단체들 스스로도 갇혀있는 사람을 교화하면서 이런 정부의 묵시적인 도움을 환영했다. 그러니 종교단체의 교도소 행사에는 간식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히 공식화되었다.
교도소 강연할 때도 돈?
교도소의 교화활동은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가장 활발히 주도하고 있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신앙에서 열린 왕성한 봉사활동은 조직적인 체제를 갖췄다. 천주교 신자들, 기독교인들의 봉사활동은 지속적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에 반하여 불교의 자비사상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니 감옥에 있는 재소자들에게는 더욱이 자비사상에는 끼어들 수 없었다. 이런 바탕으로 불교신자의 천 명 중의 한명이라도 교도소의 방문에 따라나서지도 않는 어려운 현실에서 애달파하는 사람이 있었다.
|
그들이 갇혀 있을 때 좋은 이야기와 사랑하는 행동을 보였으니 의지할 데 없는 일부의 출소자들이 찾아왔다. 세상에 가족이나 좋은 지인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출소자들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삼중 스님에게 기댔다.
갇혀 있을 때와 출소한 후의 상황은 180도 달랐다. 출소한 후 그들이 바라는 욕망은 빵조각과 떡 하나로는 충족시킬 수 없늘 일이었다. 이런 점이 제일 힘들고 난감했다.
돈 마련하는 방법을 찾아
삼중 스님은 돈을 마련하는 숙제를 안고 평생을 전전긍긍 살아왔다. 갇혀 있을 때는 그나마 지인들의 도움으로 약간의 배품이 가능할 수 있었겠으나, 출소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돈을 만들려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재소자들의 교화에 도움을 청하는 삼중 스님에게 대다수의 지인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특히 불교신자들은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갇힌 자들에게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 완강했다. 삼중 스님은 불교신자들의 도움에 매달리지 않았다. 이런 때 삼중 스님에겐 고마운 화가 한 분이 나타났다. 목포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남농 허건 선생(南農 許楗, 1908~1987)이다. 삼중 스님이 허건 선생과 만난 것은 돌아가시기 15년 전쯤이었다. 화가로서 가슴이 따뜻한 분이었다. 삼중 스님은 전국을 다니면서 전시회를 30여 차례 열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기증받아서 판매하는 자선 전시회였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가슴이 따뜻했다. 예술가들을 설득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작품을 받아내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대문을 열어놓은 남농 선생
남농 선생은 호남의 거목이었다. 선생의 집을 무작정 찾아갔다. 남농의 자비로운 심성은 그대로 들어났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아니 항상 열려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 대가를 만나려면 약속을 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유명한 화백들은 특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농 선생만은 목포에 사는 생가의 문을 항상 열어 놓고 있었다. 유별난 큰 분이었다. 걸인이 찾아와도 밥을 먹고 가도록 했다. 작품을 구입하는 고객만 만나 주는 여느 대가들과는 엄청난 차이였다. 남농은 모든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선생님! 감옥에 있는 재소자들을 돕는데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자 여기까지 찾아 왔습니다.”
삼중 스님은 남농 선생을 직접 대면했다는 기쁨에 도움을 직접적으로 청했다. 열려 있는 대문처럼 남농 선생의 마음도 열려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스님은 뭐 때문에 죄 지은 사람들을 돕는지요?”
첫 질문에 좋은 느낌이 들었다. 질문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니 삼중 스님은 이해가 되도록 답변을 했다. 어떤 종교를 믿는지는 몰라도 노인분이라 불교에 친숙하다는 느낌에 탄력을 받았다. 그날따라 말이 잘 되었다.
“감옥에 있는 재소자를 교화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무너집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죄 지어서 갇혀 놓았는데 왜 무너져요?”
남농 선생은 참으로 순진했다. 삼중 스님의 답변에 그대로 끌려들어 왔다.
