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3일 납치된 대구 여대생 이모(26)씨가 주검으로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이씨는 납치 하루 뒤인 24일 밤 11시께 88고속도로 거창나들목 인근 배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알고 봤더니 검거된 용의자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소개로 소개팅을 했던 ‘소개팅남’ 김모(25)씨. 김씨는 “이씨를 알아보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씨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혀 10년 전 짧은 인연이 ‘악연’으로 돌변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10년 전 소개팅서 만난 인연…의심 안 했더니 ‘악연’으로
범행 차량 추격하며 번호 조회도 안 해 ‘엉성한 경찰’ 탓?
“산책 좀 다녀올게요.”
지난 6월23일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대구 수성구에 사는 이모(26)씨는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 집 주변을 가볍게 돌 생각이었던 이씨는 티셔츠와 슬리퍼 차림으로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이씨에게 한 남자가 접근했다. 그 남자는 경계하는 이씨에게 “나쁜 사람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운전면허증을 보여줬다. 자세히 보니 고등학교 시절 소개팅으로 만나 1주일 정도 알고 지냈던 김모(25)씨. 이에 김씨는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반가워하며 “함께 바람이나 쐬자”고 제안했다.
소개팅 인연이 ‘악연’으로
이씨가 전혀 의심하지 않고 김씨의 승용차에 타자 상황은 돌변했다. 김씨는 이씨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으로 제압한 뒤 미리 준비해둔 테이프로 이씨의 손발 등을 묶었다. 고등학교 때 잠깐 마주친 인연이 거의 10년 만에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인해 납치로 이어진 것. 이씨를 뒷좌석에 태운 김씨는 7시간이 지난 오전 7시 46분, 이씨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이씨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를 납치해 데리고 있다.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현금 6000만원을 여자의 통장으로 입금해라.” 협박 전화를 받은 이씨의 가족들은 깜짝 놀라 “원하는 대로 다할 테니 우리 딸 해치지 말아요”라고 애원했다. 김씨는 이날 오후 6시 34분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몸값을 요구했지만 그렇게 큰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던 가족들은 경찰에 납치 사실을 신고했다.
김씨는 그 뒤 5차례에 걸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달서구 용산동 인근 지역 편의점과 은행 등에서 이씨의 어머니가 보낸 290여만원의 돈을 인출했다. 김씨가 돈을 인출하기 위해 현금인출기를 찾은 모습이 고스란히 cctv에 담겼고, 경찰은 이를 토대로 수사를 시작했다. 경찰이 주목한 점은 김씨가 타고 온 흰색 모닝 차량. 경찰은 이후 수사를 벌인 끝에 24일 오후 7시 30분께 대구 달서구 용산동 주택가에서 김씨를 검거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부채 5500만원을 갚으려 납치극을 벌였다”고 밝혔으며, “내 얼굴을 본 이상 이씨를 풀어주면 경찰에 붙잡힐 것 같아 승용차로 이동하던 중 88고속도로 주변에서 목 졸라 죽인 후 시신을 버렸다”고 진술했다.
경찰 허술함에 싸늘한 주검으로
범인은 붙잡혔지만 경찰의 허술함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허점을 보여 피해자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 사건이 발생한 23일 오후, 현금인출기 근처 cctv로 김씨의 차량 번호를 식별하지 못한 경찰은 대구 성서구 관내에서 차량 검문를 하던 중 달서구 월암동 열병합 발전소 앞에서 문제의 차량을 발견했지만 놓쳤다. 경찰은 “차량이 정차해 있다가 경찰이 접근하자 가속페달을 밟아 갑자기 달아났다”며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중앙선을 침범해 반대편으로 도주했다”고 전했다. 이어 “퇴근 시간 무렵이라 도로에 차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시야에서 차량을 놓쳤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차량을 추격하면서도 김씨의 차량 번호를 알아두거나 조회하지 않았다. 게다가 용의 차량을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도주로를 차단하거나 검문검색을 강화하지도 않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경찰은 큰 사거리를 막거나 수색에 주력했다고 밝혔지만 김씨는 그날 오후 10시경 거창 톨게이트를 빠져나간 뒤 이씨의 시신을 유기했다. 김씨가 이날 오후 6시 30분경 이씨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이씨의 목소리를 들려줬던 만큼 경찰이 김씨를 놓치지 않았다면 이씨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
경찰이 이번 수사 과정에서 보인 허점은 더 있다. 수사 결과 김씨가 이씨를 납치한 곳 근처에서 일주일 전에도 다른 여성을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지만, 경찰은 이를 단순 폭행사건으로 처리했던 것. 김씨는 6월16일 오전 3시쯤 수성구 지산동에서 귀가하던 백모(26·여)씨를 뒤에서 승용차로 친 후 쓰러진 백씨의 얼굴을 주먹으로 여러 차례 때리고 뒷좌석에 태웠다. 다행히 김씨가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순간 백씨는 승용차 문을 열고 탈출해 미수에 그쳤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납치보다 폭행이나 성범죄 미수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하는 동안 김씨는 또 다른 납치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여대생 이씨가 납치된 장소와 700여m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던 만큼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졌다면 사전에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제대로만 했더라면…
또한 이씨의 가족들은 “경찰이 김씨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며 계좌 출금정지 조치를 요구했다”며 “출금정지 사실을 안 범인이 경찰의 추적을 눈치 챘고 이후 연락이 끊기면서 일이 잘못됐다”며 신중하지 못한 경찰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한 유족은 “피해자 계좌가 인출 한도가 있으니까 용의자가 1500만원을 한 번에 인출하기 어렵다고 판단, 인출할 때마다 수사망을 좁혀나가면 검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돈을 지불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이 ‘돈도 없잖아요’라며 피해자의 계좌에 대한 지급정지를 요구했다”며 “또 우리가 촘촘하게 수사망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안심하라고도 말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결과는 우리 아이가 이틀 만에 숨진 채 돌아왔다. 억울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대구여성회 남은주 사무처장은 “경찰이 아동·여성 사건의 경우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16일 발생한 사건을 주민들에게 알렸더라면 여대생 납치 살해사건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서경찰서 최준영 형사과장은 “당시 용의 차량의 번호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피의자가 달서구 일대만 돌아다녔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도주할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명했으며, 대구경찰청은 “앞으로 아동·여성 납치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서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수사본부를 즉시 설치해 사건 초기단계에서부터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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