“선생님! 그들이 죄를 어디서 지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라는 사회 속에서 낙오자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교도소에서 갇혀 있다가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결국에는 세상으로 돌아 나옵니다. 그들이 나왔을 때 가정은 대부분 무너져 있습니다. 마누라는 도망가고, 애들은 풍비박산 난 현실이지 않겠습니까? 출소할 때의 결심과는 다르게 세상은 그들을 반겨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때는 이들이 대형범죄를 저지릅니다. 전과자의 재범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시한폭탄처럼 굴러다닙니다. 그들을 교도소에서 교화하는 게 우리의 행복을 지키는 예방책입니다. 예술가들도 행복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지 않습니까? 애들은 학교를 다니게 하면서 그들의 가정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 가정에서 재생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삼중 스님은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술술 잘 풀렸다. 한달음에 쏟아낸 이야기에 남농 선생은 감동했다.
기증 작품으로 자선전시회
대가들의 그림 작품은 대부분 금값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다. 대가들일수록 친한 친척이라 해도 절대로 공짜로 주지 않았다. 삼중 스님의 자선 전시회에 기증한 그림들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작품가격의 절반정도의 돈이 든 봉투가 먼저 내밀어지면, 그때서야 그림을 먼저 그려주는 혜택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림을 받기위해 몇 달 동안을 기다렸으나 삼중 스님에게는 순번을 바꾸어서 제일 먼저 그려주었다. 돈만 들고 달려가면, 언제든지 그림을 건네주는 혜택에 전국에서 자선 전시회를 열수가 있었다.
남농 선생은 빨리 그림을 그려서 주곤 했다. 일부 그림 값을 건네면 빨리 작품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을 줄여준다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삼중 스님의 손목을 잡고 식당으로 끌고 갔다. 삼중 스님은 도움을 받는 것이 미안해서 사양하면 억지로 잡아끌고라도 식당으로 갔다. 선생은 점심이라도 얻어먹지 않으려는 삼중 스님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정이 남다른 남농 선생은 고기 집을 가면 일부러 삼중 스님의 밥 위에 고기를 올려놓곤 했다.
“괜찮아요. 스님! 한 50여 년 전 내가 젊었을 때, 나도 스님들한테 많이 얻어먹었어요. 해인사 밑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죠. 마을에서 송아지를 잡으면 그 덕에 얻어먹었던 적도 있어요. 그러니 스님도 주저하지 말고 어서어서 드세요.”
젊은 시절에 빈곤함을 경험했던 남농 선생은 어려운 사람들의 실상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인지 삼중 스님의 일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고기에 젓가락을 대지 않는 삼중 스님을 다독였다.
“어서 많이 먹으세요. 스님! 잘 먹어야 감옥에 다니면서 좋은 일들을 많이 할수 있지요.”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많이 드셔야 좋은 그림 많이 그리시지요.”
“제가 지금은 참 행복하죠. 이런 고기도 먹으니........”
말끝을 흐리는 남농 선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추워도, 동상 걸려도, 그림에만
“제 할아버지의 존함이 허자, 소자, 치자입니다. 할아버지는 추사의 친구이면서 제자로 지낸 분이셨죠. 제 아버지도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어요. 그 옛날 화가들은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지금도 화가들이 그지 잘 살지 못하는 것에 비교하면 정말 비참했지요. 제 젊은 시절도 역시 말을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어요. 찬방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동상이 걸려서 결국에는 다리를 절단했어요. 배가 고파서 먹고 살려니 그림만 그리다가. 아무리 추워도 그냥 그림만 그렸어요. 어딜 가도 따뜻한 방이 없으니, 그저 추운 냉방에서. 자다 일어나면 그림을 그렸어요. 뻔히 동상이 걸릴 줄 알면서도”
참으로 뼈아픈 사연이다. 의족에 몸을 지탱했던 남농 선생은 삼중 스님을 챙겼다. 삼중 스님 역시 가혹한 어린 시절의 응어리에 한평생을 교도소를 쫒아 다니는 삶이니,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 1982년경 삼중 스님은 남농 선생의 집, 목포를 보름에 한 번씩은 찾아갔다. 따뜻하게 대하니 자주 가도 노인네가 삼중 스님을 그리 좋아했다. 60대 중반이었던 남농 선생은 밥을 먹으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부지런한 습성에서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유독 잘 그리는 소나무는 화랑 가에서는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좋은 작품일지라도 너무나 작품들이 많이 그리다보니 화랑 가에서는 가격을 그리 높게 책정하지 않았다.
남농 선생의 빚을 갚을 방안
어느 날 삼중 스님은 kbs 텔레비전의 ‘11시에 만납시다’의 프로에 출연했다. 유명 인사와의 만남이라는 타이틀로 1시간의 대담을 진행했던 프로였다. 방송에서 삼중 스님은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러니 대담이 정말 잘 진행되었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난리가 났다.
삼중 스님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방송이 나가면 곧장 시청률이 나왔다. 워낙 재미있었다는 반응에 ‘11시에 만납시다’에 3번이나 출현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한번은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삼중 스님, 세 종교계의 원로들이 ‘11시에 만납시다’에 출현했었다. 이때의 반응도 적지 않은 소동을 겪었다.
불교계의 대표주자로 삼중 스님이 나온 것에 대한 잡음도 상당히 컸다. 한 프로에 3번이나 출연하다보니, 삼중 스님은 담당pd와 친하게 되었다. pd는 삼중 스님을 아주 좋아했다.
이 참에 삼중 스님은 남농 선생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방안이 떠올랐다. 담당 pd에게 남농 선생을 출현시키자는 제안을 건넸다. 남농 선생의 작품의 진가를 높이는 데 큰 반향을 일으킬 방송출현이야말로 가장 좋은 기회였다. 남농 선생의 지명도는 단지 목포에서만 유명할 뿐, 서울 화랑 가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삼중 스님은 방송출현이 선생에게 큰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담 당pd를 설득했다. 드디어 연출가가 남농 선생이 있는 목포까지 가서 촬영을 하든지, 아니면 서울 방송국에 와서 촬영을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내게 되었다.
남농의 고집은 못 말려
삼중 스님은 ‘빚’을 갚는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그 길로 목포로 쫒아 내려갔다.
“선생님! ‘11시에 만납시다’ 텔레비전 방송시간을 빼 놓았어요.”
함박웃음에 입이 다물어지지 못하는 삼중 스님은 남농 선생을 보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스님! 무슨 소리예요?”
남농 선생은 차가운 첫마디에 양미간이 좁아졌다.
“선생님, 그 프로를 모르시나요? 유명한 인사들만이 하는 kbs 1시간 특집 프로요?”
자신의 기분에 취한 삼중 스님은 흥분한 탓에 남농 선생의 냉랭한 기분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물론 알고 있죠. 그런데요?”
뭔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스쳤지만 삼중 스님은 자기 도취에 빠져 설명을 이어갔다. 이리저리해서 담당pd의 방송 약속을 어렵게 받자마자 이리로 쫒아 내려왔으니, 다음 주에 방송 시간에 맞추어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장황하게 떠들었다.
“그건 난 못해요!”
단호한 남농 선생의 한마디에 삼중 스님은 눈을 번쩍 치켜떴다.
“.............”
삼중 스님은 남농 선생의 답변에 힘이 쪽 빠져 나갔다. 보답에 대한 선물 한보따리를 통째 쓰레기통에 내다버리는 심정이었다.
“스님! 그것은요~? 방송 좋아하는 서 아무개스님이나 해라 하세요. 그 분이라면 방송을 좋아하시니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이 또한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명인사와의 대담프로에 남농 자신에 대한 방송허락을 거머쥐었다는 말에, 웬 서 아무개 스님의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지. 삼중 스님은 방송 홍보로 남농 선생의 작품이 더 많은 유명세를 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심정에 안타까웠다.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남농 선생이 답답하게 보였다.
“선생님! 서 아무개 스님이 아니라 선생님을 위해 시간을 어렵게 빼 놓았는데, 웬~ 서 스님에게.”
“스님은 언제부터 kbs 방송국 직원이 되었나요? 나는 그림 그리는 화가이니 그림만 열심히 그리면 되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밤 시간 1시간동안 가슴에 남을만한 이야기 거리들이 내게는 없어요. 사람들에게 뭐 대단한 일을 했다는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한 세기를 주름잡았던 대가는 무엇이 달라도 달라, 유별난 게 있었다. (다음에 계속)
sungae.kim@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